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비의 신분적 성격
노비는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있어서 사회 최하층 신분이었다. 이들이 사 회적으로 최하층 신분이었음은 그들의 신분세습법과 법제상의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잘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인과 천인 사이의 신분이동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노비의 신분귀속은 일반적으로 賤者隨母法에 따라 결정되었다. 천자수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소유주가 서로 다른 노와 비가 혼인했을 경 우 그 소생이 어머니의 소유주의 소유로 되는 소유권 귀속의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양인 남자와 비가 혼인한 경우 그 소생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로 되는 신분귀속의 의미였다. 또 노와 양녀와의 交嫁 소생에게는 從父法이 적용되어 어느 경우에나 노비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가혹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노비의 가혹한 신분세습법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가혹한 신분귀속법에 따라 노비 상호간의 결혼은 물론이고 노비와 양인 사이의 결혼에 있어서도「一賤則賤」의 원칙이 적용되어 부모 중 한 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신분으로 귀속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려왕조 이래의 노비의 신분세습법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그것은「천자수모」와「일천즉천」의 신분귀속 규정과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중에 壓良爲賤 현상이 만연되어 노비가 크게 늘어난 반면 국가의 근간이 되는 양인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양인 확대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데다가 고관대신을 중심으로 한 양반 지배층들의 비첩 소생까지 從賤되어 이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 들어와 국가에서는 良賤交嫁 소생 중에서, 양인과 비의 교가 소생에게 종부법을 적용하여 이들을 양인으로 삼아 조세·역역 수취의 대상인 양인 인구를 늘리려 하였다.
양천교가 소생을 양인으로 귀속시키려는 조처는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인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양천 相婚을 금지하고 그 소생을 종량시키기로 한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양천교가 소생 중 양인과 비와의 교가 소생을 아버지 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는 종부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태조 6년(1397)에 각 품 대소 인원의 자기 비첩의 소생이 放良된 뒤 태종대에는 양천교가 소생 중 각 품 대소 인원의 공사천첩 소생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되어 사재감 수군에 입속되었다가 보충군이 설치되면서 이에 모두 이속되었다. 각 품의 대소 인원은 문무관·문무과 출신 자·생원·진사·녹사·유음자손 등으로 대체로 양반의 범위와 일치한다. 따라서 양천교가 소생 중 종량된 자들은 양반의 천첩 소생에 한정되었다 할 것이다.
물론 각 품의 대소 인원이 아닌 일반 양인과 공사비와의 교가 소생도 태종 14년(1414)에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량시키기로 결정되었으나, 이들은 각 품의 대소 인원의 공사천첩 소생과는 달리 사재감 수군에 입속하지 못하고 고려의 判定百姓과 같이 身良役賤으로 호적에 등재되었다.413) 그러나 이들까지를 종량시킴에 따라 노비의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되자, 세종대에 들어와서는 다시 일반 양인과 공사비와의 교가 소생의 종량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세종 14년(1432)에는 양인과 공사비와의 교가를 금지하고 이를 어기고 결혼한 자의 소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종천하도록 하였으며, 예외적으로 문무관·문무과 출신자·생원·성중관·유음자손의 공사비첩 소생과 4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평민의 비첩소생만을 종전대로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량하도록 하였다.414) 이로써 태종 14년부터 실시되어 오던 일반 양인과 비와의 교가 소생을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량시키던 종부법은 다시 종모법으로 바뀌었고 다만 각 품의 대소 인원의 공사천첩 소생만이 태종 때와 마찬가지로 종부법의 적용을 받아 종량될 수 있었다. 그 후 일반 양인과 비와의 교가 소생은 세조 말년에 다시 일시적으로 종부법이 실시되면서 종량되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종모법이 부활되어 종천되었으며 성종대에 들어와 일시 종량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23년(1492)에 종천으로 환원되어 이것이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어 법제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양인과 공사비와의 교가 소생은 각 품의 대소 인원을 주축으로 한 양반의 비첩 소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비신분으로 귀속되었다.
양천교가 소생 중 노와 양녀와의 교가 소생은 노와 양녀와의 혼인 자체가 금지되는 가운데 태종 원년에 이를 어기고 혼인한 자들을 이혼시키면서 그 소생을 신량역천으로 하여 사재감 수군에 입속시킨 바 있으나, 같은 왕 5년 에 공사천과 양녀와의 교가를 금지시키면서 그 소생 모두를 속공함으로써, 다시 종천으로 결정되어 종부법이 적용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에 양천교가 소생 중 종부법의 적용을 받아 양인으로 된 자들은 각 품의 대소 인원을 주축으로 한 양반과 공사비와의 교가소생이었으며, 이 법 또한 양반의 비첩 소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혼인과 출생을 통하여 노비가 양인으로 되는 길은 부계 혈통이 양반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이어서 노비의 자식들은 자자손손 노비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비신분층은 신분귀속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법제상의 지위에 있어서도 그 처지가 대단히 열악하여 국가의 공권력 지배에 있어서도 예외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면은 공노비보다 사노비에서 더욱 심하였다. 그것은 이들 사 노비가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는 개별적·사적 지배관계에 놓여져 주인이 소유노 비를 직접 다스렸으며, 노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소유주의 자의로 매매·상 속·증여가 가능하였다. 국가에서는 주인이 자신의 노비에게 私刑을 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노비의 직접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노비 가 죄를 지은 경우 주인은 이를 관에 고하고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노비에게 가할 수 있는 형벌이 무한정 허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비를 관청에 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죽이거나 노비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하고 이를 어긴 노비 소유주는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415)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노비를 국가에 고하지 않고 참혹하게 죽이거나 혹 독한 형벌을 가한 일이 발각되어 치죄된 일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 살해된 노비의 가족이나 혹독한 형벌을 받은 노비는 방량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속공되었다.416) 이러한 조처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를 단절시켜 주 인의 가혹한 형벌로부터 노비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사노비는 개인 소유의 재산이었지만 주인이 그들을 지배하는 데는 무한정의 권리가 인정된 것은 아니어서 그 소유권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일정하게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국가에서 노비 소유주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또 노비에게 참혹한 형벌을 시행하지 못하게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노비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일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이러한 일이 주로 고관대가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이웃집에서 알기 힘들었으며, 더구나 노비는 모반이나 모역·반역행위를 제외하고는 주인의 불법행위를 관청에 고할 수 없는 不告律의 규정에 얽매어 있어서 함부로 주인을 고발할 수 없어 주인의 불법행위가 관청에 적발되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노비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한 노비 소유주가 발각되면 국가의 처벌을 받고 제재되었으므로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는 일이 공공연히 자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인의 범법행위를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으며, 만일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비는 주인이 자신의 부모형제를 죽이거나 자신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 하더라도 불고율에 따라 주인을 관청에 고발하여 호소할 길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주인과 노비와의 관계가 綱常의 차원에서 군신·부자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불고율의 규정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노비 소유주가 자기의 노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앞에서 언급한 불고율과 함께 노비가 주인에게 죄를 짓는 경우에 일반인이 죄를 짓는 경우보다 휠씬 무거운 형을 과함으로써 노비가 주인에게 반항하는 것을 막아 노비 소유주들이 노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노비가 자기의 주인이 아닌 일반 양인에게 죄를 지은 경우에도 자기 주인에게 죄를 지은 것보다는 가벼웠으나 일반 양인이 죄를 지은 경우보다 무거운 벌을 받았다. 예컨대 노비가 자기 주인을 구타했을 경우에는 참형에, 주인의 친족 또는 외조부모를 구타하였을 때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과실로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에도 杖一百에 流三千里의 중형에 처해졌다. 이에 비하여 노비가 주인이 아닌 일반 양인을 구타했을 경우에는 일반 양인에 비하여 일등을 가하여 처벌받았으며, 이와는 반대로 일반 양인이 남의 노비를 구타했을 때는 일등을 감하여 처벌받았다. 또 일반 양인 사이에 발생한 구타사건은 중상을 입힌 경우를 제외하고는 笞刑 20에서 40에 처해지고 있어417) 노비가 대단히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비들은 심지어 주인에게 욕설하는 경우에도 중벌을 받아 주인을 욕한 자는 교수형에, 주인의 期親이나 외조부모에게 욕한 자는 장 80에 도 2년의 중형에 처해졌다.418) 이러한 법률 규정은 고관대가보다는 가세가 빈한한 노비 소유주들이 노비를 확실히 지배하는 데 유용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노비는 신분적으로 사회의 가장 최하층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세습법에 의하여 그 신분이 엄격히 세습되어 대대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존재였다. 물론 노비 중의 일부는 국가 에 공을 세워 합법적으로 종량되어 노비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며,419) 실제로 노비가 모반사건에 공을 세우거나 흉년에 국가에 많은 곡식을 바치고 면천된 사례도 있었고, 열녀 효자로서 면천된 실례도 있었으나, 이러한 일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여서 노비가 합법적으로 양인이 되는 길은 거의 막혀 있었다. 또 노비와 양인과의 교가 소생도 양반의 천첩소생 외에 는 양인이 되는 길이 막혀 있었다.
노비는 이와 같이 극도로 폐쇄적인 세습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유주에 게 철저히 예속되어 주인이 마음대로 죽이거나 혹독할 형벌을 가하였다가 관청에 발각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죄를 짓는 경우에는 일반 양인에 비하여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했다. 노비는 주인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도 모반이나 대역죄를 제외하 고는 고발한 권리마저 없어서 주인이 자신의 부모 형제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자신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한 경우에도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규제를 받는 일이 거의 없어서 노비 소유주는 사실상 노비에 대하여 무한정의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이처럼 노비신분층은 사회 최하층으로서 주인에게 소유되어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으면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서도 생명조차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무권리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