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씨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
1) 최씨정권의 성립
명종 14년(1184)에서 26년(1196)까지 12년 동안 지속되었던 李義旼政權은 이의민의 아들 李至榮과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 사이의 비둘기를 둘러싼 분쟁을 계기로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은 것이 계기가 되어 최충수는 그의 형 최충헌과 함께 이의민 제거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의민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비의 권세에 의지하여 횡포하고 방자했다 한다. 그 아들 가운데서도 이지영과 李至光이 특히 심해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반드시 범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아 사람들은 그들을「雙刀子」라고 불렀다는 것이다.040) 따라서 이지영의 행위가 이의민의 실각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러한 우발적인 사건이 이의민 실각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당대 제일의 실력자 이의민이 그 이전까지 이렇다 하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최충헌에게 살해된 것은, 이의민에 대한 불만이 최충헌을 비롯한 그 주위의 인물들에게 누적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러한 불만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으며, 또 불만을 느꼈던 사람들은 어떠한 인물이었나를 살펴 보는 것은 이의민 실각의 원인을 밝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먼저 이의민을 살해한 장본인인 최충헌에 대하여 알아 보자.
최충헌은 상장군 崔元浩의 아들이었다. 그의 外祖 柳挻先 역시 상장군에 오른 무반 가문이었다.041) 따라서 그는 무인으로서는 매우 좋은 가문의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음서에 의해 관도에 진출한 그는「刀筆吏」로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행정실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자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미신만을 믿었다는 이의민과는042) 이 점에 있어서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최충헌은 도필리를 버리고 무반직으로 출사로를 바꾸었다. 도필리를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가 이치럼 吏職에서 무반직으로 벼슬길을 바꾼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무신란 직후였다고 해서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남달리 이름을 빛내는 데 뜻을 두었다는 그가043) 무신란 이후 무신들의 권력 장악에 자극되지 않았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충헌은 무신란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무반으로 나아갔다고 생각된다.
최충헌은 명종 4년(1174) 조위총의 난 진압 때,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되어 別抄都領에 選補되고 이어 별장에 올랐다. 기탁성이 최충헌을 발탁한 것은 최충헌의 용맹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만일 최충헌이 모든 면에서 기탁성과 견해를 달리한 인물이었다면, 기탁성이 그를 발탁했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金平이 최충헌의 집권기에 추밀원부사, 지공거 등의 요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되는 일이다. 김평은 김보당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죽음을 당한 한언국의 사위인데, 그는 기탁성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최충헌에게 다시 기용된 것은 최충헌과 기탁성의 정치적 성격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기인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최충헌은 이의민 제거 직후인 명종 27년(1197)에, 尹鱗瞻과 기탁성의 서경 토벌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에게 功臣號를 추증하였다. 그런데 윤인첨과 기탁성이 조위총을 벤 것은 명종 6년(1176)의 일이었다. 이들이 20년이 지난 이때에 비로소 추증된 데에는 최충헌의 정치적인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윤인첨과 기탁성계의 인물들에 대한 최충헌의 접근의 결과가 아니었나 의심되는 것이다. 기탁성이 비록 최충헌을 발탁한 인물임을 상기하더라도, 이에 대한 보답치고는 조금 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인첨은 문신이었으며 기탁성은 무신란에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이로써 보면 최충헌은 문신들과도 협력관계를 이룰 수 있는 소지를 갖춘 인물이었다.
최충헌은 이의민 제거 직전에 겨우 攝將軍에 이르렀다. 그의 이러한 진급은 매우 완만한 것이었다.044) 벼슬길에 나아간 후 8∼9년만에 장군에 올랐던 경대승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진급이 느렸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를 이끌어 줄만한 무인들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만은 지적해서 좋을 것이다. 즉 그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무인들이 그의 집권 이전의 무신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렇듯 더딘 출세에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보다 훨씬 낮은 신분의 출신들이 그의 상급자로서 군림했을 때의 불만은 상상하기 힘들지 않다.045) 그러므로 그는 무인실력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가 慶尙晉州道의 按察使로 파견되었으나 權臣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명종 17년(1187)이므로 이의민집권기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그를 파면시킨 권신이 반드시 이의민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비록 아니라 하더라도 이의민집권기에 실권을 가지고 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임을 당한 최충헌의 입장에서 보면 그를 파면시킨 권신이나 이의민은 동일한 집권세력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안찰사의 직에서 해임된 그가 권신에 불만을 가졌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권신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의민정권 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후 그는 중요한 직책은 거의 맡지 못했는데, 그 당시 그의 처지는 “여러 해 동안 막히고 오그라들었다”는046) 것으로 잘 대변된다.
지금까지 최충헌의 출세과정을 더듬어 보면서 그의 정치적 성격의 일면도 함께 검토하였다. 그러면 최충헌의 이의민 제거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기여한 무인들은 어떠한 인물인가 알아보기로 하자. 최충헌의 이의민 제거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은 그의 조카인 朴晉材와 族人 盧碩崇 등이었다. 이들이 이의민 제거에 앞장서게 된 동기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최충헌의 족인이었다는 점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이유는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외에, 監行領將軍 白存儒와 대장군 李景儒·崔文淸 등이 협력했으나, 어떠한 성격의 인물들인가는 확실치 않다.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기여한 무인들을 알아보는 방법의 하나로 필자는 최충헌정권 초기에 宰樞에 오른 무인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이 어떠한 성격의 인물들이었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최충헌정권이 성립할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이나 최충헌정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재추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기여했거나, 성립 이후 최충헌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충헌은 명종 26년(1196) 4월에 이의민을 제거했는데, 11월에는 이의민정권 아래에서 문하시중을 역임한 두경승을 中書令에 임명하였다. 중서령은 실직이 아니었고 종친에게 일종의 명예직으로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일반관료의 경우는 致仕職으로 제수하여 일을 보지 않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사망한 사람에게 증직으로 많이 이용되기도 했던 것이다.047) 따라서 최충헌에 의한 두경승의 중서령 제수는, 두경승이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기여했기 때문이 아니고, 이의민 제거에 따른 인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임시로 취해진 조치에 불과했다는 이해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경승과 최충헌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인데, 설사 두경승의 중서령 임명이 인심 회유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왜 하필 두경승을 내세워 그러한 효과를 기대했는가 하는 점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杜景升은 全州 萬頃縣人이었다. 그의 가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그의 장인이 상장군인 文儒寶였다는 데 이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의 출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신란 당시 다른 무인들과는 달리 남의 재산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한다. 따라서 그는 무신란에 소극적이었던 인물로 이해된다. 난의 수행과정에서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법들을 그만이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경승의 개인적인 성품 탓으로만 돌려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경승이었던 만큼, 이의민과 정치적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이의민의 집권기 동안에도 이의민과 종종 정치적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결국 두경승의 출신 가문이나 정치적 성격이 이의민과 달랐던 점이, 최충헌으로 하여금 두경승을 내세워 쿠데타 이후의 민심을 수습해 보려 했던 이유였다고 이해된다.
신종 즉위년(1197)에 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監修國史·判兵部事·太子太傅에 임명되었던 奇洪壽는 최충헌과 함께 신종의 폐위를 단행한, 최충헌정권에 누구보다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詩書를 교육받을 정도의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그는 상당한 가문의 출신이었다고 추측된다.
역시 신종 즉위년에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던 李文中에 관해서는 명종 13년과 동왕 17년에 金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무인들을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한 예는 무신란 이후 흔히 나타나는데, 이들은 비록 무인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학식을 갖춘, 따라서 좋은 가문의 출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미천한 출신의 이영진이 금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온갖 수모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048) 미루어 보더라도 짐작된다.
신종 4년(1201) 평장사에 오른 金晙은 경진의 사위였다. 경진은 경대승의 아버지로 당시 그의 가문은 무반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무신란 이후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이러한 경진의 딸을 처로 맞이한 김준의 가문 역시 경진의 그것에 크게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車若松은 신종 즉위년에 추밀원부사에 올랐었다. 그는 直史館의 벼슬을 지 낸 車擧首의 작은 아들이었다. 직사관은 비록 정8품에 불과하지만 春秋館에 소속된 벼슬로 문신 가운데서도 문명이 있는 자들이 임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출신 신분도 좋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金元義는 이의민 제거 직후 장군으로서 급사중을 겸임하였다. 이로 미루어 최충헌의 이의민 제거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의 부친 金位는 守司空左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장인은 상장군 印榮寶였다. 김위가 역임한 실질적인 관직은 알 수 없지만, 수사공좌복야에 추증했다는 사실만으로 상당한 관직에 올라 있었음이 분명하다. 김원의의 정치적 지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낮은 관직의 인물을 수사공좌복야에 추증했을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김원의는 강종 2년에 평장사가 되었다.
신종 7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은 盧孝敦은 盧永淳의 아들이었다. 노영순은 의종 말에 承宣의 지위에 올랐었는데, ‘兵家의 子’였기에 무신란에서 화를 면하고 이후 평장사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는 전통적인 무반 가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효돈 역시 좋은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의 집권 초기에 정치적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 무인은 于承慶이었다. 최충헌의 쿠데타 직후인 명종 27년, 무인들은 利賓門 밖의 서쪽 행랑 기둥에 구멍이 뚫린 사실을 두고, 이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저주하여 저지른 행동이라 하였다. 문신들은 이에 대한 해명을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대장군이었던 우승경이 간악한 자의 행위임을 지적하여 문신들을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했다 한다. 최충헌의 쿠데타는 무인들이 주도한 것이었기에, 당시의 문신들은 무인들의 움직임에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문신들을 위해 무인들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다면, 그의 정치적 위치는 대단했을 것이다. 최충헌과 밀착된 인물이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더구나 우승경은 쿠데타 직후인 명종 26년 6월에 최충헌과 함께 승선에 임명되었다. 쿠데타 직후 최충헌이 승선직을 장악한 것은 국왕의 정치적 향방을 중시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함께 우승선이 된 우승경이었고 보면, 쿠데타의 주도세력이었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그는 희종대에 참지정사에 올랐었다.
우승경의 출신에 관해서는 그가 우승선이었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할 것 같다. 일찍이 경대승은 명종으로부터 승선직 제수를 제의 받은 적이 있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하자, 국왕인 명종은 정중부의 아들 鄭筠이 가지고 있던 승선직을 경대승에게 제수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은 이를 거절하였다. 승선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직책이므로 儒者가 아니면 맡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049) 경대승의 이러한 주장은 물론 원칙론적인 것이었다. 무신란 이후에는 무인들도 승선직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인이라 하더라도 학식을 갖춘 자들이 이를 담당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승경도 무인이었지만 학식이 있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유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문에서 성장했다고 이해된다.
鄭叔瞻은 최충헌의 아들인 崔怡(또는 瑀)의 장인이었다. 그의 가계에 관해서는, 그의 아버지 鄭世裕가 명종조에 형부상서에 이르렀다는 점이나, 그가 崔惟淸의 아들인 崔詵의 딸을 처로 맞이했다는 사실050)이 참고된다. 그의 처가는 당대 최고의 재상가였던 것이다. 그는 명종 24년에 不軌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부형 鄭世裕·鄭允當과 함께 남쪽지방에 유배되었다. 따라서 정숙첨이, 최충헌가와 통혼한 시기가 언제인가 분명치 않지만 설령 최충헌의 쿠데타 이후였다 하더라도, 최충헌의 이의민 제거에 협력할 소지는 그 이전부터 이미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제까지의 검토를 통하여,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정권 성립에 기여했던 무인들은 대체로 좋은 가문의 출신이었음을 알았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맡해 주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최충헌정권의 무인들과 이의민정권을 주도했던 무인들과의 출신을 비교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민정권을 주도한 무인들 가운데는 賤系를 포함하여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 많았다. 절에 딸린 노비의 아들이었다는 이의민을 비롯하여, 옥공의 아들인 조원정, 電吏 출신의 정방우, 창고 곁에서 쌀을 주워 먹고 살았다는 석린 등이 이의민집권기의 무인들로 눈에 띈다. 이들 외에도 ‘門地가 賤微했다’ ‘세계가 본래 한미했다’ ‘가문이 대대로 천했다’라고 표현된 무인들이 이의민정권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미한 가문 출신인 무인들이 이의민정권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란에서 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때문이었다. 무신란은 하급 무신을 비롯한 다수의 일반 군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하급 무신들은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이것이 표면화된 시기가 이의민집권기였던 것이다. 그러한 만큼 이의민집권기는 커다란 변화를 수반한 시기였다.
이의민정권 아래에서 한미한 가문 출신 무인들의 정치적 부상은 좋은 가문 출신의 무인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문에 힘입어 순탄한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특히 무신정권 아래서는 정치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의민집권기에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에게 이의민의 제거를 제의한 최충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이자 충헌의 동생이었던 崔忠粹는, 특히 그의 사위가 趙永仁의 아들인 趙準이었음이 주목된다. 조영인은 명종조에 이미 참지정사와 정당문학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최충수가 조영인가와 혼인한 것은 그의 쿠데타 이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쿠데타의 성공 이후 곧 최충헌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충수는 쿠데타 이전에 이미 재상가와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의 배경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쿠데타 당시 최충수의 관직은 東部錄事에 불과하였다. 동부록사는 서울의 5부 가운데 하나인 동부의 녹사로 甲科權務가 이 직에 임명되었다.051) 즉 최충수는 정식 품관도 못되었던 것이다.052)
물론 좋은 가문 출신의 무인이 이의민집권기에 고위 관직에 올랐던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것은 杜景升을 통해서 짐작된다. 두경승은 이의민집권기에 평장사를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이르렀으며, 三韓後壁上功臣에 책봉되기도 했던 인물이다.≪高麗史≫에 그의 공신 책봉을 축하하는 연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연회장에서 그가 노래를 부르자 이의민이 이를 꾸짖었고, 이에 연회는 파했다 한다. 공신에 책봉되고 직위도 이의민보다 위에 있던 두경승이었으나, 이의민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충수와 같은, 좋은 가문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제약을 받았던 무인들은 이의민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다. 한편 두경승과 같이, 이의민정권 아래에서 고위직에 올라 있었지만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지 못한 인물들에게는 이의민 제거에 동조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는 최충헌과 두경승의 관계를 통해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한 직후, 두경승은 명종을 폐위하는데 있어서 최충헌의 의논 상대였던 것이다.
최충헌은 쿠데타의 성공 직후 10조목에 달하는 건의사항을 국왕에게 올렸다. 소위「封事十條」가 그것이다. 그 첫머리에서 최충헌은 이제까지의 정치가 태조가 제정한 법제와는 크게 어긋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봉사10조는 이의민정권의 失政을 지적하고 자신의 쿠데타가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올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쿠데타 이후 제시한 공약과 같은 것이다. 기존의 정치가 태조의 법제와 달랐음을 강조한 것은, 최충헌 자신이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의민집권기의 변화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하겠다.
이상과 같은 이해가 정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최충헌정권의 성립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의 결과이기보다도 이의민정권을 주도했던 무인들과 최충헌으로 대표되는, 그들과는 다른 정치적 성격의 소유자들 간의 대립의 결과였다고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무신란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미천한 출신의 무인들이 좋은 가문출신의 무인들에게 정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고려가 신분제사회였음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충헌정권의 성립 이후에 재추에 오른 무인들 역시 초기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기여한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가문의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鄭克溫·金就礪·鄭邦輔 등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다.
고종 2년(1215)에 참지정사로 죽은 정방보는 대장군 鄭元寧의 아들이었다. 한편 고종 5년 추밀친부사에 오른 김취려의 조부는 金吾衛攝郎將을 지낸 金 彦良이었으며, 부 金富는 金吾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김언량이나 김부 모두가 무반직에 올라 있었던 셈이다. 특히 김부는 명종 16년에 장군으로서 예부시랑을 겸임하기도 했다.
정방보가 어떠한 가문의 출신인가는 현존하는 그의 묘지명을 통해서도 확인하기 어려운데, 다만 신종 원년에 그가 예부시랑으로서 금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의 단서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것 자체가 학식을 갖춘 무인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폐위되고 신종이 옹립된 시기로 어느 때보다 對金外交가 중요한 시기였다. 금은 명종의 퇴위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빌미로 고려에 정치적인 압력을 가해 왔던 것이다. 정방보는 상당한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가문의 출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최충헌집권기의 무인 재추들이 좋은 가문의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최충헌정권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 이들은 고려의 기본적인 제도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급격한 변화를 달가와 했을 까닭이 없다.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그들의 현실적인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최충헌정권은 그 이전의 이의민정권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미천한 가문 출신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된 이의민정권이 커다란 변화를 수반했던 것과는 달리 최충헌정권은 과격한 개혁은 단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충헌집권기 무인 출신 재추들의 자손 가운데는 최충헌 이후 崔怡(瑀)·崔沆정권 아래에서 현달한 자가 적지 않았다. 우선 김준의 아들 金仲龜는 최이정권 아래에서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김중귀는 그의 장녀를 최충헌의 아들 崔球에게 출가시킴으로써, 최씨가와 혼인을 맺기도 했다.
車若松의 후예로는 車倜이 눈에 띈다. 차척은 약송의 형인 若椿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는 최충헌정권 아래에서 좌승선을 거친 후 최이집권기에 참지정사를 역임하였다.
정숙첨의 아들은 鄭晏이었다. 정안은 최항의 집권과 더불어 知門下省事에 오른 후, 참지정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김취려의 아들은 金佺인네, 그는 원종 원년에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정방보의 후손에 대해서는 그들이 누구였는가 조차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지위는 정방보가 襄平公에 추증되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방보가 사망한 것은 고종 13년인데, 그는 고종 7년에 평장사에서 安東副使로 폄출되었다. 이러한 그가 사후 양평공에 추증된 것은 그의 자손들의 정치적 지위에 힘입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최충헌집권기에 재추에 오른 인물들의 자손이 최충헌 이후의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무인들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문신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현저하였다. 최씨집권기 동안에 만 3명 이상의 문신 재추를 배출한 가계가 넷이나 되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 일이다. 慶州金氏 金鳳毛의 가계와 橫川趙氏 趙永仁의 가계, 그리고 定安任氏 任濡와 鐵原崔氏 崔惟淸의 가계가 그들이다.
김봉모의 가계는 김봉모가 참지정사에 오른 이후 그의 아들 金台瑞가 평장사가 되었으며, 손자 金起孫 역시 고종 말에 평장사가 되었다. 이들 외에 김태서의 또 다른 아들 若先과 慶孫도 각각 무인으로 재추의 지위에 올랐었다. 이 가운데 약선은 최이의 사위로서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결국 무반으로 진출한 인물들까지를 포함하면, 김봉모의 가계는 최씨집권기 동안 5명의 재상을 배출한 셈이다.
횡천 조씨는 조영인이 신종조에 평장사에 오른 이후, 그의 아들 趙冲과 손자 趙季珣이 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그런데 조충의 동생으로서 우승선을 역임한 趙準은 최충헌의 아우 최충수의 사위였다. 한편, 조계순은 그의 딸을 최항에게 출가시켜 최항의 장인이 되었다. 조영인의 가계는 3대에 걸쳐 재상 의 지위에 올랐으떠, 2대에 걸쳐 최씨가와 혼인을 맺었던 것이다.
신종조에 평장사에 임명된 任濡는 숙종조에 평장사를 지낸 任懿의 손자였으며, 부친은 의종조에 문하시중을 역임한 任元厚였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여러 대의 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충헌은 임유의 형인 任溥의 딸과 혼인했으며 자신의 딸은 임유의 아들 任孝明에게 출가시켰다. 최충헌이 이처럼 임유가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누대의 재상가인 정안 임씨와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053) 정안 임씨는 임유의 새 아들 景肅·景謙·孝順이 또한 모두 최씨정권 아래에서 재상이 되었다.
신종 즉위년에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된 崔讜과 지추밀원사에 오른 崔詵은 모두 무신란 직후인 명종조에 평장사를 역임한 최유청의 아들이었다. 최유청의 자손들은 최당이나 최선에 그치지 않고 그들 이후에도 최씨정권 아래에서 현달하였다. 최당의 손자 崔璘이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최선의 후손들은 이보다 더욱 번성하였다. 최선의 아들인 崔宗峻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손자 崔昷과 崔坪 역시 재상이 되었다. 철원 최씨는 최씨정권 아래에서만 6명의 문신 재상을 배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충헌의 아들인 최이는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한다. 또한 최선의 사위가 최이의 장인인 정숙첨이었던 것이다. 또한 최온의 딸은 후일 최항의 배필이 되었다. 따라서 최선의 후손들은 최충헌가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굳혀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최씨집권기 동안 소수의 가문에서 많은 수의 재상을 배출했다거나 최씨가 이들과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문벌에 대한 강한 집착을 사회로부터 씻어 버릴 수 없었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최씨집권기에는 정치적 지배세력에 커다란 변화가 없었음을 암시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최충헌정권과 이후의 최씨정권은 그 성격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040) | ≪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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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 李慶喜,<崔忠獻家門硏究>(≪釜山女大史學≫5, 1987), 11∼15쪽. |
042) | ≪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
043) | <崔忠獻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
044) | 朴菖熙,<崔忠獻小考>(≪史學志≫3, 단국대 사학회, 1969), 107쪽. |
045) | E. J. Shultz, Institutional Development in Korea under the Ch’oe House:1196∼1258, Unpublishe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76, p.130. |
046) | <崔忠獻墓誌銘>(≪朝鮮金石總覽≫上). |
047) | 邊太燮,<高麗宰相考-3省의 權力關係를 중심으로->(≪歷史學報≫35·36, 1967;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61∼64쪽). |
048) | ≪高麗史≫권 100, 列傳 13, 李英搢. |
049) | ≪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
050) | 朴龍雲,<高麗時代의 定安任氏·鐵原崔氏·孔巖許氏 家門分析>(≪韓國學論叢≫3, 誠信女大, 1978), 62쪽. |
051) | 邊太燮,<高麗時代 京幾의 統治制>(≪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60쪽. |
052) | 金光洙,<高麗時代의 權務職>(≪韓國史硏究≫30, 1980), 41·47쪽. |
053) | 朴菖熙, 앞의 글, 109쪽. 閔賢九,<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7), 1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