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고려 후기에는 국내외의 시련과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거의 100년에 걸치는 蒙古의 침략과 지배, 두 차례에 걸친 紅巾賊의 침략과 파괴, 그리고 수십년에 걸친 倭寇의 침략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王國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국가라는 명목을 아예 없애버리고 元의 직할구역으로 편입시키자는 책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일개 宦官의 손에 국왕이 시해되기도 하고, 남왜북로의 와중에서 王都와 궁궐이 불타거나 참혹한 약탈과 유린을 면할 수 없는 참변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지배층은 국가권력을 천단하고 대규모 토지를 不輸租의 私田으로 탈점하여 국가체제의 유지·운용을 어렵게 하였다. 이에 고려의 국가체제는 거의 붕괴되어 갔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지배층은 이와 같은 시련과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로서의 자체 정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와 그 주민에 대한 새로운 파악을 통하여 국가체제와 통치방식을 새로운 형태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새로운 敎學으로서의 性理學을 유일의 지배이념으로 정립하고, 새로운 통치준거로서의 여러 법전을 정비하며, 일상의 언어에 맞는 한글을 창제하였다. 이 새로운 국가체제에 구현된 제반 문화의 성격은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전근대사회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그 지배질서를 위주로 하는 국가체제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조선 초기에 정립된 문화형태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인은 대개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우선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기본계층이 새로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所耕田」이라는 자기 이름으로 된 소유 겸 경작지를 자기 혈연가족으로 경영하면서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양인 자영농을 중심으로 하는 자영농층이 보편적으로 정립되었다. 국가는 이 계층에게 기본 국역인 군역을 부과하는 한편, 이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부세제를 운용하였다. 그 구체적 형태가 計田法的 수취제도라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휴한농업이 일반적이었던 고려시대에는 인간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賦役을 수취하는 計丁法을 운용하였는데, 휴한농업이 歲耕의 연작농업으로 변천하여 토지생산성이 좀더 확실하게 되고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층의 자기 경리가 자립도를 한층 높이게 되자 토지소유의 다과를 기준으로 공납과 요역을 수취하는 계전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계전법적 수취제는 그 시험단계에서부터 소농민들이 매우 편하게 여기는 것으로 판명된 제도였다. 그것은 토지와 가호를 소유한 자영적 소농민층의 광범한 성장과 그 보편적 존립을 전제로 하고, 그들을 상대로 보다 더 효율적으로 賦·役을 수취하기 위하여 고안된 새로운 제도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시기 지배층은 그같은 부역을 모피할 뿐아니라 그들의 다수 노비층까지 호적에서 누락시켜 사사로이 비호하는 것을 관례화하고 있었으며, 恒産을 갖지 못한 빈농층은 대개가 유망상태에서 부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착하고 있는 현실의 자영농민층은 일상의 생산활동에서부터 외적을 물리치는 일에까지 결코 무시하지 못할 實在로서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기간동안 자기 성장을 수행함으로써 이 시기 지배층에게 통치의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실체를 더 크게 인식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이전의 일방적 지배방식보다는 상대적으로 그들을 교화해가면서 통치하는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른바 위민정치나 훈민정책이 강조된 사실이 그같은 현상을 적실히 말해 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성리학은 그러한 새로운 인식 전환에 자못 유효한 이론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문화형태의 성격을 규정한 또 다른 요인으로서는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교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자연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은 물론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 실재가 지닌 理의 고유성을 긍정하는 이론구조를 본질로 하였다. 그것은 이전의 불교라던가 전통유교에 비하여 보다 理智的인 새로운 계층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정통론적·명분론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옹유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인식론은 객관적 사물의 실재를 긍정하면서 좀더 그 이치를 탐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혼란기에 성리학을 자기 성장의 이론으로 수용하면서 계기적으로 성장한 신진사류층이 조선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성리학은 이제 배타적인 국가교학으로 튼튼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 지배층은 인민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국가제도와 지배체제를 성리학적 세계관과 인식론에 따라 개편하고 개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층 객관적 준거를 가진 통치제도의 수립으로 구현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문화의 성격은 양인 자영농층의 보편적 성장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성리학적 가치지향의 국가체제의 확립, 즉 농민층의 객관적 실체가 사회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것의 실재를 새로이 인식하고 그것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지배질서 속에 다시 편성함으로써 국가체제를 확립한다는 두 가지 측면의 통일적 작용에 의하여 규정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Ⅲ
조선 초기의 통치문화는 우선 지배체제를 객관적 준거에 따라 개선하여 정립한다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국의 토지와 호구를 중심으로 하는 國勢의 파악은 가장 급선무였다. 이에 일찍부터 호적과 군적을 작성하고 양전을 거듭하는 한편, 그 전체를 종합한 각 지역의 地理志를 여러 차례 편찬케 하였다. 그래서 작성된≪八道地理志≫라든지 그것의 종합형태인≪世宗實錄地理志≫등 각종 지리지에는 각 군현단위로 名號와 연혁 및 역대의 領屬관계, 소금·철·양마 등 특수 산물의 유무, 토지의 肥瘠과 기후 및 민속, 호구·인구 및 토산물의 종류, 조세·歲貢과 그 轉輸의 방법, 영·진의 위치와 군사·전함의 수, 부속도서의 정세, 煙臺 및 烽燧, 왕릉 및 선현의 묘, 토성과 지역출신 명현 등의 10여 항목에 걸쳐 실로 주밀한 파악이 이루어졌다.
국가 수취제도의 정비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였다. 즉 세종대에는 田制詳定所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국왕이 친히 독려하면서 새로운 양전·수세법을 강구하도록 함으로써 결국에는 전분 6등, 연분 9등의 貢法田稅制를 정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과정에서 전국 관민들에게 새 법의 편의 여부를 물어보도록 해서 여론을 청취한 일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마도 유사 이래 농민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시행한 최초의 여론조사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성종대에 職田稅制를 실시하면서 경기관찰사로 하여금 직전을 직접 경작하는 경기 농민들에게 새 법의 편의 여부를 물어서, 여론의 거취를 청취해 본 다음에 실시하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사례였다. 이제 국가에서 전세제도와 같은 큰 제도의 변천을 논의할 때에는 어느덧 농민층까지 그 논의의 대상으로 참여시킬 정도로 역사는 변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여러 가지 척도를 考正하고 통일하게 된 것도 이 시기 문화의 중요한 성과였다. 그래서 이제 도량형제도의 기본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토지의 양전이라던가 의례음악의 音律을 조정하는 데에도 일정한 객관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통치제도의 정비는 국가재정의 지출면에서도 이루어졌다. 가령 이전까지는 중앙의 각 기관에서 供用하는 물품에 일정한 지출규정이 없었던 까닭에 많고 적은 것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이 시기에 와서 戶曹의 계청에 따라 비로소「式例」를 정해두고 그 규정에 의해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또 요컨대 임금의 所用도 유한하여 임의로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徵斂에 법도가 없고 용도 또한 무절제하였다. 이에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오랜 세월을 두고 가다듬은 결과, 성종대에는 이른바「式例橫看」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재정지출규정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공납을 비롯한 수취제도의 개선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이전에는 지배층의 자의에 의존해 오던 재정수납이 이 시기에 와서는 객관적 준거를 가진 제도적인 것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Ⅳ
한편 조선 초기의 통치문화는 이전에 비하여 교화적인 측면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었다. 인간은 天賦의 理를 타고 났으므로 비록 온전하지는 못할망정 자율성과 주체성을 지녔다. 이러한 인간을 상명하복의 통치질서 속에 안착시키자면 무엇보다도 그들을 가르쳐 깨우치고 길들여야 하는 것이 필연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교화의 기본 지향은 곧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도덕규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세종대 忠·孝·烈에 관한 덕목을 널리 가르치기 위하여≪三綱行實圖≫를 펴낸 것은 교화의 구체적 실례이다.
여기에서 충·효·열의 덕목을 최고의 윤리규범으로 거듭 주장하는 한편, 그것을 범하는 경우는 綱常罪라는 가장 무거운 죄목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이른바 嫡·庶의 차대가 이 시기에 와서 처음으로 제도화 된 사실도 명분론의 하나인 정통론과 관련된 것이었다. 각 군현마다 국립 중등학교로서의 향교를 세우고「守令七事」에 학교교육의 흥기를 규정함으로써, 성리학적 도덕규범을 중심으로 하는 王化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장려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인으로부터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국가체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명분과 직역에 따른 계층적 사회규범과 성리학적 도덕관념이 일원적 체계로 점차 자리잡아 갔다. 가령 主·奴의 관계를 君·臣의 관계와 동일하게 명분론적 규범으로 설명하게 된 것도 이 시기에 와서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는 국가의 기본의례를 새로이 정비하기 위하여 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5禮를 강구·편찬케 하였는데, 그 순차에 있어서 송나라의 예제를 따른 것은 역시 성리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가령 5례 가운데 가장 중히 여기던 吉禮를 두고 말할지라도, 모든 祭儀에는 공경과 정성을 다화되, 명분에 맞지 않는 과람한 경의를 표하거나 혹은 아첨함으로써 복을 빌어오던 행태는 國家祀典에서 완전히 혁파되었다. 그것은 곧 인간의 화복이 결코 神明의 자의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하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성리학적 祀神觀의 구현이었다.
성리학적 명분론은 華·夷관계의 명분 또한 강조하였다. 이에 중국에 대한 事大의 예를 다하는 한편, 오랜 국가의례로 지켜오던 제천행사를 천자국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혁파하였다. 그 논의과정에서 우리 나라는 중국 천자가 分封한 나라가 아니라 天과 직접 연결된 檀君을 거쳐 전승해 온 독자적 국가라는 신료들의 주장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세종은 제후로서 祀天하여 천자의 예를 참람되이 할 수 없다는 자국의 기본 입장을 밝혔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례의 정리에서도 명분론을 스스로 지켜서 자국을 제후국으로 자처하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령 전대의 사료들을 수습하여≪高麗史≫를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즉 원나라의 간섭 이전에 고려의 자주적 왕권을 상징하던「朕」이니「詔」니 하는 용어의 사용이 참람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면서도 당시의 용례를 따라 그대로 기록해 남기는 이른바 直書主義 원칙을 지키는 한편, 그 역대 왕들의 연대기는 本紀라고 하지 않고 世家로 표현함으로써 조선왕조 지배층 자신의 명분론적 세계관을 또한 그대로 직서하였다.
Ⅴ
그런데 성리학은 또 한편으로 개별 실재가 지닌 理法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이론구조를 본질로 하고 있었다. 자기 실재의 고유한 이법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가 조선시대 지배층의 성리학적 인식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그 지배이념이 새롭게 변화된 이 시기에 와서 그것은 이제 일단의 새로운 자기 주체의 정립으로 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고려시대에는 아직도 개인적 차원에서 자국의 시조로 막연하게 인식해 오던 단군을 조선왕조에 와서는 정식의 역사 시조로 인식하여 국가사전에 올려 받들고 正史에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그 하나의 사례이다. 또한 종래 더러 활용해 오던 중국 農書의 설명이 결코 현실에 맞지 않음이 드러나자, 조선의 풍토와 수준에 맞는 농서로서≪農事直說≫을 편간하여 당시로서 선진적인 자국의 농법을 전국적으로 권장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전국 각처의 고유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測雨器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각 지역의 실재에 관한 고유한 이치를 탐구한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기 고유의 약재로 처방하는≪鄕藥集成方≫을 편찬하게 된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각 나라마다 풍속과 풍교가 다르듯이 같은 이름의 초목도 그 토질에 따라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산천에서 나는 초목 약재들이야말로 우리의 민생을 부양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인식에서 자체 의서를 편찬케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醫官을 중국에 보내어 方書를 구하는 한편 약명의 잘못을 考正하도록 하고, 또한 전통의서인≪鄕藥方編≫을 중심으로 모든 의서들을 모아 빠짐없이 搜檢하고 분류·증첨하여 편찬한 것이다. 더구나 온 정성을 기울여 책을 간행함으로써 후세로 하여금 전에 없던 일을 오늘의 조선이 이루어 놓았음을 알도록 하겠다는 각오 아래 제작해 낸 鄕曆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中國曆과 回回曆을 비교·참작하여 유사 이래 최초로 자국의 왕도를 기준점으로 하여 제작한, 자국의 자연현상의 고유한 이법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탐구한 결과로 이루어낸 역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으로는 역시 訓民正音의 창제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자국의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국어를 기준으로 바로 거기에 맞는 글자를 만든 것이었다. 국어에 맞는 글자가 창제됨으로서 이후 자국의 말과 글 자체의 발전은 물론, 이른바 기층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트이게 되었다. 그래서 보편적 농민층을 기본으로 하는 절대다수의 국가 구성원이 비로소 자신의 의사를 문자로도 표현할 수 있는 문화생활권 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이른바 동족문화라는 것의 성립이라든지 그 변증법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는 독자적 바탕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Ⅵ
한편 성리학은 전통유교보다도 훨씬 더 배타적인 교의를 지닌 지배이념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까지 국가적으로 숭상해오던 불교라던가 도교를 이제 이단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국가적 숭상은 결정적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불교에 대해서는 태종과 세조대에 대대적인 정리를 단행하였다. 종래 전국적으로 불교를 보호·관리해 온 僧錄司는 이 때 아예 혁파되었다. 불교종단도 禪·敎 양종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소속사원도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불교사원에 절급해오고 있던 收租地를 극히 일부만 남긴 채 축소하고 그 노비는 아예 혁파하였다. 그리고 度牒제도는 승려가 되는 길을 극히 제한하였고 僧科도 점차 축소되어 16세기 후기에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승려의 도성출입도 금지되어 갔다. 오히려 국가에 어려운 역사가 있을 때마다 다수의 승도를 동원하여 복역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까지 귀족적 대우를 받아오던 불교는 이 시기에 와서 국가의 공식적 보호권에서 벗어났다. 물론 이 시기에도 세조의 경우라든지 역대 왕의 后妃를 비롯한 왕실의 개별적 신봉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헐적이며 개별적인 신봉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불교는 이제 민간신앙으로서의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이에 현실의 고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도피처로써 불교가 선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교에 대한 국가적 신봉 또한 크게 쇠퇴하였다. 실상 고려시대에는 도교관계의 祭儀가 매우 많고 잡다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복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誠敬을 위주로 하는 祀神觀에 서있는 터이므로, 그같은 잡다한 기복의식은 철저하게 금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교 관련 여러 국가기관이 점차 혁파되고 오직 昭格署만이 남아 의례적인 齋醮를 행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사림정치가 성숙함에 따라 소격서마저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교적 수련을 통하여 신선이 되고자 하는 민간신앙으로서의 丹學의 신봉은 극히 일부에서나마 전승되었다. 이는 주로 불우한 처지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간 것이니, 역시 현실도피적인 삶의 한 형태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金泰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