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특수구획:월경지와 견아상입지
조선 초기 군현제의 개혁은 종래의 군현제가 갖는 불합리성과 신분적 성격을 지양하고 이를 명실상부한 행정구획화하려는 것으로 조선조의 중앙집권적 관료지배체제의 진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지방 행정구획의 정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말까지 군현의 한 특수구역으로 광범하게 존속했던 越境地(飛入地)와 犬牙相入地(斗入地)이다.
월경지는 군현 구역의 하나로 소속 읍의 경내에 있거나, 접경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개재하는 타읍의 영역을 넘어서 따로 위치하면서 소재읍의 지배를 받지 않고 떨어져 있는 소속 읍의 지배를 받는다.204) 이러한 월경지는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100여 개소가 각 도에 분포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한말(1906)까지도 국내에 약 70여 개소나 존속되어 있었다.
월경지와 견아상입지의 실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부터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양자의 차이점은 전자는 「越在他邑」한 데 반해 후자는 「侵入他境」한 데 있다. 당시 군현의 경계선이 확연하지 못한 점이나 인구가 희박하여 촌락이 서로 연접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비록 한 지점은 연접해 있으나 삼면이 타읍 경내에 깊숙히 침입했을 때는 두입지이면서 실제는 월경지와 다름 없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자료에 따라서는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서로 혼동된 것이 있었다.
임내가 주읍의 수탈대상이 되었듯이 월경지는 공물·진상·요역 등 주읍으로부터 배정받은 각종 부담이 과중하였고 수령 또는 향리의 사복을 채우는 존재로서 역할을 했는가 하면 주읍의 몫까지 떠맡는 것이 예사였다. 또 주읍 관리의 출장으로 숙식·供億을 위한 민폐도 많았다. 이러한 월경지·견아상입지는 조선 초기 지방제도의 개혁을 거론할 때마다 정리되어야 할 제1차적 대상이었지만 그것이 끝내 소멸되지 않은 채 한말까지 존속한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그 존속의 이유가 조선조 지방제도 내지 행정구획의 미숙성에서 연유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방행정 운영상 현실적인 필요에서 그 모순성은 인정하면서도 존속시켰을까. 물론 이러한 문제가 1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했겠지만 결국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유지된 것이고 또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성격이 달랐다.
조선조의 행정구획은 여말의 그것에 토대를 두면서 임내의 폐합과 이속 등 전면적인 개편을 시도해 보았으나, 군현 병합과 월경지 정리문제는 끝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군현 등급의 승격이나 영역의 신축에는 항상 임내의 이속이 수반되었고 자연지세를 기준으로 개편되는 경우는 적었다. 종래의 임내가 직촌이 되고 과거의 속현이나 향·소·부곡이 면리제로 개편되었어도 그들의 구역만은 분해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구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현 병합이나 구획변경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군신 간에는 항상 ‘군현 연혁은 경솔하게 거론할 수 없다’고 해서 한편으로는 지방통치상 대소 군현의 경역이 서로 엇물려 섞여 군현끼리 견제와 감시체제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의 地誌 등 문헌적인 전거에 입각하여 가급적 현상대로 유지하려는 정부의 고식적인 태도가 작용하였다. 그러니 행정구역의 합리적인 개편이나 행정능률의 향상이란 문제보다는 항상 과거의 연혁을 중시하였다.
가령 군현이 혁파되었다가 복구될 경우 제반사정이 전에 비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고을의 吏民들은 모든 것이 혁파 전의 상태로 환원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국가에서도 그렇게 해주는 것이 해당 열읍 간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월경지의 정리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월경지는 선초 이래 누차 대두된 군현 병합책이 끝내 성취되지 못하고 군현 구획이 너무 세분됨으로써 계속 존속되는 결과가 되었다.
월경지는 당시 수취체제의 모순 또는 지방 행정체계의 미비에서도 존속의 필요성이 있었다. 중·소읍에 소속된 월경지는 주읍 보강상 존속이 필요하였고 대읍은 대읍대로 소속 월경지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바닷가 고을에 위치한 월경지는 주읍에 어물·소금 등 해산물을 공급해 주었고 주읍의 공물 진상의 조달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주읍의 경비 조달에도 상당한 몫을 부담하고 있었다. 월경지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어염·목재 등 토산물이 풍부한 데다가 주민은 사족 이외의 양·천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주읍 관리들이 거리낌없이 착취와 수탈을 감행할 수 있었다. 마치 모국이 식민지를 수탈하듯이 월경지는 주읍에 대하여 공부와 역역 등 항상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었다. 공부와 요역은 군현을 단위로 하여 배정되었기 때문에 대·소읍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어 일반적으로 대읍에 유리하고 소읍일수록 불리하였다. 그러니 대읍에 소속된 월경지는 오히려 부근의 쇠잔한 읍에 이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며, 한편 대읍의 재지세력들은 소읍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에 대읍 소속의 월경지가 끝내 존속되었던 것이다.
주읍을 본관으로 하는 씨족 또는 주읍에 살던 사족이 소속 월경지로 이주함에 따라 주읍과 월경지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즉 경주·안동·상주·일양·청주·전주·나주 등 대읍과 班鄕 소속의 월경지는 인접의 궁벽한 읍에 이속되기 보다는 그대로 있는 것이 일반 주민으로서는 제부담이 가볍고 사족에게는 仕宦·處世上 오히려 영예로웠던 것이다.205)
인구의 증가와 개간, 산업의 발달과 새 농법의 적용은 각 읍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오지·벽지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해안과 삼남의 내륙 오지에 위치한 월경지는 어염과 목재산지 또는 川防(洑) 축조에 따른 벼농사 재배적지로서 열읍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특히 견아상입지는 중소 군현보다는 대읍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 각 도의 대읍을 대표한 계수관의 관내에 산지와 해변을 확보하려는 데서 영역이 인접 군현에 침입한 두입지가 많았다.206)
204) | 旗田巍,<高麗·李朝時代における郡縣制の一形態-慶尙道安東府の屬縣·部曲の編成と飛地->(≪和田博士古稀記念東洋史論叢≫, 1960). |
---|---|
205) | 李樹健,<朝鮮朝 郡縣制의 一形態 ‘越境地‘에 대하여>(≪東洋文化≫13, 1973). |
206) | 대읍에 소속된 犬牙相入地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慶州府는 본읍에서 북쪽으로 安康·杞溪縣을 거쳐 神光縣·省法·竹長(부곡)까지 침입해 있고, 安東府는 본읍과 격리된 奈城·春陽·才山·小川·甘泉 등지를 영유하였다. 尙州는 본읍과 원격한 永順·山陽·化寧縣을 영유하였고 晋州는 남으로 昌善島에 미치고 서북쪽으로는 智理山底에 있는 花開·岳陽·薩川 등지를 그 관내에 두었다. 全州는 그 영역이 멀리 서해안에 미치고, 水原과 光州도 그 영역이 서쪽의 해변에까지 미쳤다. 대읍에 소속된 월경지가 중소 군현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견아상입지의 경우도 극소수의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각 도의 계수관급의 대읍에 소속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