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1) 도평의사사
            • (2) 충렬왕대의 관제격하
            • (3) 충선왕대의 관제개혁
            • (4) 공민왕대의 관제개혁
            • (5) 고려 후기 정치체제의 성격
          • 2) 지방 통치체제의 변화
            • (1) 감무제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변화
            • (2) 문무교차제의 시행과 외관간의 갈등
          • 3) 관리 등용제도의 변질
            • (1) 인사행정의 문란과 관원의 숫적 증가
            • (2) 과거제와 음서제 등의 변질
            • (3) 첨설직제와 납속보관제의 신설
          • 4) 군제의 개편
            • (1) 원간섭기의 군제
            • (2) 군역체계의 변화
            • (3) 중앙군제의 개편
            • (4) 지방군제의 재편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1) 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 (2) 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 (3) 고려 후기 사회모순의 심화와 세족층의 동향
            • (4) 고려 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1)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 (2)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 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 (1) 개혁정치의 추진
            • (2) 개혁정치의 성격
            • (3) 신진사대부의 성장
        • 3. 고려왕조의 멸망
          •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 (1)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 (2)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 (3)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 (1) 이성계 집정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권찬탈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1) 전시과체제의 붕괴
          • 2)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
            • (1) 수조지집적형 농장
            • (2) 사적 소유지형 농장
          • 3) 녹과전의 설치
          • 4) 사전·농장의 혁파
        • 2. 수취제도의 변화
          • 1) 조세
          • 2) 공부와 요역
            • (1) 공부
            • (2) 토목공사에서의 부역실태
            • (3) 수취기준의 변화
        • 3. 농업기술의 발전
          • 1) 농법의 발전
          • 2) 목면의 재배
        • 4. 수공업과 염업
          • 1) 수공업
            • (1) 관청수공업
            • (2) 소 수공업
            • (3) 사원수공업
            • (4) 민간수공업
          • 2) 염업
            • (1) 고려 전기 소금의 생산과 유통
            • (2) 고려 후기 소금 전매제의 실시
        • 5.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1) 도시상업
            • (2) 지방상업
            • (3) 고려 후기 상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
          • 2) 대외무역
            • (1) 원과의 무역
            • (2) 다른 지역과의 교역
          • 3) 화폐의 유통
            • (1) 포화
            • (2) 은병과 소은병
            • (3) 쇄은과 은전
            • (4) 원의 보초
            • (5) 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權門世族과 新進士大夫의 대립국면으로 설정하고 권문세족의 親元的 태도나 불법적으로 농장과 노비를 증대시키며 정치 질서를 문란케 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새로 등장한 사회세력이 신진사대부였다는 인식은 최근 20년 가까이 일반화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그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어 왔다.0294)

 그러나 최근에는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부정하고 새로이 개념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즉 권문세족 또는 신진사대부 등 용어의 용례를 검토하여 이들을 정치지배세력으로서의 대립적 존재로 보는 것이 잘못된 구도이며 그 개념도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0295) 논의의 주된 내용은 먼저 士大夫를 지방 중소지주적 경제기반, 한미한 가문출신으로 보고 정치적 향배도 반원적 개혁의 주축으로 보던 기존의 견해에 대해 사대부에는 권문세족 출신도 다수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 종래의 입장을 부정하고0296) ‘사대부’라는 용어의 개념을 검토하여 고려 후기 신진관료층을 사대부라고 칭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0297) 용어에 대해서도 이들을 신진사대부 대신 新進(興)士類,0298) 新進官僚,0299) 新興官人,0300) 新興士族0301) 혹은 新興儒臣0302) 등으로 지칭할 것을 제시하는 입장으로 집약된다.0303)

 그러면 사대부와 관련하여 고려 후기 지배세력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일별하여 보기로 하자.

 무신집권기에 새로운 官人의 형성 과정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 의하면 吏族출신이나 지방의 향리층이 많이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예전의 문신이나 무신과는 형태를 달리하는 지배계급으로 ‘能文能吏’의 신관료였다. 이들은 주로 科擧를 통하여 등장한 관인으로서 ‘학자적 관료’이며 ‘관료적 학자’0304)의 성격을 갖는 ‘사대부’의 祖型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향리층은 新興官人=士大夫의 모태가 되었을 뿐이고 향리층의 전면적 官人化를 달성한 것은 아니어서 향리층과 신흥관인=사대부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서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사회적 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조선건국에 주동적 사명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0305) 이러한 견해는 이후 학계에서 크게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고려 후기 정치적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새로운 세력들에 관한 연구가 이어졌다.

 무신집권하에서 지방출신의 新進士人들은 政房을 통해서 官人으로 성장 발전하여 갔고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이들이 남긴 낡은 권력구조의 유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방으로 인연해서 기신하였던 관인들이 무신의 권력구조의 유제를 이어 전주권을 천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 권력구조에 반발하는 신흥관인층은 기성관인층을 거세하기 위해서 정방을 폐지하여 그들로부터 전주권을 탈취하려 하였다. 정방은 초기에 新進官人(또는 新進士人)들의 관료로의 진출에 교량적 역할을 하였지만 후에는 도리어 이렇게 진출한 기성관인들의 세력구축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므로 새로이 진출하는 신흥관인층은 자기발전을 위해 정방의 혁파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정방의 권신과 신흥관인층사이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의 상반으로 고려말까지 신·구관료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방은 치폐를 거듭하였다. 이후 정방 치폐의 과정은 곧 관인층 내부의 분열 대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말 李成桂 등 신흥관인층은 정방대신에 尙瑞司를 설립하고 전주권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신흥관인층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0306)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무신집권하에서 정방에 참여한 신진사인과 정방의 폐지를 내세우는 후기의 신흥관인층을 직접 연결짓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충렬왕대에는 신흥권력층이 등장하였으니 원과의 관계로 세력을 얻은 사람들과 軍功으로 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政房의 必闍赤으로 활동한 사람들을 신진세력이라 하여 신흥권력층에 포함시키려는 견해가있다.0307) 충렬왕대의 정방은 宰樞와 같은 機務·參決權이 주어졌고 구성상으로는 겸직으로 왕과 친밀한 인물과 신진세력이 임명되어 왕의 직속관부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신진세력들은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宰相之族’이 되고 또 경제적 부를 누리는 신흥권력층으로 당대에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은 충렬왕대의 신흥권력층을 배척하고 신진관료를 등장시켜0308) 이들을 통해 개혁정치를 수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개인의 능력에 의해 출사한 신진세력으로 淸廉하거나 또는 惠政을 베풀려고 노력하였고 지방출신의 과거급제자였다는 점을 들어 충선왕의 정치는 사대부정치의 성격을 지녔고 그것은 사대부사회가 성립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았다.0309) 이 연구에서는 무신집권기에 정방에 참여한 신진세력과 충선왕이 중용한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관료를 구분하고 후자를 사대부로 규정지었다.0310) 그러나 그들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의 일련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후기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과 이에 대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는 ‘신흥사대부’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0311)

 신흥사대부의 사회경제적 성격은 지방의 향리출신으로서 중소지주거나 자영농민이었으므로 자기의 성실한 노력으로써 토지를 개간하거나 혹은 구입하여 농장을 가지게 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농장은 재향지주인 그들이 전호나 노비를 써서 경영하거나 혹은 직접 경작을 하였다는 점에서 부재지주인 권문세족의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청렴결백한 인품의 소유자들0312)이라고 하여 ‘신흥사대부’의 성격을 일반화시키게 되었다.

 고려 후기 정국에서 개혁추진세력의 주체와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사대부의 존재는 더욱 구체화되었다.0313) 충목왕대의 정치적인 관계는 權門世族 및 儒臣을 중심으로한 정통세력과 부원세력 등의 비정통적 정치세력이 서로 상이한 입장에 있었다. 정통적 정치세력은 蔭敍나 科擧 등 정규적 방도로 관계에 진출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정치적 식견을 갖은 사람들이고 비정통적 정치세력은 宦官·嬖幸 출신, 또는 신분적으로 賤人이거나 결함이 있는 자이며 비정규적 방도로 관직을 제수받고 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고 보았다.0314)

 충목왕 3년(1347) 整治都監의 설치는 전시대의 비정통적 정치세력에 의해 누적된 모순과 비리를 척결하려는 것이었다. 整治官들 가운데 고위급인 判事중에는 安東權氏 王煦, 安東金氏 金永旽, 光山金氏 金光轍 등 당시 유력한 가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나 屬官 중에는 문벌 출신이 적고 또 入仕방식으로는 科擧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정치관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臺諫이나 法官으로 크게 활약한 바 있고 공정하거나 정직하다는 인물평을 받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인 성격으로 추출해 낼 수 있다. 즉 정치관들은 대체로 일정한 정도 이상의 식견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기개, 그리고 합리적인 공정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이는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정치도감에서 활동한 재추급 이하의 실무진을 보면 가문적 배경이 미약하고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공정성과 유교적 합리성을 지닌 신진관료들로서 당시 고려 사회의 제모순을 통찰할 수 있는 식견과 권력자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가졌다. 그리고 이 때의 유학은 성리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造詣를 수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 신진관료는 다음 공민왕의 개혁적 배경과 辛旽의 집권기간 동안에 성장하여 공민왕대에 성장한 신흥문신세력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0315) 그러나 공민왕 이전까지는 과거출신의 신진세력과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갈등이 그리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능문능리의 관인층이 곧 사대부라는 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0316)

 지금까지 사대부에 비견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견해들을 비교해 보았다. 이를 보면 신진세력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진사대부가 고려 후기의 신관인층으로서 조선 건국의 주동세력이 되었다는 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의 관료군과 성리학을 수용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말 개혁의 주체가 된 신진사대부를 동질적인 존재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고, 이 점에서 무신집권하의 능문능리의 신관료와 고려말 개혁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개혁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의 모습이 뚜렷해지는 것은 공민왕대부터라는 견해가 대두되었다.0317) 무신란(1170)에서 조선개국에 이르는(1392) 220년간은 한 사회단계의 생성기간으로 지나치게 길다는 전제하에 무신정권기의 능문능리의 문사가 신진사대부의 祖型으로 보기에는 동질성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문신이라는 입장은 같지만 성리학에의 접촉이나 관심을 전자에서는 찾기 어려움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0318) 그리하여 충선왕대(1298, 1309∼1313)부터 충목왕대(1341∼1344)까지 간헐적으로 추진되던 개혁이 공민왕대의 개혁과 동질성을 갖고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계가 있음에 착안하여 여말선초 사회변동기의 상한을 13세기 말∼14세기 초로 잡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진사대부 세력의 대두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근본 動因은 당시의 시대적 여건에서 찾았다. 무신정권의 몰락, 몽고와의 講和, 원간섭기 친원 귀족중심의 사회 등의 시대적 여건에서의 과제는 외세에 의해 조장된 체제모순을 척결하는 것이었고 이는 반원적 개혁정치로 나타난다. 개혁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발전은 일반 피지배층이 토지소유 내지는 분배관계의 개선 또는 신분체제상의 개선 등 지위 향상을 위한 능동적 노력을 한 결과였고 또 이 시기의 농업기술상의 성과에 의한 휴한법의 극복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0319) 14세기 이후의 농업기술의 발달이 新興士族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 여말선초의 정치와 학문·사상뿐 아니라 농업에 있어서도 신흥사족은 지방의 중소지주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일반백성의 ‘理生’문제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도층으로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0320)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대립으로 서술해 온 데 반대하여 이들은 계층적 기반을 달리했던 정치세력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고려 후기 지배세력을 논한 연구가 있다.0321) 그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개혁 추진세력으로서의 사대부라 일컬어지는 존재속에는 世族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사대부는 정상적으로 진출한 官人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정상적으로 진출한 관인이란 入仕路나 출신기반에 관계없이 일단 관직에 종사했던 관인들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들 가운데 대지주인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중·소지주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사대부에는 세족출신도 있을 수 있고 세족은 못되지만 관인을 배출한 경험이 있는 가문출신이 있을 수 있으며, 향리출신을 포함한 布衣가문 출신이 포함될 수 있다. 만일 고려 후기 또는 말기에 이 중에 어느 한 쪽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면 사대부를 그 우세한 부류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0322)

 여기에서 그의 世族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기왕의 연구에서 사용되던 ‘權門世族’은 단일한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권문’과 ‘세족’은 별개로 사용되고 있었다.0323) ‘권문’·‘권신’의 경우 전기부터 나타나는 용어이고 대체로 집권자이거나 왕권을 압도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인 반면 ‘權勢之家’에 해당하는 부류는 왕권이 일정하게 작용하는 정치구조 속에서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던 존재들이다. 특히 ‘권세지가’ 등은 신왕의 즉위나 정치세력에 변화를 가져왔을 때 구폐책이 제시되면서 前代의 권력층을 총칭하는 용어가 되고 있으며, 긍정적인 방향에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특정계층 출신만이 아니라 세족에서부터 賤類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므로 특정 신분이나 계층을 지칭한 용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화된 정치세력을 지칭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특정개인이 향유하고 있던 정치권력을 상징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권문’·‘권세지가’라는 용어로써 계층을 지칭하려 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0324) 그리고 ‘世族’의 용례를 검토하여 이 단어는 고려 후기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는 특정의 姓貫 전체를 지칭했다기보다는 고급관인을 배출한 특정의 家系를 지칭한 것이고, 권력층을 상징하였다기보다는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계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기왕의 연구에서 고려 후기 정치 지배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써온 ‘권문세족’ 대신에 ‘세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0325)

 이와 함께 신진관료의 세족화 경향에 대한 연구도 추가되었다. 신진관료란 한미한 가문, 특히 향리출신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起身한 부류를 말하는데 충렬왕대의 신진관료들은 柳璥과 그의 천거를 받은 元傅·許珙 등 현임재추들의 문생으로서 좌주·문생의 유대관계를 통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다. 그러므로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자신이 재추의 반열에 오를 뿐 아니라 자손대에까지 재추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이후 권문세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충렬왕대의 개혁을 주도하고 여기에 참여한 신진관료들은 국왕 측근세력에 대하여 크게 대립하지 않으면서 국가정책의 결정이나 대원외교 등 국정에 참여하여 타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0326) 한편 신진관료로서 국왕 측근세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경우 이들은 재추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승진에 장애를 받았다. 측근정치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시켜 가면서 성장하였다. 그 성장의 결과가 충목왕대 整治都監의 활동이나 공민왕초의 반원개혁으로 나타났으며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려의 자체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된 공민왕대 이후, 구체적으로는 공민왕 14년(1365) 신돈의 집권을 계기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부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점에서 원간섭기에 국왕 측근세력과 대립하였던 일단의 신진관료들을 여말 신진사대부의 맹아적 형태로 보았다.0327)

 뒤이어 사대부는 문무관료를 지칭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0328) 사대부의 개념을 검토하여 사대부는 문무관료를 말하는 것이며, 관료의 가족을 ‘士族’이라 하였고 이들은 관리가 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신분적 제약을 받지 않은 관료계층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賤系출신 인물들의 官途 진출에 강한 불만을 품은 계층이 사족이었다고 한다. 즉 관도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신분적인 제약을 받지 않은 기존 관료계층을 사족이라했고, 사족 출신의 인물들은 士林이라고 불렀으며 사림 가운데 특히 관도에 오른 인물들을 사대부로 지칭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관리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용어들이 원의 간섭 이후에 빈번하게 史書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용어로써 자신들을 천계출신과 구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0329) 사대부가 하나의 정치세력화하는 것은 충렬왕대인데 그것은 이 때 천계출신 인물들의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진 결과였다. 이렇다면 원간섭 이후 고려말까지의 정치적 지배세력을 ‘權門世族’ 혹은 ‘權門勢族’과 ‘新進士大夫’로 양분하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나아가서 ‘宰相之宗’은 대부분 왕비나 재상, 그리고 다수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이었으므로 그들이야말로 고려의 전형적인 사대부였다고 논증하였다.0330) 따라서 ‘재상지종’은 ‘권세지가’와는 다른 존재였고 ‘권세지가’는 충선왕의 측근이나 충렬왕의 측근들을 그렇게 지칭하기도 했는데 어느 경우에도 재상지종이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충선왕이 ‘재상지종’을 선정한 이유는 자신과 혼인한 집안들,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가문,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문들을 지정하여 대외적으로는 원에게 자신과 趙妃 등의 혼인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내세워 원이 자신의 결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고 대내적으로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 회복을 기대하였다는 것이다.0331)

 이상에서 ‘권문세족’과 ‘사대부’ 용어를 둘러싼 논의의 대략을 살펴보았다.역사적인 용어와 그 범주에 대한 검토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 용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범주의 역사적 의미도 더욱 중요하다. 이에 여기에서는 고려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대부의 성격을 역사적 의미에서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0294)閔賢九,<高麗 後期 權門世族의 成立>(≪湖南文化硏究≫6, 全南大, 1974).
0295)金光哲,≪高麗 後期 世族層과 그 동향에 관한 연구≫(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88).

李益柱,<忠烈王代의 정치세력과 그 성격>(≪韓國史論≫18, 서울大, 1988).

金塘澤,<忠烈王의 復位過程을 통해 본 賤系 出身 官僚와 ‘士族’ 出身 官僚의 정치갈등>(≪東亞硏究≫17, 1989).
0296)金光哲, 위의 책.
0297)金塘澤, 앞의 글.
0298)朴龍雲,<權門世族·新進士類의 성립과 개혁운동>(≪高麗時代史(下)≫, 一志社, 1987), 539∼543쪽.

金泰永,<高麗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創作과 批評≫44, 創作과批評社, 1977).
0299)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0300)金潤坤,<麗末鮮初의 尙瑞司>(≪歷史學報≫25, 1964).
0301)李泰鎭, 앞의 책.
0302)박재우,<고려말 정치상황과 신흥유신>(≪역사와 현실≫15, 1995).
0303)高惠玲,<士大夫의 槪念과 時期區分>(앞의 책), 8쪽.
0304)이들의 성격을 ‘학자적 관료’ 또는 ‘관료적 학자’라고 규정한 것은 燕岩 朴趾源이≪燕岩集≫8, 別集, 放橘閣外傳에서 “讀書曰士 從政爲大夫”라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0305)李佑成, 앞의 책, 70쪽.
0306)金潤坤,<麗末鮮初의 尙瑞司>(≪歷史學報≫25, 1964), 22∼35쪽.
0307)李起男, 앞의 글, 55∼99쪽.
0308)≪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0309)李起男, 앞의 글, 82∼96쪽.
0310)李起男, 위의 글.
0311)金潤坤,<新興士大夫의 擡頭>(≪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0312)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76), 193쪽.
0313)閔賢九,<整治都監의 설치경위>(≪論文集≫11, 國民大, 1976).

―――,<整治都監의 성격>(≪東方學志≫23·24, 延世大, 1980).
0314)閔賢九, 위의 글(1976), 82∼83쪽.
0315)예를 들면 이 때의 白文寶는 공민왕대에 요직에 등용되어 활약하였고 李元具는 辛旽집권기에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0316)閔賢九, 앞의 글(1976), 82쪽.
0317)李泰鎭, 앞의 글(1983), 1∼13쪽.
0318)能文能吏의 문사와 여말의 士大夫와의 사이에 있는 이질성이 바로 그들을 똑 같이 취급하지 못하고 士大夫의 祖型으로 보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0319)李泰鎭, 앞의 글(1983).
0320)李泰鎭, 앞의 책(1986), 103쪽.
0321)金光哲, 앞의 책, 11∼13쪽.
0322)金光哲, 위의 책, 170∼175쪽.
0323)金光哲, 위의 책, 18쪽.
0324)金光哲, 위의 책, 34쪽.
0325)金光哲, 위의 책, 18∼43쪽.
0326)李益柱, 앞의 글.

朴鍾進,<忠宣王대의 財政改革策과 그 성격>(≪韓國史論≫9, 서울大, 1983), 71쪽.
0327)李益柱, 위의 글, 219쪽
0328)金塘澤, 앞의 글.
0329)金塘澤, 위의 글, 215∼217쪽.
0330)金塘澤,<忠宣王의 復位敎書에 보이는 ‘宰相之宗’에 대하여>(≪歷史學報≫131, 1991), 27쪽.
0331)金塘澤, 위의 글, 28∼2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