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1) 호족세력의 동향
            • (1) 호족의 개념과 성격
            • (2) 신라 말기 호족의 동향 모
          • 2)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의 통일
            • (1)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 (2) 왕건 즉위 초 호족의 동향
            • (3) 후삼국의 통일
          • 3) 태조의 여러 시책
            • (1) 대내정책
            • (2) 대외정책
          • 4) 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 (1) 고구려 계승이념
            • (2) 불교사상
            • (3) 풍수지리사상
            • (4) 유교사상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1) 혜종대의 호족과 왕권
          • 2) 정종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동향
          • 3) 광종과 경종의 왕권강화책
            • (1) 광종대의 왕권강화
            • (2) 경종대의 정치와 호족
          • 4) 호족 연합정권설의 문제
            • (1) 호족 연합정권설과 그 비판
            • (2)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
            • (3) 고려 초기의 정치형태
        • 3.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 1) 성종대 지배체제의 정비
          • 2)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과 최승로의 시무책
          • 3) 정치적 지배세력의 상황과 성격
        • 4. 고려사회 지배세력의 성격론
          • 1) 관료제 및 가산관료제설과 그에 대한 비판
          • 2) 귀족·귀족제의 개념
          • 3) 귀족제사회설의 논거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1) 목종·현종대의 시련과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1) 전시과의 갱정과 녹봉제
            • (2) 개성부와 경기 및 귀족중심 사회
            • (3) 법제와 경제유통
            • (4) 불교의 흥성
            • (5) 유교와 사학 및 도서출판
            • (6) 풍수지리 사상과 현실작용
            • (7) 대외문물 교류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1) 이자의의 난과 숙종의 즉위
            • (1) 이자의의 난과 그 사상
            • (2) 숙종의 즉위 과정과 그 성격
            • (3) 왕권강화 정책과 그 의의
          • 2) 귀족사회 내의 갈등과 이자겸의 난
            • (1) 예종대 정국의 추이
            • (2) 인종의 즉위와 이자겸의 난
          • 3)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 (1) 이자겸의 난 이후 정국의 추이
            • (2) 서경천도 논의의 전개와 묘청의 난
          • 4) 의종대의 정치혼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통일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후삼국의 성립과 고려왕조의 건국은 종래 신라의 중앙 진골귀족에 대신하여 지방을 거점으로 새로운 정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대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후삼국의 성립과 고려 건국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신라 말기에 호족세력이 대두하게 되는 경위를 잠깐 살펴 두고자 한다.

대체로 신라 하대의 정치적 상황은 당시의 지배세력이었던 진골귀족 상호간에 치열한 정권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라 중앙의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진성여왕 3년(889)에 지방통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던 沙伐州에서 元宗·哀奴 등이 주도하여 일어난 농민봉기는 이제 더 이상 신라의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하나의 구체적인 實例였다. 이 농민봉기를 계기로 하여 집권층에 대한 농민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힘의 공백에 편승하여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쌓아 일정한 지역을 지배하는 지방세력가들이 전국 각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그 정치력이 겨우 수도권 지역에 미칠 뿐, 나머지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지방세력가들의 지배 아래 들어 가게 되었다. 진골귀족의 시대는 끝나고 호족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甄萱은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방을 장악하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마침내 900년에는 스스로 후백제왕으로 칭하였다. 한편 弓裔는 처음에 北原을 중심으로 한 큰 세력이었던 梁吉의 부하 장수로 출발하였으나 뒤에 독립 세력을 형성하여 지금의 중부 지방을 지배하는 强者가 되어, 901년에는 왕이라 자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904년에는 鐵圓을 도읍지로 정하고 국호를 摩震이라 하였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泰封으로 고치었다. 이로써 후삼국이 성립되고 통일신라는 다시 크게 세 세력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뒤에 고려왕조를 건국하게 되는 王建은 松嶽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가 출신으로서 궁예에 귀부하여 그 부하 장수가 됨으로써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였다. 왕건은 탁월한 전략과 원만한 인품으로 궁예와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궁예 정권하에서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착실히 닦아 나갔다. 그런데 마침 궁예가 정권 말기에 폭정을 거듭하여 인심을 잃게 되자, 왕건은 주위의 추대와 민중의 적극 참여로 궁예를 축출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게 된 것이다.

918년에 궁예의 세력 기반을 물려 받아 새 왕조의 창시자가 된 태조 왕건은 국호를「高麗」라 하고, 年號를「天授」라 정하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 앞에는 허다한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다. 안으로는 태조의 새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궁예 정권 이래의 기존 정치세력에 대응하며 왕권을 안정시키는 일과 신라 이래로 정치기강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에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으며, 밖으로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후삼국 관계에서 우위를 접하고 있던 후백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신라와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하며, 또 전국 각처의 호족세력을 어떻게 회유 포섭하느냐 하는 문제도 태조 자신이 해결해야만 할 과제였다.

태조 왕건은 일찍부터 전략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군사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 이후에는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에 위기관리 능력과 함께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이를 실천할 줄 아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태조 왕건은 새 왕권에 도전하는 여러 차례의 반역사건을 슬기릅게 극복하면서 왕권을 다져 나갔으며, 한편 즉위 초에 토지제도를 바로 잡고 고대적 수취를 지양하여「取民有度」로 표현되고 있는 새로운 수취체제를 시행하는 등, 새로운 대민시책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와 아울러 후백제에 대해서는 평화관계 유지에 힘쓰는 한편, 전국 각처의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重幣卑辭」의 적극적인 교섭을 통하여 해가 거듭 될수록 고려에 귀부하는 호족들의 수가 증가하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이 시책은 뒤에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신라에 대해서는 궁예 때의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여 신라의 호감을 얻게 되었으며, 이는 뒤에 신라의 자진 항복을 가져 오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태조 왕건은 그의 치세 중에 여러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전시대와는 그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통일왕조를 수립하는 데에 성공한 사실이다. 그는 복잡 미묘한 후삼국 관계에 매우 기민하고 탄력성 있게 대처함으로써 건국 초의 불리한 여건을 서서히 극복하고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조 18년(935) 후백제의 내부 분열로 왕위에서 쫓겨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한 사건이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해에 신라의 자진 항복이 이루어졌고, 이듬해인 태조 19년에는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을 통해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고려 태조에 의해 우리 국토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지 불과 30여 년만에, 그리고 큰 후유증 없이 다시 하나의 왕조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는 이유 이외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그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문제를 무리없이 타개할 줄 아는 능력과 함께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통찰력을 고루 갖춘 탁월한 군주였다.

그러한 태조로서도 그의 재위 중에 호족 문제에 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고려 국초에 있어서 호족세력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던가를 잘 말해 준다 하겠다. 태조의 치적을 살펴 보면 그가 내내 호족세력을 회유하고 견제·포섭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힘썼음을 알게 한다. 왕실의 혼인문제, 西京經營의 문제, 그리고 事審官制·其人制 등은 이러한 대호족시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난한 과제는 태조 자신이 풀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서는 제2대 혜종대에서 제5대 경종대까지 37년 동안에 일어난 정치적 변동을 왕권과 호족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제2대 왕인 혜종은 태조의 장자로서 태조4년(921)에 왕위 계승권자로 책봉된 뒤 태조 26년(943) 태조의 사후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22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정치적·군사적 경륜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호족 출신으로서 그의 후견인이 된 重臣 朴述熙의 보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갖춘 혜종으로서도 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왕권의 안정을 기할 수가 없었다. 혜종은 재위 중에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노리는 적대세력으로 말미암아 불안한 나날을 보내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당시 왕권의 미약과 호족세력의 강대를 단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氣度恢弘」「智勇絶倫」하였던 혜종도 아무런 치적을 남기지 못한 채 재위 2년만에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와 아울러 혜종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박술희도 왕위 쟁탈의 와중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주위의 추대 형식으로 혜종의 뒤를 이어 제3대 왕이 된 정종은 혜종의 이복 동생으로서 혜종대에 政情이 불안하던 시기에 西京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王式廉의 군사력을 수도로 끌어 들여 王規 등의 政敵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정종의 즉위 과정을 보면, 혜종의 유촉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 기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서경의 왕식렴 세력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종대에도 그 출발부터 왕실의 독자적인 힘에 의해서 왕권이 강화되거나 확립되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고려 왕실의 세력 기반이었고 또 수도인 개경에서조차 왕위를 부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던가 한다. 정종이 주위의 반대와 원성을 무릅쓰고 왕식렴의 세력 기반인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추진한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서경천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정종은 재위 4년만에 27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태조 이래 고려 왕실의 오랜 숙원인 왕권의 강화 내지 확립은 혜종과 정종대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까지에는 권력 구조면에서 호족세력이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미 다 알다시피 왕권의 강화는 제4대 광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광종은 정종의 동복 동생으로서, 정종의 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광종의 치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의 왕권 강화책이다. 광종 7∼11년(956∼960)까지 그는 왕권 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한 뒤에, 광종 11년부터 광종 26년까지, 즉 그가 죽는 해까지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의 숙청작업을 계속하였다. 광종은 호족세력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그의 전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광종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 왕권의 강화라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기반이 다음 대인 제5대 경종대에 계승되었다. 경종은 정치적 역량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종 원년(976)에 고려 토지제도의 모체가 되는「始定田柴科」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광종대의 왕권 강화책의 성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광종대 당시에 호족세력으로 대표되던 새로운 정치세력이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광종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계속하였지만 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경종 즉위 초에 호족세력이 다시 큰 정치세력으로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있던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여기서 광종의 왕권 강화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정책이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러나 정치 운영에 있어서 왕권이 전제적으로 독주해도 좋을 정도로 호족세력이 무력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광종의 왕권 강화책의 결과 왕권이 종래와는 반대로 호족세력보다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변화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광종 이후에는 왕권의 주도 아래 호족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치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이 모색되어져 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제6대 성종대에 본격화되는 정치제도와 정치세력의 개편 배경을 계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6대 성종대에 이르면 그 이전에 비하여 큰 변화가 나타난다. 우선 중국식의 3省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며, 유교적 정치 이념이 제도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찍이 태조에서 경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 체험하면서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왕권과 臣權 간의 상호 협조와 조화가 있어야 하며, 또 유교적 정치이념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崔承老의 정치사상이 반영되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제도와 이념상의 변화와 아울러 그 이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성격의 정치적 지배세력이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등장하는 지배세력도 출신 지역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크게 두 계파로 나눌 수 있다는 연구 성과가 이미 나온 바 있으나,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그 이전과는 달리 모두 귀족적인 성격으로 변신하였다는 것이다. 즉 고려의 정치적 지배세력이「호족」에서「귀족」으로 성격 변화를 일으키는 분기점이 바로 성종대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매우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성종대를 기점으로 새롭게 출발한 고려 사회는 그 뒤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시련과 제도상의 변화와 개편이 있었지만, 그 기본 골격은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갔다. 가령 성종 다음 왕인 제7대 목종 원년(998)의「改定田柴科」도 성종대에 정비된 지배 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그 뒤 고려는 내부의 갈등 대립과 外侵 등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목종대에 金致陽의 亂은 바로 康兆의 정변으로 이어져 목종은 폐위되고 현종이 새 왕이 되는 진통을 겪었으며, 한편 성종 12년(993) 제1차 契丹의 침입 이후, 다시 침입의 구실을 찾고 있던 거란은 강조가 저지른 목종 廢弑에 관한 問罪 등을 요구하며 현종년간에 대대적인 침략을 자행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현종은 羅州 지방에까지 피난하는 등 고려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발전은 중단되지 않았다. 현종대에 대대적인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여러 시책이 꾸준히 추진되었으며 大藏經의 雕板 사업 등 문화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제11대 문종년간(1046∼1083)에는 국가의 여러 제도를 완비하여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 고려의 귀족사회는 현종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어 갔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현종대부터 외척세력이 등장하여 귀족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오게 한 사실이다. 현종은 그가 거란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던 도중에 큰 도움을 받았던 金殷傅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 들여 김은부 가문은 단번에 귀족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었다. 이로부터 고려에서는 귀족이 될 수 있는 통로가 하나 더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김은부는 직접 귀족사회에 변화를 줄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뒤 제11대 문종부터 제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80여 년 동안은 역대의 국왕들이 모두 仁州李氏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 들임으로써, 인주 이씨는 계속 왕실과 외척 관계를 맺어 고려의 귀족사회에 큰 변동을 초래하게 되었다. 인주 이씨들은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써 왕자들의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고려 왕실과 갈등·대립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한편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인주 이씨 중에는 본인이 직접 국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인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예종과 인종의 이중 외척이었던 李資謙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인종4년(1126)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아서, 외척으로서 장악한 권력의 한계를 보여 주기는 하였으나, 그 난이 당시 고려의 귀족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난중에 불탄 궁궐의 잔해는 마치 침울해진 개경 귀족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상징하였을 듯하고, 그 시대를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의 地德衰旺說에 의해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다는 주장이 꽤 호소력이 있을 법하였다. 이러한 개경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妙淸의 서경천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과 연관된 묘청의 난은 개경파에 의해 진압되고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으나, 내면적으로는 고려 사회가 크게 변모될 수밖에 없었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으로 이미 내부 분열이 노정된 고려의 귀족사회는 그 이전의 귀족사회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귀족사회의 발전과 귀족 신분층의 수적 증가에 따라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정치적 계파가 형성되게 된 데다가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을 진압한 공신세력이 새로 추가되어, 귀족들 상호간의 대립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한편 귀족들의 득세와 오만은 국왕의 권위도 안중에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가 바로 의종대(1146∼1170)가 아니었던가 한다.

인종과 의종대의 집권세력이었던 귀족들의 행적을 살펴 보면, 왕실의 권위나 국가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만하게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따라서 계파를 달리하는 귀족 상호간의 치열한 반목은 물론이요, 국왕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히 정치는 실종되고 私的 권력만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의종 말기에 귀족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져 방자하게 처신해도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평온이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태풍 전야의 평온과 같았다. 고려의 귀족사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을 大事件이 폭발할 단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제6대 성종대부터 제18대 의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성격 문제에 관해서 잠깐 언급해 두고자 한다.

종래의 통설에서는 그 지배세력을「貴族」이라 일컬어 왔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그 성격을「貴族」이 아니라「官僚」로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 제기가 있은 뒤에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논쟁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귀족제설과 관료제설을 고수하는 각각의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귀족적인 요소와 관료적인 요소가 複合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수정적인 절충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성격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현재는 귀족제설이 우세하여 여전히 통설로 되어 있으나, 그 성격 논쟁이 가진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귀족제설의 논거가 되는 蔭敘制와 관료제설의 논거가 되는 科擧制 연구가 지배세력의 성격 구명이라는 문제 의식에서 진전되어, 새로운 업적이 나오게 된 것은 이 논쟁이 거둔 학문적 성과의 하나라 할 것이다.

고려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성격을 풀 수 있는 관련 분야에 관한 연구가 그 폭과 깊이를 더할 때에, 다시 한번 그 성격 해명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河炫綱>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