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무신란 이후 문신 중심의 폐쇄적 문벌지배체제가 와해되면서 고려 후기에는 여러 갈래의 출신기반을 갖는 인물들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는 무신의 권력 장악, 몽고와의 장기간 전쟁에 따른 在地세력의 이동과 몰락, 외세 종속구조의 지속 등에 말미암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세력 가운데는 당대에 권력층으로 부상하거나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여 문벌을 형성한 부류들이 있었다. 그 동안 이들을 權門世族으로 지칭하고 그 성립과정과 내적 구성, 그리고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여 왔다. 즉 고려 후기 권문세족은 농장을 형성한 대토지소유자들로서, 관료진출도 과거보다는 음서에 의존하는 등 문학적·유교적 소양과는 거리가 먼 非文非儒的 성향의 소유자들이었고, 元과 결탁하거나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이 시기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권문세족은 원이 고려의 자주성을 말살하려 했을 때 이에 저항하는 등 고려의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권력 행사도 관료로 진출하여 정치기구를 매개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에 비해서는 관료적 성격을 지닌 보다 발전된 형태의 지배세력이었던 것으로 규정되었다.0152)
권문세족에 대한 이같은 범주 설정과 성격 규정은 이를 新興士大夫와0153) 차별화시켜, 고려 후기 정치사를 이들 사이의 세력관계와 정치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권문세족을 집권세력, 신흥사대부를 현실 비판세력으로 설정하여 고려 후기 정치체제와 권력구조 속에서 이들의 위상과 정치적 대응방식을 중심으로 이 시기 정치사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아가 여말에 이르기까지 지배세력의 구성 범주와 성향의 변화를 드러내어, 조선 건국과정에서 지배세력의 교체와 변화의 폭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춰 정치사를 구성해냄으로써 고려 후기 정치와 사회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으며, 여말선초 사회변동의 내용과 성격을 보다 더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었다. 이후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이같은 이해방식은 정치사의 서술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사상·문학·예술사의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정형화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권문세족과 사대부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게 되면서,0154) 권문세족과 관련해서는 그 개념상 혼란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되는 가운데,0155) ‘權門’과 ‘世族’은 그 지칭하는 대상을 달리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즉 권문은 원간섭기 국왕 측근세력을 포함하여 가문배경에 관계없이 권력층이 된 부류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세족은 당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문벌가문을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후기 사회세력으로서의 최고 지배층을 굳이 개념화하려면 이를 ‘세족’으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0156)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권문세족 성립의 주요한 근거로 삼아온 충선왕 복위교서의 ‘宰相之宗’도 사대부 가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0157)
권문과 세족을 이렇게 구분할 때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권문세족은 권문과 세족을 모두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권문층인 세족, 곧 문벌가문의 권력층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한 지칭으로도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 대상과 범주를 문벌가문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것이며, 권문과 세족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그 성격 규정도 다르게 될 것이다.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면 굳이 권문을 붙일 필요없이 세족으로 지칭하면 그만일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는 권문세족에 대한 이상과 같은 문제제기를 수용하여 고려 후기 지배세력 가운데 문벌가문을 세족으로 지칭하고, 이들 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당시 권력구조에서의 지위 및 권문과의 관계, 사회모순에 대한 대응방식 등을 밝혀 이들이 갖는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0152) | 권문세족의 성립 문제와 성격 규정에 대하여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閔賢九,<高麗後期 權門世族의 成立>(≪湖南文化硏究≫6, 全南大, 1974). ―――,<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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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3) | 이 시기 사대부 연구 성과는 李佑成,<高麗朝의「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 및 金潤坤,<新興士大夫의 擡頭>(≪한국사≫8) 참조. |
0154) | 권문세족과 사대부에 대한 종래의 이해방식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는 이들 정치세력의 범주설정과 성격규정, 사대부의 등장시기, 조선 건국과정에서의 지배세력 교체문제 등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상과 같은 권문세족과 사대부에 대한 문제제기와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金光哲,≪高麗後期 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硏究≫(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88 ;≪高麗後期 世族層硏究≫, 東亞大 出版部, 1991). 金塘澤,<忠宣王의 復位敎書에 보이는 ‘宰相之宗’에 대하여 -소위 ‘權門世族’의 구성분자와 관련하여>(≪歷史學報≫131, 1991). 이익주,<고려후기 사대부와 권문세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서평)>(≪역사와 현실≫8, 한국역사연구회, 1992). 고려말 정치사연구반,<고려말 정치사 연구동향>(≪역사와 현실≫12, 1994). |
0155) | 朴天植은 ‘권문세족’을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그 개념상의 혼란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세족은 附元期 이전부터 공신가문을 형성하여온 가계나 가문을 지칭하며, 權門勢家는 부원 官歷 또는 元室과의 혼인을 배경으로 한 벌족으로 규정하였다(朴天植,<朝鮮建國의 政治勢力硏究(下)>,≪全北史學≫9, 1985, 4∼10쪽). 세족을 공신가문으로, 권문을 부원세력으로만 한정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문벌(세족)과 권문을 구분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한편 李益柱는 충렬왕대 정치세력을 국왕측근세력·권문세족·신진관료·부원세력 등으로 구분하고 측근세력을 당시 최고 권력층으로, 권문세족을 문벌가문으로 설정하였다. 국왕측근세력을 권문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문벌가문과 차별화시키고 있다(李益柱,<高麗 忠烈王代의 政治狀況과 政治勢力의 性格>,≪韓國史論≫18, 서울大, 1988, 157∼158쪽). |
0156) | 金光哲,<「權門」「世族」의 用例>(앞의 책, 1991), 36∼47쪽. |
0157) | 金塘澤, 앞의 글, 23∼2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