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선백자의 전개
우리 나라는 나말여초에 이미 백자를 생산하였으며 12세기 중엽 扶安郡 柳川里窯에서는 많은 양의 양질 백자가 생산되고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고려백자는 태토의 내화도가 강하고 유약은 얇고 미세한 빙열이 있으며 태토와 유약이 서로 박락되는 현상이 두드러지며 간혹 이보다 치밀한 것도 있으나 큰 흐름은 역시 치밀질 백자는 아니었다. 12세기를 정점으로 백자의 생산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내화도가 높은 양질의 백토 생산이 많은 남쪽 지방에서 그 명백을 유지하면서 여말선초에 이르렀다.
14세기까지 중국백자는 청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원대에 치밀질 백자인 추부백자가 생산되어 본궤도에 올랐으며 명대에는 청백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부터 새로운 樞府系 치밀질 백자가 유입되어 새로운 치밀질 백자가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현재까지 조사자료에 의하여 다음의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로 1987년 관악산 남서쪽인 安養市 石水洞에서 발견된 14세기 백자요이다. 여기서는 기형도 다양하고 시문기법도 음각·양각·상감·퇴화문이 있으며, 문양의 종류로는 완자문·연판문·연주문·화문·集線毛彫文 등으로 다양하다. 파편을 보면 일그러지거나 잘못 구워진 것이 대부분이며 질도 종래의 고려백자와 유사한 것과, 새로운 치밀질 백자와 유사한 것으로 양질과 조질이 함께 나온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종류의 백자와 양질과 조질 백자가 함께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거의 청자 일색인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백자를 받아들여 번조하기 시작하여 종래 고려백자 계통도 만들고 새로운 치밀질 백자도 만들게 됨에 따라 실태가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백자를 생산하는 가마가 이미 고려말에 나타났으며 그 질과 기종 및 문양 등에 종래에 없었던 새로운 면모가 늘어나고 있었다. 즉 이미 14세기에 종전에 거의 생산되지 않았던 희귀한 고려계 백자와 새로운 치밀질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들어 백자시대를 맞은 서장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李成桂가 즉위 1년전에 金剛山(江原道 淮陽郡 長陽面 長關里 金剛山 月出峰 出土)에 舍利塔을 세우면서 넣었던 舍利藏置들 중에 포함된 백자들이 있다. 그 중 大鉢 2개에는 각각 發願文이 陰刻되었고 그 내용 중에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沈□’이라는 절대연대를 가르키는 干支(신미년;1391)와 방산이라는 지명, 심룡이라는 사기장의 이름이 있다. 방산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나≪世宗實錄地理志≫咸吉道 鍾城都護府條에 ‘방산’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만약 이 백자들이 함경도지방에서 만들어졌다면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도 이미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고 장인의 이름을 새길만큼 책임을 질 수 있는 가마와 이름을 날린 장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백자들의 질은 아직 조질이며 검은 티가 많고 유약은 녹청색을 머금었지만 형태는 고려청자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형태로 조선초 백자의 형태와 일치한다. 고려말 중국에서 새로운 백자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물결이 우리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흔적이 아직은 많지 않으나 이러한 새로운 자료가 앞으로 더 발견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