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1) 교린정책과 왜변
          • 2) 일본의 국내정세
          •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1) 왜란의 발발
          • 2) 의병의 봉기
          • 3) 수군의 승첩
            • (1) 임란 전의 해방체제와 전라좌수군
            •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 (3)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 (1) 참전의 배경
            •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 (1) 조선 관·의병의 활약
            • (2) 명군의 평양승첩과 전후의 행동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1)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
            • (1) 평양수복 전 조·명과 일본의 교섭
            • (2) 평양수복 후 명과 일본의 교섭
          • 3) 정유재란의 발발
            • (1) 조선의 일본재침에 대한 대비
            • (2) 일본의 재침
          • 3) 조·명군의 활약
            • (1) 조·명군의 활동상
            • (2) 조선 수군의 활약
            • (3) 조·명군의 추격전
          • 4) 일본군의 패퇴
            • (1) 조·명연합군의 반격전
            •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 (3) 일본군의 패퇴
          • 5) 일본의 통교요청과 기유약조
            • (1) 일본의 통교요청
            • (2) 기유약조
        • 4. 왜란중의 사회상
          • 1) 군량미 조달과 농민의 실상
            • (1) 난초의 양식실태
            • (2) 명군 내원 이후의 군량조달
            • (3) 민중의 실상
          • 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 (1) 송유진의 난
            • (2) 이몽학의 난
            • (3) 기타 민간반란
            • (4) 반란의 성격
          • 3) 항왜와 부왜·부로
            • (1) 항왜
            • (2) 부왜·부로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1) 관군의 군령·군사지휘권
            • (2) 전란초의 방어체제
            • (3) 관방설치와 청야책
            • (4) 의병의 지휘권과 전략·전술
            • (5) 훈련도감의 신설과 신병법
          • 2) 해전
            • (1) 해전의 전개
            • (2) 수군의 전승요인
      • Ⅱ. 정묘·병자호란
        • 1. 호란 전의 정세
          •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 2) 숭명정책과 중립 양단외교
        • 2. 정묘호란
          • 1)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2) 강화 성립
          • 3) 의병의 활약
        • 3. 병자호란
          • 1) 재침 전의 조·만관계
            •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 (2)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 (3) 범월쇄환의 시비
            • (4)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 (5) 후금의 압력과 조선의 태도
          • 2) 청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 4) 의병의 봉기
            • (1) 호남의병
            • (2) 다른 지역의 의병
          • 5) 강화 실함과 남한산성
            • (1) 강화 실함
            • (2) 인조의 남한출성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1) 전후처리문제
            • (2) 반청의식의 고조
            • (3) 피로인 쇄환문제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선조 25년(1592)부터 31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은, 1차의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의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임진왜란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하여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文祿·慶長의 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萬曆의 役」으로 부르고 있으나 근자에 와서 임진왜란으로 표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조선정부가 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선조대에 이르러 비롯된 것이 아니며 이미 훨씬 이전부터 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를 염려한 李珥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돌파구를 마련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고 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나 국가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豊臣秀吉(도요토 미 히데요시)이 등장하여 戰國時代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싸움에서 얻은 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對馬島主 宗義調를 시켜서 조선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修好하도록 하였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 있었다. 대마도주는 家臣 橘康廣 등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어 通好할 것을 청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서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조정대신들도 완강히 반대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수차 사신 을 보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은 터라 조선조정은 통신사 파견의 가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론을 얻어, 報聘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풍신수길의 저의도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낙착을 보았다.

 통신사 일행은 선조 23년(1590) 3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이듬해 3월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正使 黃允吉과 副使 金誠一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사는 일 본이 많은 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은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한 반면, 부사는 침입할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풍신수길은 사람됨이 鼠目이라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상반된 보고를 받은 조정대신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는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후자의 의견에 머물게 되어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 후 宗義智가 부산포에 와서 풍신수길이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請和通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邊將에게 말했으나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가고 倭館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도 본국으로 소환되자 조선은 일본의 침입이 임박했음을 뒤늦게 알고 그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풍신수길은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고 그 자신은 名護屋에서 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9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육군은 출정한 정규병력이 157,800명이었고, 수군은 9,000명이었으며, 정규 전투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만 명이나 되었다.

 왜란은 선조 25년 4월 14일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부산진 을 침범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군이 대거 쳐들어왔다는 邊報가 조선조정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 급 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방어대책을 세우고 장수들을 해당 지역에 내려보냈으나 인솔한 병력이 적어서 적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수령들도 각자 소속군사를 이끌고 京將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군량이 떨어지고 적이 박두하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흩어졌다. 조선관군은 요해처에 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했고 적은 부산진을 침입한 지 보름남짓한 기간에 서울까지 북침하였다.

 일이 다급하자 선조는 왕자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勤王兵을 모으게 하고, 국왕이 西行에 오르기에 앞서 李陽元을 留都大將으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 하고 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게 하였으나 병력이 적어서 적을 막아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4월 30일 밤에 왕은 서울을 떠났고 왜군의 1번대와 加藤淸正(가토 기요마 사)의 2번대가 각각 5월 2일과 3일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도원수가 한강 수비의 어려움을 알고 임진강으로 물러나자 유도대장도 도성의 방어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국왕 일행은 도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평양으로 옮겼으며, 김명원의 임진강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이 계속 북침하자 평양수비도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임진강패 전에 이어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왜군은 3군으로 나누어 소서행장군은 평안도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으며, 함경도로 침입한 가등청정의 군은 함경감사 柳永立을 被執하고 臨海君과 順和君 두 왕자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3번대의 주장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했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과 義僧軍 이 봉기하여 무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했고 수군 또한 활약이 커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의병이 봉기하게 된 동기는 관군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국토가 적에게 짓밟히고 많은 生靈들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鄕里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관원으로 문반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무인들은 소수였으며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민족적 저항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고,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勤王精神이 오랜 유교교육을 통하여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묘향산의 노승 休靜(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로 의승군을 일으키고 사찰에 격문을 보내니 그 문도들이 제각기 의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으며 전국사찰 에서 起義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공도 컸다. 왜란초 의병과 의승 군의 역할은 전국을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왜란중 조선수군의 활약은 왜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泗川海戰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制海權을 장악하게 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의 수군이 연전 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李舜臣의 지휘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전술을 들 수 있고, 다음으로 조선전선이 일본전선에 비하여 견고하고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활약과 함께 불리하였던 전국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선조는 피란 도중에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 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차 원병은 遼陽副摠兵 祖承訓의 5,000 병사로 소서 행장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 나라는 정신들간에 和戰兩論으로 나누어 졌으나 파병으로 기울어져 寧夏의 變을 평정하고 복귀한 李如松을 다시 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12월에 이여송은 4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1월에 명나라 원군은 조선의 관군 및 의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안 소서행장은 내성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곧 이어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하였던 흑전장정도 뒤따라 퇴주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하여 오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은 함께 머무르고 있던 흑전장정과 함께 서울로 퇴각하였다.

 왜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으나 碧蹄館 남쪽 礪石嶺에서 일본 매복병에 의해 대패하고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평양으로 퇴각하였다. 여석령싸움의 승리로 사기가 되살아난 왜군은 幸州山城에서 전라감사 權慓의 군대에 의해 대패하자 다시 사기가 꺾이게 되었고 앞서 평양에서 진행되었던 명·일간의 화의교섭은 급진전되어 4월 18일 왜군은 도성에서 철수하여 다른 지역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남해안에 성을 쌓고 화의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沈惟敬이 일본군과 같이 풍신수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화의는 결렬되고 왜군이 재차 침입하니 이것이 丁酉再亂이다.

 이 때 조선에 침입한 장수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하였던 諸將들로서 총병력 141,500명이었다. 재침소식을 접한 명나라에서는 재차 원병을 보내왔으며 조선 관군과 함께 적의 북침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元均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수륙군의 전략에 말려들어 패하였으며 이순신이 쌓아 놓은 한산도의 수비도 일조에 무너지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여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북침을 계속하다가 稷山 북방 素沙坪에서 선발대가 명나라 원병에 의해 대패하자 다시 남해안으로 퇴각하였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 만에 鳴梁에서 크게 이겨 왜군의 서진도 봉쇄하였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수륙양면에서 왜군을 공격하였으나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 후 풍신수길의 유언으로 왜군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조·명 연합군이 육상에서 이를 공격하고, 이순신과 陳璘이 수상에서 이를 봉쇄하니 퇴로를 얻으려는 왜군과의 격전이 수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명나라 장수 劉綖이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협공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소서행장은 진린에게도 뇌물을 보내어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하여 응하게 하였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서행장의 구원요청을 받은 島津義弘(시마츠 요시히로)이 병선 500척을 거느리고 노량으로 습격하여 오자 이순신은 적의 전선을 맞아 곧 격전을 벌여 적함대 절반을 쳐부수었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없어 되돌아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친히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던중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도진의홍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하였고 소서행장은 격전중에 猫島를 몰래 빠져 나갔다. 조선에서는 풍신수길이 죽고 일본의 국내사정이 불안하여 왜군이 급히 철수하는 것을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은 끝났다.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전화로 인한 인명의 손상은 말한 것도 없고, 전지의 황폐화가 전국에 미쳐 전쟁 전에 170만 결이던 경지면적이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민간의 생활은 처참하여‘人相殺食’의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조정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군중을 선동하여 내란을 획책하는 자들도 있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궁궐 등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한편 병제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戚繼光의≪紀效新書≫를 얻어서 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하였으며, 지방에 哨官을 두고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새로운 무기가 발명되었고 降倭로부터 조총제조와 염초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하였으며, 佛狼機를 모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는가 하면, 崇明思想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지기도 하였다.

 일본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으며, 풍신수길 이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생활을 피폐하게 하였으므로, 일본 국내의 봉건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으로 하여금 국내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하였으며, 끌려간 조선 陶工들의 도자기제조로 말미암아 일본 陶磁器業에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으로부터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또 포로로 끌려간 조선학자들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退溪集≫등 중요한 전적을 가져가서 일본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으므로 국가재정이 문란하게 되었으며,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明·淸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양에 있어서 국제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의 建州衛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는 세력을 형성하고 後金을 세웠다. 명나라는 후금을 제압하기 위해 楊鎬를 요동경략으로 삼아 후금을 치게 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중립적 외교정책을 펴면서 원군을 보내 전세를 보아 향배를 정할 것을 장수 姜弘立에게 은밀히 지시하였다. 전세가 명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강흥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조선의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했다. 광해군의 이러한 외교정책의 결과 그의 재위기간에는 후금과 특별한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하자 친명정책으로 급선회하여 후금과의 관계를 끊었다. 배후에서 위협을 받는 데다 물자부족을 느끼게 된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여 주력은 선천을 거쳐 안주방면으로 남하하고 병력의 일부는 椴島의 毛文龍부대를 공격하였다. 후금군이 계속 남침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昭顯世子를 전주로 내려가게 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즈음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 군의 배후를 공격하였는데 특히 평안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鄭鳳壽와 李立의 공이 컸다. 평산까지 침입한 후금군은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여 더 이상 남침 을 꺼려하였고 조선조정도 후금군이 강화도 가까이에 이르자 위협을 느꼈다. 이 때 참판 崔鳴吉의 主和論이 채택되어 강화교섭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조약의 체결로 양국간에 강화가 성립되어 후금의 군대는 물러갔다. 이 和約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 후금과 명 사이에 엄정중립을 지킨다는 것이며, 후금은 명과의 관계상 군사를 조선에만 묶어둘 수도 없어 조속히 전쟁을 끝내자는 일시적인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 후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하여 조선에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여 옴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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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금의 1차 침입인 정묘호란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으나, 그 후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어기고 식량을 강 청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해왔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후금은 세력이 확대되자 「형제맹약」을 「君臣의 義」로 고칠 것을 요구해 왔으며, 황금·백금·戰馬와 精兵 3만까지 요청하였다.

 인조 14년(1636) 2월에는 龍骨大 등이 후금 태종의 尊號를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차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군신의 의」를 강요하자 조선은 國書를 거절하고 후금사신을 감시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후금사신은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타고 도망하던 길에 조선조정이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諭文을 탈취하여 가서 조선이 후금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자 재차 침입을 결심하였다. 12월에 청 태종은 12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여 10여 일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계획을 세우고 그 자신도 그 곳으로 피란하려 하였으나 일이 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성안에는 13,000의 군사가 있었으며 50여 일을 견디어낼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의 선봉부대는 12월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고, 청 태종은 다음해 정월 초하루 20만의 군사를 炭川에 포진한 후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전양론이 팽팽히 맞서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었음을 확인한 인조는 출성하여 三田渡에서 「城下의 盟」의 예를 행한 뒤 도성으로 돌아왔으며, 청은 조선의 세자 등을 볼모로 삼고 諸道의 군사를 거두어 瀋陽으로 돌아갔다.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장수나 관료들의 공과를 따지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청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贖還問題였다. 전자의 경우 강화도의 함락이 남한산성에서의 출성을 재촉하게 하였으므로 강화도 防戍의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함락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강화성이 함락될 때 순절한 전직 관료나 부녀자에게는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을 내려 그들의 절의를 찬양하였으며, 단을 설치하여 죽은 사람들을 제사하여 그들의 원혼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후자에 있어서는 고아의 수양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많은 사람들의 속환문제였다. 청군은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宗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속환되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贖還士女의 이혼문제가 정치·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한 달남짓한 싸움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큰 싸움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 보지 못한 큰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李章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