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고려시대의 초마선
한국에서 조운의 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은 고려 초기이다. 농민으로부터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선박을 이용하여 도성으로 운반하는 조운에는 내륙하천 상류의 일정한 자리에 세곡을 모아 江船을 이용하여 하류로 운반하는 강운(또는 站運)과 연해안의 적당한 포구에 곡물을 모아 바닷길을 따라 운송하는 해운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漕運에는 곡식을 모아놓는 漕倉과 곡물을 운송하는 배가 반드시 필요했다. 조창에는 내륙조창과 연해조창이 있고, 조운에 종사하는 배도 강선과 해선이 구별이 있었다. 이들 배를 모두 漕船 또는 漕運船이라 하는 경우도 있지만 江船을 站船, 海船을 漕船이라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한강 상류인 충주에 德興倉, 原州에 興元倉을 두고, 남도 해안지방에는 牙州(牙山)에 河陽倉, 富城(瑞山)에 永豊倉, 保安(扶安)에 安興倉, 臨陂에 鎭成倉, 羅州에 海陵倉, 靈光에 芙蓉倉, 靈巖에 長興倉, 昇州에 海龍倉, 泗州(泗川)에 通陽倉, 合浦(昌原)에 石頭倉 등 12조창을 두고, 따로 황해도 長淵縣에도 安瀾倉을 두고, 漕運判官을 배치하여 조운의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그리고 정종(1035∼1046)대에는 내륙 조창에는 200석씩 실어나를 수 있는 江船인 平底船을 배당하고, 石頭·安興 등 10개 연안 조창에는 1천 석을 실을 수 있는 哨馬船 6척씩을 배당했다.0644)
조운은 원래 중국에서 기원한 제도이다. 기원전 3세기 말엽 진시황 때에 이미 조운이 존재했다는 설이 있으며, 7세기 초엽 수나라 양제 때에 중국 내륙을 남북으로 통하는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방의 곡물이 북부지방으로 운송되는 길이 열리고, 당나라 寶應 2년(763)에 비로소 조운의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송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11세기 조운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원나라 개국 때까지 중국의 조운은 황하와 운하를 이용한 내륙조운이었다.
중국에서 연안 해로를 통하는 조운이 시작된 것은 원대에 들어와서이다. 원은 건국 이후 大都(北京)에 도읍을 정하고 방대한 관료조직을 가지게 됨으로써 남부중국 곡창의 곡물을 대량으로 운반해와야 했다. 원은 운하를 통한 고식적인 운곡에 만족치 않고 지원 19년(1282) 연안해로를 통한 조운을 시도하여 성공하고 그 후 명 초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강남의 곡물을 바다를 통하여 수도로 운반해 왔다.0645)
이상과 같이 중국의 조운은 당나라 중엽에 비로소 제도화되고, 13세기까지 수백 년 동안 오로지 내륙조운에만 의존하고, 원대에 이르러 비로소 해운에 의한 조운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고려는 조운의 제도 자체에 있어서는 중국보다 2백 년이 뒤지지만 해로를 통한 조운은 중국보다 오히려 3백여 년이 앞서고 있다.
고려의 조운선인 초마선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천 석의 곡물을 싣고 바다길을 내왕할 수 있는 크기의 조운선이다. 조운선의 적재용량은 후세에 이르기까지도 대체로 1천 석을 한도로 했다. 곡물은 매우 무거운 화물이므로 그 이상 크면 구조부재 접합부의 이완 등이 일어나서 문제되기 때문인데, 고려가 그만큼 큰 조운선을 구사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초마선은 과연 어떤 선형과 구조를 갖춘 배인가. 초마선이라는 이름의 배는≪朝鮮王朝實錄≫에도 몇 군데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太宗實錄≫에 경상도의 세공은 오직 초마선 10척으로 운반된다고 하였다.0646)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초마선이 한선구조로 된 韓船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즉 초마선은 대체로 다음에 기술할 조선 초기의 조선과 동일한 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