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화
우리 나라 역사상 繪畵가 가장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제일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시대이며 그 중에서도 초기(1392∼약1550년)는 그 기초가 다져진 시기로 특히 중요하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중국의 화풍을 수용하여 다양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조선 중기(약1550∼약1700년)는 물론 일본 室町시대의 수묵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 회화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山水畵를 위시하여 人物畵·翎毛畵·花鳥畵·草蟲畵 등 다방면의 회화가 발전하였는데, 이의 제작에는 王公·士大夫 출신의 화가들과 화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 큰 몫을 하였던 僧侶화가들의 활동은 抑佛崇儒政策 때문에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승려화가들에 의한 佛敎繪畵 발전은 주목할만 하였다.
국초부터 圖畵院이 설치되어 圖畵署로 개편되기는 하였지만 繪事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이 세워져 국가와 조정이 회화수급에 적절히 대처하고 이를 중심으로 직업화가인 畵員들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사실도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고 믿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대체로 왕공·사대부 출신의 화가들이 새로운 외래화풍을 수용하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으며 화원들을 이론적인 측면에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했던 반면에, 화원들은 회사의 실무를 담당하여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 출신 화가들과 화원들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의 화단을 이끌어 가는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억불숭유정책이 철저하게 시행되었던 관계로 회화를 비롯한 모든 미술분야에 성리학의 영향이 짙게 미치게 되었다. 이와 함께 道家思想의 영향도 비록 표면에 표출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회화에 크게 미쳐서 山水畵의 발전에 현저한 기여를 하였다고 믿어진다. 이 시대에 實用畵 이상으로 鑑賞畵가 주를 이루며 유행하였던 사실도 이러한 성리학과 도가사상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음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비록 억불숭유정책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보긴 하였지만 불교회화가 나름대로 명맥을 유지함은 물론, 고려시대의 찬란했던 佛畵의 전통을 이어 높은 경지의 발전을 이룩하였던 사실도 높이 평가해야 할 업적이라 하겠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회화상의 괄목할만한 업적들이 이루어졌던 것이니 유존작품이 희소하다는 사실만으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사항들이 많음을 유념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