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1) 소빙기(약 1500∼1750년) 자연재해 연구 현황
역사학자들이 기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경우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0563)이 최초의 것으로 꼽힌다.0564) 기번은 이 책에서 추워진 기후가 로마의 쇠퇴와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을 논하였다. 그런데 기번을 비롯해 18세기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기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은 주목할만하다. 볼테르가 17세기 역사는 반드시 기후변동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몽테스퀴외(Charles Montesquieu)도≪법의 정신≫에서 기후 영향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0565) 18세기 학자들이 이렇게 기후의 영향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은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아버지·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시대에 이상기후 현상이 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에 들어와 18세기 고전적 사상가들처럼 기후의 영향을 특별히 강조하는 사상가들은 없었다. 19세기에는 많은 학문이 새로이 독립 영역을 확립하여 발달했다. 기상학도 19세기 중엽에 체계를 세워 독립 학문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기상학이 이처럼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달하면서도 기후의 변동이 인간의 생활과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19세기에 발달한 환경론(Environmentalism)도 주로 지리학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20세기초에 헌팅톤(Ellsworth Huntington)이 기상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역사를 논하였다. 그는 아시아에서의 급격한 기후변동이 로마 멸망과 그 후의 암흑기(The Dark Ages)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0566)
기후변동이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보다 더 중요시하는 학문 연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이 시기에 지구상에서 산업화지역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대기 오염도가 높아가고 그 결과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심해짐에 따라 기후·기상 등 대기권의 각종 자연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정도가 높아졌다. 기상학자나 지리학자들은 미래의 ‘지침(indication)’으로서 과거의 기후나 환경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면서 탐구를 거듭하였다. 이에 반해 역사학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늘날에 직면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문제는 어디까지나 산업화 이후의 문제로서, 이것이 그 이전의 역사에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역사학자 가운데서도 영국의 토인비(Arnold Toynbee)가 1934년에 이미 저 유명한≪역사의 연구≫0567)에서 기후 변동이 문명권의 성쇠에 미친 영향을 논하였지만 이에 동조하는 역사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변동을 여전히 사회적 관계 또는 인간의 사고의 결과로 보려는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
20세기 역사학에서 환경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표명한 부류는 새로운 역사학을 추구한 프랑스의 ‘아날학파’였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지리적 환경에 더 쏠려 있었다. 이 학파 창도자의 한 사람인 루시엥 파브로(Lucien Febvre)는≪지리와 인간의 발전≫0568)에서 역사학자들이 지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환경으로서의 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던 끝에 지리적 결정론이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인 빅터 쿠진(Victor Cousin)은 “자연 지도(physical map)를 가져오라, 그러면 그 나라가 역사 속에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미리 말해 줄 수 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서”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인간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환경에 대한 창의적인 적응(creative adaption)으로 보아야 한다”(Paul Vidal de la Blache)는 비판이 나와 있는 가운데0569) 루시엥 파브르는 “필연(necessities)은 없다. 도처에 가능성(possibilities)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능성의 주인(Master)으로서의 사람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판단한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는 곧 역사학자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역사지리학(geo-history)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0570) 이 학파의 제2세대인 페르난드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유명한 필립 2세 시대의 지중해에 관한 저서는 곧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아날학파는 이같이 역사에 있어서 환경에 대해 큰 배려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후에 관한 관심은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브로델 다음 세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엘마뉴엘 르호이 라뒤히(Emmanuel Le Roy Ladurie)가 랑그독(Languedoc) 지방의 농민에 관한 연구에서0571) 기후의 영향을 고려하기는 했지만 이 저술의 중심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구문제였다. 르호이 라뒤히는 이후에도 누구보다 기후와 농작물 수확에 관해 많은 연구업적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서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이었다.0572)
인간의 역사에 미친 기후의 영향은 결국 20세기 중반까지도 기상학자·지리학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1978년에 파커(Geoffrey Parker)와 스미스(Lesley Smith)가 공동으로 편집한≪17세기의 위기≫0573)를 통해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래, 이 책이 다룬 주제인 17세기 위기는 체제변동의 문제로만 다루어졌었다. 즉 17세기에 일어난 각종 폭동과 반란·전쟁 등을 중세사회 해체의 국면으로 보던가, 절대왕정의 비대해진 관료제가 야기한 문제로 파악되었다. 파커·스미스 등은 체제변동의 면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 변동이 급격하고도 격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대한 특별한 이유로써 자연과학자들이 이미 제기하고 있던 17세기의 특별한 자연조건 즉 소빙기 현상과 연관지우는 편집의 입장을 취했다. 파커와 스미스는 이 책의 서론에서 17세기 역사는 기후변동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볼테르의 지적을 상기시키면서 1976년에 싸이언스(Science)紙 1,002호에 발표된 천문학자 존 에디(John Addy)의 태양흑점쇠퇴설에 관한 논문을 전재했다.0574) 에디는 17세기에 기온이 내려간 이유를 19세기초에 수집한 몬더(Maunder)의 태양흑점활동에 관한 고기록들을 활용해 태양흑점활동의 쇠퇴가 곧 기온강하의 원인이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이 논문의 소개는 역사학이 자연과학측의 연구성과를 기후 영향론의 입장에서 수용한 최초의 예였다.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지구 환경 보존에 관한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기후사에 관한 학자들의 관심도 더 높아졌다. 1979년에 자연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기후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위해 직접 만나는 자리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회의의 성과는 2년 뒤에≪기후와 역사≫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다.0575) 회의는 어떤 결론을 얻었다기보다도 기후사의 연구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자연과학자들의 행보는 더욱 진지하고 빨라졌다. 그들은 역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수렴하면서 기상학의 성과를 토대로 미래 기상의 지침으로서 과거의 기후현상의 자취를 열심히 추적하였다.0576) 이에 비하면 역사학자들의 관심은 아직도 미약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이 환경에 대한 반응보다 인간의 행위에 더 비중을 두어온 오랜 전통 때문인지 적극적인 전환은 쉽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
지리학자들은 기원전 16만 년 전에 제3기가 끝나고 빙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지구의 역사를 파악한다. 이때부터 기원전 만오천 년 전까지 간빙기가 존속하면서 지구는 점차 따뜻해져 가는 가운데 猿人類가 출현하였다. 간빙기 다음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인류가 등장하였고, 이 시기에서는 지구의 온난화와 건조가 지속되어 여러 선사·고대의 문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수세기에서의 온난화·건조화에 대해서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을뿐더러 지역적인 차이도 있어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한다. 지리학자나 기상학자 등 자연과학자들이 다같이 동의하고 있는 중요한 기후변동은 ‘중세의 온난화’(medieval optimum)와 ‘근세의 소빙기’(little ice age)이다. 중세의 온난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 소개에 의하면, A.D. 900년부터 온난화가 시작되어 1000년경에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이 이를 누리고 그 하한은 1300년경에 닿고있는 것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유럽지역은 1100년에서 1300년까지가 온난화가 가장 안정적으로 지속되어 중세의 번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0577)
근세의 소빙기의 경우, 현상 자체의 존재는 다 인정하나 존속기간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 20세기 초반에 업적을 낸 쇼브(D. J. Schove)는 1541∼1890년간, 램(H. H. Lamb)은 1450∼1850년, 중국의 왕(S. Wang)은 중국의 소빙기를 1450∼1890년으로 각각 설정하였다.0578) 그런가 하면 존 에디는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의 견해는 인간의 실제적인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의 밀도가 크게 떨어지는 시기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근거한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그 기간은 뒤에서 자세히 살피게 되듯이 148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조사 결과는 18세기 유럽의 고전적 학자들이 기후의 영향을 특별히 중시한 반면, 19세기 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던 차이와도 바로 들어맞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소빙기 현상은 연구 자료면에서 이전의 다른 어느 시기의 이상현상보다 실체 파악이 유리하게 되었다. 기원전의 온난화·건조화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세 온난화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의 부족으로 이론적 풀이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문헌기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해수면 변동의 자취, 나이테 및 꽃가루 분석 등의 자연과학적 방법, 또는 집자리 유적의 위치에 관한 고고학적 분석 등을 동원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방법은 온난화·한냉화 등의 기후변동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어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론적 추리만이 가능할 뿐이다.
중세 온난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농경지 개간을 위한 放火를 수반하는 산림벌목(deforestation)으로 보는 견해가 최근 유력한 학설로 제시되어 있다. 벌목 방화시 발생하여 대기에 방출된 탄산가스의 누적이 온실효과를 가져와 기후의 온난화를 가져오다가 궁극적으로는 벌목지 확대로 인한 햇빛 반사의 중성자 양의 증대로 한냉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산림벌목 경작은 일찍이 로마제국의 영역 안에서부터 진행되기 시작하여 5∼6세기에 일시 둔화상태이다가 7세기부터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해 1050∼1250년간에 인구증가와 함께 극성하였다는 사실을 기본전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비단 유럽지역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도 벌목지 확대의 증거를 추적하고 있다.0579) 이 견해는 곧 온실효과의 온난화는 1300년을 하한으로 하여 한냉화로 돌아서 재이가 빈발하고 이에 따라 기근과 질병이 잇따라 발생하여 이른바 ‘14세기 위기’의 상황이 초래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기상학자를 비롯한 자연과학자들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중세 말기의 쇠락을 아직도 증대한 인구와 생산력 한계, 이 양자의 불균형 관계에서 구하는 것에 더 쏠리고 있다.0580)
중세의 온난화가 이처럼 원인 분석에서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근세 소빙기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문헌기록들을 통해 그 원인을 보다 더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 경우도 주로 서양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던 지금까지의 연구 상황에서는 관련 기록의 부족으로 중세 온난화의 경우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서양에서는 소빙기 현상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는데도 이를 장기적으로 관측해 남긴 일관성있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들은 이러한 한계를 근본적으로 타개해 주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해 파악되는 소빙기 현상의 원인은 지금까지 기상학자들이나 천문학자들이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들에 의한 소빙기 연구는 기후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563) | Edward Gibbon,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1776, London, W. Strahan and T. Cad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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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4) | Neiville Brown, “The Impact of Climate Change:Some Indications from History, AD 250∼1250”, August 1995, OCEES Research Paper No.3, Oxford, p.15. |
0565) | The Spirit of Laws, 2vols. New York, 1748:Hafner, First published in French. Book 14, Chapters 12-13. |
0566) | The Pulse of Asia, London, Archibald Constable, 1907 ; Neiville Brown, ibid, p.11. |
0567) | A Study of History, Volume 12 ; Reconsiderations. Oxford Press. |
0568) | La terre et l'evolution humaine, 1925 ; A Geographical Introduction to History (New York, 1992)로 英譯됨. |
0569) | American Encyclopedia of Social Sciences, Environmentalism, p.93. |
0570) | Ed. by Peter Burke, A New Kind of History from the Writings of Luciean Febvre, introduction p. xi, Harper & Row Publishers, 1973. |
0571) | Emmanuel Le Roy Ladurie, The Peasants of Languedoc, Translated into Engflish by John Day, Univeristy of Illinois Press. |
0572) | Emmanuel Le Roy Ladurie, Times of Feast, Times of Famine,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
0573) | Geoffrey Parker & Lesley Smith, The General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London, Routledge & Kegan Palul, 1978. |
0574) | The Maunder Minimum:Sunspots and Climate in the Reign of Louis XIV. |
0575) | Climate and History ; Studies in Interdisciplinary History, Rober I. Rotberg and Theodore K. Rabb(ed.), 1981, Princeton Univerisity Press. |
0576) | Neiville Brown, ibid. |
0577) | Neiville Brown, ibid, p.29. 김연옥,<역사속의 소빙기>(≪歷史學報≫149, 1996), 254쪽. |
0578) | 김연옥, 위와 같음. |
0579) | Neiville Brown, ibid, p.10. |
0580) | Rösner, Peasants in the Middle Age. Polity Press, 1992, Chapter 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