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변·모변과 양측적 계보관계
고려시대 친족관계의 중요한 특성의 한 가지는 남성을 통한 계보관계로만 구성되는 부계의 계보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씨의 족」으로 지칭된 계보에서 보듯이 계보관계에서 구성되는 남과 여의 성별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부모-자녀관계로만 이어지는 직계의 계보관계에서 든 방계의 계보관계에서든 마찬가지였는데, 남성에서 남성으로만 연결되는 계보나 여성에서 여성으로만 연결되는 계보를 포함하여 중간에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형태로 개재되는 모든 계보가 친족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친족조직에서 계보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는 우선 다음 <그림 1>과 같은 8祖戶口式을 들 수 있다.212)
이는 호주를 중심으로 3세대를 소급하는 증조대까지는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모든 계보관계를 보여주며, 한 세대를 더 소급하여서는 증조와 증조모 각각의 부측과 모측의 계보를 보여준다. 8조호구식과 같은 유의 계보관계로는 고려시대의 전통과 연결되는 조선시대 계보도의 한 형태인 다음의<그림2>와 같은 8高祖圖를 볼 수 있다.213)<그림 2>에서는 한 개인의 고조부모대까지 소급되는 모든 직계의 계보가 표현되고 있다. 여말의 음서관계 자료에서는「外高祖」의 문음을 받은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214)「외고조」란 중국에서와는 다른 고려에 특유한 계보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호칭인데,<그림 2>의 ③·⑤·⑦·⑨·⑪·⑬·⑮가「외고조」로 불리웠다. 그리고 때로는 내외의 구별없이 ①∼(16) 모두가 高祖父母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림 2>에서는 계보상의 남(△)·여(○)의 구성이 균등한 반면,<그림 1>에서는 16개의 계보 중 반에 해당하는 8개 계보의 위 부분에서 남성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나타난다. 이러한 계보형태는 8조호구식이 4조호구식을 단위로 하여 그것들을 모아서 이루어진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그림 1>보다는<그림 2>가 실제의 친족관계에서의 계보형태를 보다 잘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특징은 계보상에 남성이나 여성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포함하여, 중간에 남과 여가 다양한 순서로 개재되는 여러 가지 계보들이 친족관계에서 대등한 비중을 갖는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재산상속에서 자녀간의 균분상속이 계속될 때의 재산의 전승도 그러한 계보를 따라 내려가게 될 것이고, 그러한 예는 뒤에서 언급될 고려시대 음서관련 기사들에서도 나타난다.
8고조부모·외고조부모 등의 친족호칭도 중국에 없는 고려 고유의 친족호 칭이었고, 그러한 계보들 자체가 중국의 부계 친족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친족제도를 반영해 준다. 위의<그림 2>는 5세대 범위에 한정해 나타낸 계보도이지만 그보다 더 확대된 범위의 계보들도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功臣子孫蔭敍 등에서도 실제의 그러한 친족관계들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고려에서<그림 2>와 같은 계보들을 지칭한 고유의 용어를 본다면 우선「父邊」·「母邊」이라는 용어가 주목된다. 부변이라 함은<그림 2>의 범위에서 16계의 계보들 중 ①∼⑧에 해당하는 아버지쪽으로 연결되는 모든 계보들을 포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개념은 인류학쪽의 용어와 개념을 참고한다면<그림 2>에서 ①의 계보만인「부계의(patrilineal)」계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부측의(patrilateral)」계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변이라 함은<그림 2>의 범위에서 ⑨∼(16)에 해당하는 어머니쪽으로 연결되는 모든 계보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그림 2>에서 (16)의 계보만인「모계의(matrilineal)」 계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모측의 (matrilateral)」계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재산의 상속유래를 말할 때 ‘母邊傳來’라 함은 ⑨∼(16)의 계보들 중 어느 것으로부터 어머니를 통해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림 2>의 ①∼(16)의 계보들 모두, 즉 부변(부측)과 모변(모측)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은 양측적(bilateral)이라는 용어가 그에 해당한다. 8고조부모의 범 위의 부변과 모변의 계보들 모두를 포괄하는 양측적 계보는 대단히 다양한 계보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원리는 간단하다. 즉 친족관계를 성립시키는 계보를 부계나 모계에서와는 달리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수를 더 확대한 범위에서도 동일한 양태가 나타난다. 이를테면 32祖圖니 64조도니 하는 것도 그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그림 2>와 같은 계보는 이러한 양측적 계보가 세대를 소급하여 위로 올라가는 경우의 양태이지만, 아래 세대로 내려가는 경우에도 친족관계를 성립시키는 계보를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 원리는 동일하였다.
그러한 실례를 보여주는 것은 음서관계 기록에도 여러 자료들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 40년 6월에 詔하여 ①-a 祖代六功臣 三韓功臣 內玄孫之玄孫之孫 ①-b 外玄孫之玄孫之子 挾七女 未蒙戶一名 許初入仕 ②-a 三韓後壁上功臣 內玄孫之玄孫之玄孫之子 ②-b 外玄孫之玄孫之玄孫 挾六女 未蒙戶一名 許初入仕 ③-a 代代配享功臣 內玄孫之玄孫 ③-b 外玄孫之曾孫 挾五女 未蒙戶一名初入仕(≪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凡敍功臣子孫).
이는 ①·②·③의 세 등급의 공신 자손들에 대해 음서의 혜택을 주는 범위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①-a, ②-a, ③-a의「內玄孫之…」라 함은 子에서 子로 이어지는 계보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①-b, ②-b, ③-b의「外玄孫之…」라 함은 전자와 달리 중간에 女가 들어가는 계보의 자손들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①-b의「挾七女」, ②-b의「挾六女」, ③-b의「挾五女」라는 기사로, 이는 곧 그 계보의 중간에 들어가는 여의 수를 뜻하는 것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外玄孫之曾孫 挾五女」라고 한 것에서「挾5 女」는 8세손에 이르는 범위의 계보 중 반드시「여」가 5명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가 5명까지 들어가는 것을 상한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 다는 점이다. 즉 女가 1명부터 5명까지 들어가도 된다는 것으로 충렬왕 8년의 聖祖苗裔에 대한 음서에서215)「雖挾 ( )( )女」라 함과 같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①·②·③은 子에서 자로 이어지는 계보상의 자 손들만이 아니라, 비록 약간의 제한이 가해지는 것이나 계보의 중간에 女도 들어가는 자손들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①·②·③중에서 그림으로 표시하기 편한 가장 작은 범위를 갖는 ③을 그림으로 표시하면<그림 3>과 같은 64가지 경우의 계보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216) 이 중 64번째의 경우 하나만이 女가 6명이 들어가므로 위의 범위에서 제외된다.
<그림 3>에서 (64)까지를 포함하는 8세손까지의 범위는 祖先인 공신에서부터 비롯되는 子와 女 모두를 통한 모든 후예들과의 혈연관계가 된다.<그림 3>에 나타나는 계보는<그림 1>이나<그림 2>와 비교할 때, 한 개인으로부터 아래로 자손들에 이르는 계보인 것에 비해 위로 조선들에 이르는 계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서 나타나는 선대에서 후손에 이르는 직계의 계보 각각에 주목하면 동질성이 나타난다. 즉 그 계보관계의 특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다양한 형태의 계보들을 포괄하는 양측적인 것이다.
<그림 3>에는 계보의 시점과 종점들을 모두 남성(△)에 한정했는데 이는 당시의 공신이 되는 주체와 음서의 대상이 되는 주체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또<그림 3>은 내손으로는 현손의 현손인 9세손, 외손으로는 挾女數가 5이하인 범위내에서 현손의 증손인 8세손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인데, 이는 음직수여 범위의 한계선상에 위치하는 자손들로서 실제로는 9세손 또는 8세 손 이내의 전체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남·녀에 대등한 계보관계는 방계의(collateral) 계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한 예를 전·현직 고관의 혈족에 대한 정규적인 음서의 시행에서 보면, 그 우선적인 대상은 대체로 直子, 內孫과 外孫, 姪과 甥, 壻와 收養子의 순서였으니, 방계혈족으로서 형제의 子인 질과 자매의 자인 생이 대등하게 포함되고 있었다. 고아가 된 방계친족 아이에 대한 부양에 있어서도 형제의 자녀(질 및 질녀)와 자매의 자녀(생질 및 생질녀)가 대등하게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파악하면 친삼촌·외삼촌·고모(부)·이모(부)에 의한 부양의 경우들이 되고 있었다. 또 다른 예로, 고려의 相避制는 중국 송제를 참고한 것이지만, 중국에서 부계적인 친족들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남·여를 통한 계보상의 대칭적 위치의 친속들이 대등하게 포함되어 있었다.217) 그것을 방계친속에서 보면 친삼촌과 외삼촌, 고모부와 이모부, 질과 생질, 친사촌·고종사촌·외사촌·이종사촌 등이 대등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보다 먼 방계의 친속으로서 동성인 친속과 마찬가지로 이성인 친속도 ‘族人’으로 호칭되며 대등한 유대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도 있거니와,218) 방계의 계보관계도 양측적인 형태를 잘 보여준다.
212) | <그림 1>은 이른바 국보 131호 호적(許興植,≪韓國中世社會史資料集≫,一潮閣, 1976)을 이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러한 여말선초의 8조호구식의 예는 족보에 인용된 戶口單子나 准戶口들에서 몇 가지가 더 발견된 바 있다(이에 대해서는 許興植, 앞의 책 및 李基白, 앞의 책 참조). 본고의 논지와 큰 관계는 없으나, 8조호구식의 기재 내용은 世系推尋의 자료상태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경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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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 宋俊浩,<韓國에 있어서의 家系記錄의 歷史와 그 解釋>(≪歷史學報≫87, 1980)에는<그림 2>와 같은 8고조도뿐만 아니라 16祖圖 등에 대해서도 소개되고 있다. |
214) | 盧明鎬,<高麗時의 承蔭血族과 貴族層의 蔭敍機會>(≪金哲埈博土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
215) |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凡敍祖宗苗裔 충렬왕 8년 5월 敎. |
216) | 盧明鎬, 앞의 글(1979), 312∼315쪽. |
217) | 盧明鎬,<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韓國史硏究≫33, 1981). |
218) | 그 한 예로서 崔忠獻 일파의 핵심적 인물에 속했던 盧碩崇과 金躍珍이 ‘族人’으로 지칭되고 있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이러한 예는 많이 나타나거니와, ‘족인’만이 아니라 부계적인 친속을 지칭하는 다른 漢字式 호칭들도 외족 등에게 그대로 쓰이고 있는 사례들이 자주 나타난다. 이는 고려의 친족 호칭이 부측의 친속과 모측의 친속에 같이 쓰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