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반의 특권
양반은 조선시대의 최고 지배신분층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든다면 관직상의 특권, 국역에서의 특권, 토지소유에서의 특권 등을 들 수 있다.
양반이란 명칭이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양반의 관직에 있어서의 특권은 제 특권 중에 가장 중요하였다.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관직체계를 통하여 통치되었으므로 관직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지배관계가 규정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신분의 높고 낮음은 국가의 관직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이것을 우리는「국가신분체제」라고도 한다.
그러면 양반은 어떠한 통로를 통하여 관직을 받을 수 있었는가. 鄭道傳이 정한 入官補吏法에 의하던 初入仕路에는 7개의 관문이 있었다. 門蔭·文科·武科·吏科·譯科·陰陽科 醫科 등 7과가 그것이다.108) 7과 가운데 양반의 초입사로는 문음과 문·무과뿐이다. 고려시대에는 무과는 잠시밖에 없었고 문음·문과에 해당하는 제술업·명경업 이외에 遺逸·南班 등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남반은 吏職으로 정리되고 高德者를 초빙하는 遺逸만 남게 되었다.109) 그러나 조선 초기에 관한 한 유일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음과 문·무과는 조선 초기에 있어서 양반의 초입사로로서 장벽을 이루는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음은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사회의 속성을, 과거는 재능을 중시하는 관료제사회의 속성을 대표하여 조선의 양반관료제 사회에 있어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과거우선주의·시험주의를 표방하는 관료제사회라고는 하지만 그 바탕에는 엄격한 신분제의 제약이 수반되어 있었으며, 신분제사회라고는 하지만 몇몇 귀족들에 의하여 농단되는 귀족제사회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양반신분의 계층적 지배를 기저로 하는 양반관료제 사회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보다 과거제가 강화되는 반면에 문음의 비중이 줄어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5품 이상관의 아들에게는 무조건 음직이 주어졌던 것이110) 조선 초기에는 3품 이상관의 아들 손자와 吏曹·兵曹·都摠府·司憲府·司諫院·弘文館·部將·宣傳官 등 淸要職을 역임한 사람의 아들에게만 음직이 주어졌다던가111) 고려시대에는 잠시 동안밖에 없던 무과가 조선시대시대에는 항구적으로 실시되고 과거제도도 더욱 정비된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는 고려사회가 조선사회보다 귀족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였고, 조선사회가 고려사회보다 관료제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조선사회가 신분의 장벽이 전혀 없는 개방사회라는 것은 아니다. 신분에 따라 사회적인 지위는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