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화백자
세계도자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14∼15세기는 청자문화에서 치밀질 백자문화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중국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元代(14세기 전반)에 이미 청자·청백자시대에서 치밀질 백자(추부·추부계 백자)의 시대로 이행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고려말 14세기 후반부터 치밀질 백자가 생산되고 15세기초부터 본격적인 치밀질 백자시대로 이행하였다.
중국의 청화백자는 청백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치밀질 백자에서 정착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청화백자도 치밀질 백자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가 언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고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여기서는 문헌기록과 광주지방 요지의 출토품 등을 통하여 그 개략을 기술한다.
≪孝宗實錄≫에는 태종이 고려의 국자박사로 재임 당시(1383년 이후) 애용하였던 靑華盞이 있어 이것을 보물로 아껴 학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특히 이 청화잔이 酒杯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그 후 성종대에 이르러 이 청화잔이 깨어져서 왕명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서 이에 대신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없어졌다고 한다.744) 이로 볼 때 고려시대에 이미 중국의 청화백자가 전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세종 때에는 琉球로부터 상당량의 청화백자가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10년(1428), 11년, 12년, 32년에도 다량의 청화백자가 명으로부터 직접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어서 명으로부터 수입한 청화백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진상품이나 명으로부터의 증여품 이외에도 사신의 왕래에 따른 유입품의 양도 많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명의 사신들에 의한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백자 구입을 일절 금했다는 기록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명으로부터 전래된 청화자기에 대한 기록 외에 조선에서의 제작을 시사하는 기록으로는 세종 29년에 왕이 ‘靑畵大鍾’과 ‘白沙大鍾’ 등을 成均館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청화’가 조선의 청화백자인지 또는 중국 수입품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世宗實錄≫<五禮儀>嘉禮序例 尊爵條에는 ‘白磁靑花酒海’로 이름붙인 雲龍文이 그려진 壺가 있는데, 이 ‘酒海’는 명에 주문하여 만들어졌을 수도 있으나 조선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 시대에 제작된 것이 분명한 예로는<靑華白磁三山鐵砂雷文山罍>가 있다. 이 산뢰는≪세종실록≫<오례의>가례서례와≪國朝五禮儀序例≫에 나오는 산뢰와 유사하여<오례의>와≪국조오례의서례≫가 간행된 그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세종 때에는 일찍이 명으로부터 수입된 코발트 연료를 써서 특수한 기명을 만들어 썼을 가능성이 크다. 문종과 단종 때를 거쳐 세조 때에 오면 청화백자를 번조하였다는 내용이 많아서 청화의 제작은 확실해진다. 일찍이 세조 원년(1455)에 왕명으로 궁중의 주방에서 사용되는 金盞을 ‘畵磁器’로 교체한다고 하였고, 세조 7년에 완성된≪經國大典≫刑典에는 “庶人은 남녀를 불문하고 ‘靑華酒器’의 사용을 금하며 사대부들도 주기 이외의 청화자기를 쓰는 자는 엄벌로 다스린다”라고 하여, 청화자기 사용에 대한 엄격한 금제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궁전에서는 화자기를 사용케 하고 사서인의 청화백자 사용을 금할 정도로 일반화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종래 화자기는 백자흑상감 혹은 철화백자를 지칭하고 그 당시의 청화백자는 명으로부터의 유입품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조선왕조실록≫의 용례에 비추어보면 화자기는 청화백자를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한편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문제에 대해서는 청화백자의 유입을 금한다는 왕명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때에 화자기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무렵의 청화백자는 조선에서 번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을 더욱 확실히 뒷받침해주는 자료로는≪용재총화≫권 10에, “세종 때의 어기로는 백자가 전용되었으나, 세조 때에 이르러 ‘彩磁(청화백자)’도 병용되었다”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 또 “채자는 중국에서 구해온 ‘回回靑’으로 번조한 것인데 畵樽·罌·盃·觴 등이 중국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회회청은 중국에서도 귀하였기 때문에 다량으로 입수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窮村茅店에서도 청화백자를 쓰고 있어 가서 알아 본 즉 ‘土靑’이라 하였는데 토청 또한 아직 구하지 못해서 조선에는 畵磁器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이는 세조 때에 중국에서 구해온 회회청을 사용하여 수량은 많지 않으나 청화백자가 번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세종실록≫에 왕이 申叔舟에게 하사한 ‘畵鍾’은 도공에 명하여 그림과 御詩를 써 넣은 것으로 이같은 화종은 御宴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화종도 청화백자일 가능성이 높다. 세조 7년에 와서 법으로 그 사용을 금할 정도로 청화백자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나 중국에서는 금령으로 회회청의 유출을 금지하고 있어서 중국에서 들어온 회회청으로는 원료가 부족하였다.
≪용재총화≫에서도 토청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세조 때에는 토청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먼저 세조 9년 5월에 전라도 敬差官 丘致桐이 康津에서 회회청을 구하여 바쳤으며745), 같은 해 윤7월에는 경상도 경차관 柳緩이 密陽府와 義城縣에서 회회청 相似石을 구하여 바쳤다.746) 다음해 8월에는 전라도 경차관 구치동이 順天府에서 채취한 회회청 상사석으로 畵沙器를 번조하였다.747) 예종 원년(1469) 10월에는 전라도관찰사에게 명하여 “강진의 회회청을 시험하였더니 그 중에 양질의 것이 있는데 관찰사가 직접 사기번조에 입회하여 회회청 擬似沙土를 써서 청화자기를 시험번조하여 보고하라”는 내용과 또 “읍인 중에 회회청을 발견한 자는 관리로 등용하고 특히 상을 내린다는 교지를 전라도는 물론 전국에 널리 주지시키라”고 하였다.748) 이로 볼 때 순천·강진에서 토청(回回靑相似石·靑鐵回回靑擬似沙土)을 사용하여 청화백자를 번조한 것이 틀림없으며,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청화백자를 자체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은 후 성종 때에는 中國畵器(청화백자)의 유입을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가에서는 대소 연회에 화기가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등 사치풍조가 극에 달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화기의 유입 사용을 일절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749) 이는 청화백자의 지나친 사용으로 당시 조선에서 번조한 물량이 부족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금령이 거듭 내려지면서 중국 청화백자의 유입과 국내 번조 또한 감소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머지않아 다시 재개된 것 같다.
16세기에 청화백자 관련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 왕실의 연례에 사용되는 청화백자가 없어서 假畵를 사용한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로 청화백자가 한층 더 적어졌음은 틀림이 없다.750) 이러한 현상은 “중국사신의 접대에 사기 200여 竹(1죽은 열 개)이 소요되나 사용 후 반환된 수는 파손·분실 등으로 인해 불과 40∼50죽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는 깨진 龍樽(靑華白磁雲龍文壺) 한 쌍을 반환한 자가 있다. 그 담당자는 법에 의하여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751)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옹원 관리가 용준의 파손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청화백자의 부족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족한 가운데도 번조되는 청화백자의 안료는 토청보다는 호조가 수입한 회회청에 의존하고 있었던 점은 위의 사실들로 보아 짐작이 되나 청화백자의 생산은 극도로 제한된 것으로 추측된다.
청화백자는 세종말 무렵부터 시작하여 세조초 무렵까지 회회청을 사용하여 번조하였다. 그러나 명의 회회청 수입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세조 9년에서 예종 때에 걸쳐서는 토청을 개발하여 번조를 시도하였으나 수요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성종 때에는 명으로부터의 수입이 많아졌고 회회청도 어느 정도 재수입되었던 실정을 알 수 있다.
청화백자의 파편은 광주요지에서 발견되는데 백자 전체에서 편년을 추정해 보면 청화를 그리기 시작한 때는 세종말 무렵부터로 생각된다.≪세종실록지리지≫편집 당시의 요지라고 생각되는 우산리·번천리의 상품 백자를 번조한 요지에서 청화백자 파편이 발견되고, 또한 이들과 연결되는 가마로 보이는 도마리·무갑리의 상품 백자를 번조한 요지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세조·예종·성종 때의 청화백자의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1964∼1965년에 걸쳐 발굴·조사된 도마리요지에서는 많은 자료가 나온 바 있다. 16세기로 추정되는 관음리·정지리의 ‘左’·‘右’ 銘이 있는 백자가 나오는 요지에서는 지표조사에서 아직 청화백자 파편의 발견은 없었으나, 번천리 5호요지 발굴조사에서<白磁陰刻‘嘉靖33년’銘墓誌片>(1554)과 함께<靑畵白磁折枝文전접시片>이 출토되었다. 한편 지표조사에 의한 것이지만 17세기 전반까지 사용된 요지인 炭筏里·詳林里에서도 청화백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仙東里요지(1640∼1649년) 지표조사에서 청화백자편 2점과 선동리 2호요지(1640∼1641년) 발굴조사에서 청화로 쓴<‘祭’字銘碗片> 접시 두 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요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청화백자는 15세기에 시작되어 다년간 생산이 계속되다가 16세기 들어 생산이 다소 저하되고 17세기가 되면 임진·병자 양란 등으로 인해 더욱 위축되어 전기의 종말을 맞고 이후 조선 중기에 들어 점차 청화백자의 번조가 회복되어 갔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15세기의 편년자료로는, 세조 13년(1467)에 죽은 ‘鄭軾’이라는 관리의 이름을 써 놓은<白磁靑畵梅花折枝文碗>이 있는데 ‘정식’의 몰년으로 보면 이 완의 하한이 1467년이 되므로 세조 때이거나 그 이전의 제작임에 틀림없다. 문양은 내면 중앙에 청화로 복판화륜을 두고 외면에는 굽다리에서부터 매화 두 가지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남송 이래 명에 이르기까지 계승된 南宋院體화풍의 樹枝法으로 가지가 몇 굽이 급격하게 꺾여지면서 전개되고 있으며 가는 매화가지나 예리한 매화판의 처리 등에서 격조높은 문인화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다음<白磁靑華‘弘治二年’銘松竹文壺>는 성종 20년(1489)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형이 당당하며 문양으로 들어간 松竹은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윤곽을 거의 나타내지 않은 가느다란 점과 선을 여러 겹 중첩하여 그렸다. 소나무 가지는 앞서 언급한 ‘鄭軾’銘碗처럼 급격하게 꺾이지 않았으나 마디마디가 약간씩 꺾이어 명초 수지법의 여운을 남기고 있고, 구연부에도 사실적인 연당초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죽문에는 죽순이 곁들여 있다. 이 두 개의 청화백자의 질은 대체로 우산리에서 도마리·무갑리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상품 백자와 같은 질이며, 문양은 의장화된 도식적인 것을 수반하지 않은 사실적인 것이다.
한편 도마리요지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 부류의 청화백자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첫째 부류는 문양·유태·굽처리 등이 명초의 청화백자와 거의 같아 구별이 어려운 것이고, 둘째 부류는 유태와 번조수법은 우리 것이나 문양구성과 문양자체가 명초 청화백자와 매우 흡사한 것을 말하며, 셋째 부류는 문양·유태·굽처리 등에서 명의 청화백자의 요소를 찾아 볼 수 없는 조선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이다. 첫번째에 속하는 청화백자의 기형은 주로 완과 접시 등의 파편으로 구연부에 의장화된 문양대가 있고 주문양도 역시 도식적인 문양으로 구성된 데 비해, 두번째는 소량이지만 明風의 종속문양이 있고 역시 명풍의 주문양이 있다. 세번째에 속하는 것들로 대접·접시 등의 파편이 많다. 전접시의 경우를 보면 구연에 단순화된 명풍에서 완전 변형된 종속문양대를 두르고 외면에는 칠보문 등을 시문하고 있다. 주문양대는 명의 청화문양과는 무관한 사실적인 산수·성좌·화조·시명 등으로 의장화된 도식적 문양이 아닌 회화적인 문양인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이 밖에 청화백자의 발색을 시험해 본 試色片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그 발색은 갈색을 띤 것, 흑색을 띤 것, 그리고 鐵沙 발색에 가까운 것 등이고, 문양은 문자문·당초문 등 보통 부서진 파편을 이용하여 만든 것들로 발색이 나쁜 것들이다. 짐작하건대 토청을 사용하여 試燔한 것임에 틀림없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청화는 초기에는 회회청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명의 청화백자와 질과 문양(주문과 종속문이 있고 문양자체는 도식화되었으며 기면 전체에 가득차서 여백이 없다)이 같은 것을 일시나마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는 바로 질은 우리 것이지만 문양은 명의 것 그대로 종속문과 주문양을 갖추고 문양자체도 명풍인 것을 만들었으며 바로 뒤이어 회화적인 문양의 조선적인 특징을 가진 청화백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토청을 사용하여 시험하였는데 도마리요가 여기에 해당되며, 그 시기는 대체로 세조말에서 성종 때의 기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15세기 청화백자의 발전과정을 다시 한번 유형별로 크게 나누면 ① 明 양식과 같은 것 ② 명 양식과 유사한 것 ③ 독자 양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명 양식의 청화백자는 기형·유태·굽처리 등이 명 청화와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이 청화백자들이 우리 제품인지 또는 중국 제품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세종 때 이후 청화백자의 사용과 수입에 대한 각종 금령이 빈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용과 수입은 계속 증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성종 때에 아무리 국법으로 여러 차례 엄금하여도 시정되지 아니하여 왕이 자탄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실정으로 볼 때 중국 청화자기가 많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귀하고 값이 비싼 중국 청화백자가 왜 우리 나라 가마터에서 발견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는 중국에서 회회청을 수입해다가 우리 가마에서 똑같이 만들어낸 우리 제품일 수 있다는 것이다.≪용재총화≫ 권 10에서도 “세종 때에 이르러 彩磁를 섞어 썼는데 중국에서 회회청을 구하여 술단지·술통·술잔 등에 그림을 그려서 중국 것과 다를 바 없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안목으로 보아도 우리 제품이 중국 것과 같았다고 생각된다. 둘째는 수입 회회청으로 우리 가마에서 명의 청화자기와 똑같은 것을 만들기 위하여 표본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도마리가마에서 발견된 청화백자 파편들을 보면 가마 파편 특유의 일그러지고 휘어지고 부풀어 오르고 다른 파편이나 갑발과 붙어 있던 자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어, 수입되어 표본으로 쓰였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그 중 일부가 표본일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명 양식과 유사한 청화백자이다. 명의 청화자기를 直模하던 시기를 지나면 유약·태토·번조수법은 우리 제품인데 문양이 명대 청화문양과 흡사하고 기형도 유사한 종류가 있다. 이 종류의 분명한 편년자료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세조 9년(1464) 土靑을 개발하기 이전의 제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제품들에 사용된 코발트는 수입 회청을 사용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조 9년 이후 예종 때에 토청을 개발하고 토청으로 화자기를 번조하였으나 이후에는 토청에 관한 기록이 없다. 성종 때에는 다시 회회청을 수입하고 명에서 유입된 청화자기가 만연되었기 때문에 명풍의 청화자기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이전에 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명 양식과 유사한 청화백자와 전혀 다른 독창적인 우리 양식의 청화자기로 성종 때에 제작된 것이 있다.
이것은 분명한 편년자료인<백자청화‘홍치2년’명송죽문호>(성종 20;1489)로 명 양식의 제작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항아리는 백자의 질 자체가 우리 제품임이 확실한 것은 물론, 문양의 구성과 내용이 명대 문양과는 전혀 다른 우리 독자의 문양으로 바뀐 상태이기 때문에, 명 양식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르므로 우리식 청화백자를 만들기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일본에 있는<白磁靑華寶相唐草文壺>의 문양은 主文과 從屬文이 있고 주문·종속문이 보다 명대 문양 구성과 같으며 문양 자체도 유사하다. 이 항아리와 기형이 거의 같고 제작연대 추정이 가능한 月山大君 胎壺(1454년, 또는 그 이전이거나, 1454∼1462년 사이 제작)인<粉靑沙器印花文胎壺>가 있다. 이 항아리의 하한이 세조 7년이므로 이와 거의 같은 기형이고 문양구성도 둘 다 견부와 하부에 종속문으로 연판문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명 양식과 유사한 상기 일본에 있는 항아리의 편년 추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이 청화항아리의 견부와 저부의 연판문에는 연판내에 寶相如意頭文이 있으며 이러한 연판내 문양은 원대의 청화에 많이 있으나(특히 항아리 등 큰 그릇의 연판문에 있음), 이 항아리의 연판문에는 연판문 윤곽선 안쪽 가운데에 문양이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연판문 윤곽선에 문양이 붙어 있는 예는 명 永樂연간의<靑華白磁人物文壺>뿐이다.752)
이와 관련하여 명 양식과 유사한 청화백자의 문양구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양식의 문양 중 종속적인 파도문·당초문 등이 대체로 명초 洪武·영락연간의 문양과 유사점이 많고 주문양으로 등장하는 보상당초문도 이 기간에 등장하는 문양과 유사점이 많아서 문양 자체로만 보아도 세조 9년 이전에 해당한다. 14세기 중엽 무렵 元 양식을 갖추고 명 宣德연간(1426∼1435)까지 주문양과 종속문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문양은 그릇의 중심부위에 큰 면을 차지하며 도식적인 것이 많고 종속문은 원대에는 이중 삼중으로 된 것도 있다. 이러한 문양구성에는 문양이 도식화된 데다 여백이 거의 없으며 문양으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필치가 대담하면서 힘이 있고 청화발색이 진하며 농담의 변화가 있다. 선덕연간에도 회화적 문양과 여백을 두는 것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선덕연간을 지나 成化(1464∼1487)·正德연간(1506∼1521)에 이르면 선덕연간의 문양구성에서 변하여 종속문이 줄어들어 상·하 부위 중 한 군데만 있거나 종속문이 없이 주문양만 있는 경우도 있고, 선덕연간의 일부 회화적인 문양을 단순화한 것과 여백을 살린 특유의 회화적 문양이 등장하며 필치가 가늘고 간결해진다. 이와 같이 元 이후 선덕연간(대체로 15세기 전반기경까지) 청화문양과 그 이후 성화·정덕연간 청화백자문양의 특징이 서로 다르다.
명 양식과 유사한 우리 나라의 청화백자 문양을 중국과 비교해 보면 원 이후 선덕연간까지의 청화백자 문양과 흡사하다. 문양은 주문양과 종속문이 있고 주문양은 기면의 중심부에 넓게 배치하고 종속문은 그릇의 상·하인 구연부나 견부와 하부 등에 좁은 帶狀으로 배치하고 주문·종속문이 모두 도식적이며 여백이 거의 없이 기면이 문양으로 꽉 차 있으며 필치가 힘이 있고 발색에 농담의 변화가 있다. 따라서 명 양식과 유사한 우리 나라 초기 청화자기는 15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
끝으로, 우리 나라 독자 양식의 청화백자는 토청을 개발할 무렵부터 시작하여 처음에는 명 양식과 유사한 구성이었으나 명 양식의 종속문은 그대로 있으면서 점차 주문양이 기면의 여백을 살리면서 회화적으로 된다. 이 상태에서 다시 종속문이 사실적 문양이 되거나 단순화되면서 항아리·병의 경우 상·하에 있던 종속문이 상부에만 있게 되고, 저부는 직선으로 대체되기도 하며 접시의 경우 뒷 면의 문양이 점차 없어진다. 이 시기의 분명한 편년자료는 앞에 제시한 동국대박물관 소장<‘홍치2년’명송죽문호>(1489)이다. 이 항아리는 질도 상품 갑번일 뿐 아니라 형태도 뛰어나고 청화의 발색도 밝으면서 농담의 변화가 있어 깊이가 있다. 구연부에 사실적인 연당초문이 있고 기면 전부에 송죽문을 회화적으로 포치하였으며 하부에는 문양과 기면을 마무리 하듯 一條帶線이 있다. 토청으로 번조를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주로 토청으로 청화백자를 번조하던 시기를 지나 다시 회회청을 명에서 수입하여 만든 뛰어난 작품이다. 명에서 회회청이 다시 수입되고 명 청화백자의 남용이 조정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던 때에, 이와 같이 독자적 문양구성과 뛰어난 회화적 문양의 당당한 항아리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성종 때의 문화적 역량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조 9년 토청 개발에서 비롯된 조선 전기의 독자적 청화백자 발전이 여기서 완성된 것이다.
16세기 청화백자로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진 편년자료는 앞에서 인용한 번천리 2호요지 출토의<백자청화절지문전접시편>하나 뿐이다. 보고서753)에 의하면 1554년 명문이 있는 墓誌와 같이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16세기 중엽의 청화백자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고서의 접시 단면도를 보면 15세기 전접시와 유사하며 같은 보고서에 보이는 다른 전접시보다 조금 古式으로 보인다. 문양은 주문양과 종속문양이 있고 주문은 절지의 일부만 남아서 잘 모르겠으나, 절지의 표현에 굴절함이 없어 완만하고 여백이 많으며 종속문은 단순화되었으며 이면에는 문양이 없다. 지금까지의 추측으로는 16세기에는 종속문이 없어졌다고 생각되었는데, 단순하지만 일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는 기년명이 있는 묘지 자료가 몇몇 있어서 그 당시 청화백자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묘지로는<‘正德三年’銘淑儀文氏墓誌>(1509)·<‘隆慶己巳年’銘王子全城君丹陽郡夫人權氏墓誌>(1569)·<‘萬曆四年’銘朴公墓誌>(1576)·<‘萬曆十四年’銘尙宮金氏墓誌>(1586) 등이 있다. 이들 청화백자 묘지의 질은 대체로 정치한 편이나 유색은 담청을 머금은 회색조를 띠고 있고 청화발색은 흑갈 또는 흑색을 띤 조질로 15세기의 기명에 보이는 선명한 발색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만력14년’명김상궁묘지>의 경우는 16세기의 일반적인 묘지의 발색과는 전혀 다른 아주 고운 靑藍色을 띠고 있고 유색 또한 회색 기운이 여타의 묘지들 보다 약하고 회청색조를 띠고 있어 당시의 상급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16세기까지의 청화백자와 백자편년에 따른 기형·유태·굽처리 등의 특징으로 보아 16세기라고 추정되는 청화백자를 들어보면 송죽인물문호·운룡문병·매죽문병·매조문호·청화백자매조죽문병 등이다. 이들을 통해서 보면 대체로 기형상의 곡선이 15세기에 비해 이완된 감이 있고 문양은 종속문이 거의 없어지고 주문양이 있는 경우가 많고 주문양은 회화적인 문양이 15세기 이래 단절되지만 여백이 더욱 넓어져 확대된 공간감을 주고 있다. 또한 문양의 주조를 이루는 매화와 대나무의 경우를 보면 15세기와 비교했을 때 강하게 굴절하는 남송원체풍에서 비롯된 명초의 수지법에 비하여 굴절이 덜하고 형식화되거나 이완되어 화격이 대체로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에도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연대가 확실한 편년자료는 드물다. 17세기 중엽의 요지인 광주 선동리요지에서 청화백자 파편 2점이 채집되었고 선동리 2호요에서 청화백자 파편 3점이 발견되었으나, 이들 파편은 제기·접시 등 파편으로 내저에 청화로 원을 그리고 ‘祭’자가 있을 뿐 문양이 없어 그 당시 문양의 특징 등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선동리 2호요지 조사시에 철화백자 파편이 상당량 발견되었고, 지표조사시에도 많은 양이 발견되어 17세기 중엽 도자기 문양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철화문 자료에 의하면 16세기 청화백자에서 사라졌던 종속문이 새로 등장한다. 항아리의 구연에는 당초문이, 어깨에는 연판문이, 하부에는 파도문이 시문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대체로 16세기말에서 17세기 전반 무렵으로 생각되는 청화백자 明器들이 근래에 나오고 있어 이 시기의 청화백자 문양을 짐작할 수 있다.
湖巖美術館 소장<靑華白磁明器一括>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일괄품 중에 주목되는 것으로는 굽바닥에 청화로 ‘萬曆年製’를 二行四字로 쓴 전접시가 있다. 만력은 중국연호이므로 이 전접시가 중국제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이와 함께 나온 명기 접시나 잔들의 유태 및 굽의 처리 등으로 보아 조선에서 만든 것이 확실하다. 또한 청화의 발색도 엷어서 만력연간의 청화발색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만력연간은 1573년에서 1619년 사이로 1592년에서 1597년 사이의 기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요업이 거의 경색지경에 이르렀던 때이다. 그러므로 만력연간의 제작이라면 1573년에서 1592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고, 또 전란이 끝난 후 1619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 할 수는 없다. 또한 이와 같은 중국연호를 우리 나라 기명에 써넣는 경우 반드시 그 시기의 제작임을 나타냈다기보다 일종의 장식적인 의미로 쓰인 예가 있기 때문에 17세기 전반 어느 시기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괄품 중의 다른 전접시나 편병·연적 특히 투각향로 등의 기형으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특히 투각향로는 이와 같은 기형이 선동리 2호요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일련의 유물들이 17세기 중엽에 가까운 때의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여기서 이 일괄품에 나타난 문양·청화의 발색 등을 살펴보자. 문양은 16세기의 조선청화에서 보면 매·죽·송·인물문 등과는 전혀 다른 오밀조밀한 초화문 및 칠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화문의 경우 절지로 각종 이름모를 풀과 꽃에 칠보와 이따금 나비 등 곤충을 그려 넣은 것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초화문은 嘉靖연간(16세기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칠보문은 중국에서는 도교팔보문이라 하여 명초의 영락·의종연간(15세기 전반)부터 가정·만력연간까지 계속 이어지나 그 양상은 변화가 있다. 조선청화에서도 15세기의 명초 문양을 답습한 전접시의 뒷면에 그러한 문양이 나오고 있으나 여기 명기들에 보이는 칠보문은 15세기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칠보문에는 술이 돌려진 것과 술이 없는 것이 동시에 나온다. 주위에 꼬리모양의 술장식 등은 15세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17세기 후반∼18세기 무렵의 기명에 그러한 칠보문이 나타나고 있다. 명기들의 청화발색을 보면 청색이 아주 고운 발색과 흑색이 많이 나는 발색 및 엷은 담청색 등인데, 앞의 두 가지 발색은 앞서 본 16세기 후반의<‘만력14년’명김상궁묘지>의 색조와 유사하나 후자의 엷은 청색의 발색은 중기의 농담이 적은 청화발색에 가깝다.
17세기는 임진왜란을 겪고 뒤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가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회회청의 수입은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생각되며 청화백자의 제작도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그 대신 철화문이 백자에 이용되었으며 17세기 중엽 무렵에 부장용 등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청화백자가 번조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때 청화의 이용은 선동리 발견 ‘祭’字銘 접시들과 같이 제기에 글씨로 표시하는 정도였다. 부장품 등 아주 특수한 경우 명 청화백자 문양의 영향으로 오밀조밀한 초화절지문·칠보문·곤충문 등이 기면에 가득 시문되나 일정하지 않고 종속문도 다시 나타나는 등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으로 17세기 후반과 그 이후로는 단절되었다.
744) | ≪孝宗實錄≫권 15, 효종 6년 7월 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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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 | ≪世祖實錄≫권 30, 세조 9년 5월 임자. |
746) | ≪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윤7월 경신. |
747) | ≪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8월 무자. |
748) | ≪睿宗實錄≫권 8, 예종 원년 10월 을묘. |
749) | ≪成宗實錄≫권 14, 성종 3년 정월 을미 및 권 77, 성종 8년 윤2월 무신·신해·임자. |
750) | ≪光海君日記≫권 127, 광해군 10년 윤4월 신유. ≪仁祖實錄≫권 37, 인조 16년 10월 경술. |
751) | ≪仁祖實錄≫권 49, 인조 26년 윤3월 경자. |
752) | ≪陶器講座-中國 Ⅲ 元·明-≫(雄山閣, 1971), 도판 48 참조. |
753) | 이화여대박물관·한국도로공사,≪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번천리 5호·선동리 2, 3호-≫(이화여대박물관, 1986), 1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