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은병화의 유통
숙종 때에는 금속화폐로서 동전 뿐만 아니라 고액화폐인 銀甁도 주조되었다. 숙종 6년 당시 은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동을 섞어 盜鑄하는 폐단이 심하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법정화로서 은병화를 만들었다. 은병은 은 1근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땄기 때문에 속명으로 闊口라고 불렀다. 은병에는 도주의 폐단을 막기 위해 표인을 하였다.1467) 그러나≪鷄林遺事≫에 의하면 은 12냥 반과 동 2냥 반을 합주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은병을 法定貨로 삼은 것은 은을 화폐로 공인한 것이므로 12세기 이후 각종 매매, 뇌물, 조세 대납, 물가 표시 등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은 유통이 늘어나게 되었으므로, 도주 현상을 야기시켰다.1468) 은병은 고액의 화폐였기 때문에 은에 동을 섞어 私鑄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여러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충혜왕 때는 소은병을 만드는 등, 형태가 바뀌었지만 제도만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동전과 은병의 발행과 유통을 중심으로 한 숙종 때의 화폐유통정책에 대해 예종 원년(1106)에 중외의 신하가 대부분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한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1469)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예종 즉위를 전후한 정치적 변동, 숙종의 왕권강화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던 의천의 죽음, 그에 따른 사원세력의 급격한 추세변동, 윤관 등 신흥세력의 위축 등으로 인하여 숙종 때의 주전정책은 자체 내에 한계성을 지닌 채 변질되어 갔다.1470)
고려 전기의 화폐유통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구조적인 요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수취체제가 현물과 노동력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생산자의 화폐를 통한 교환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둘째,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차별적인 유통구조에 기초한 이원적 유통구조가 피지배층의 잉여의 축적과 그에 기반한 유통경제의 발달을 억제함으로써 동전·철전의 유통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셋째, 所의 존재처럼 부곡제 지역의 설정을 통한 수취체제의 고착성이나 工匠案의 작성을 통한 수공업자의 국가적 통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본관제의 사회구조가 상공업을 규정하고 있었다. 본관제의 사회구조는 이 시기 수취 체제나 지배층·사원의 유통경제의 성격과 함께 농촌시장 등 직접생산자 중심의 유통경제 발전을 일정한 수준에 머물게 하였다.1471)
그러나 동전·철전 유통책이 실패했다고 하여 고려 전기의 경제수준이 자연 경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유통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농촌시장에서도 추포가 교환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직접생산자 중심의 유통경제가 활성화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1472)
고려왕조의 정책이 화폐경제를 권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현물경제에 치중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금속화폐의 유통은 부진하였다.1473) 국가가 실물 경제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은 조세와 공부 및 녹봉이 모두 현물이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화폐경제에 관한 한 고려 전기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1474)
1467)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숙종 6년. 田村專之助, 앞의 글, 325∼3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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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 | 田炳武, 앞의 글, 104쪽. 須川英德, 앞의 글, 46쪽에서는 은병의 제조 목적이 주로 대송무역의 지불수단에 있다고 하였다. |
1469)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예종 원년. |
1470) | 金光植, 앞의 글, 145쪽. |
1471) | 이상은 蔡雄錫, 앞의 글, 100∼107쪽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
1472) | 蔡雄錫, 위의 글, 108쪽. |
1473) | 金三守, 앞의 글, 49∼50쪽. |
1474) | 朴龍雲, 앞의 책, 2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