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탕평책 실시의 배경
          • 1) 붕당정치의 위기
          • 2) 탕평론의 대두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1) 탕평책 시행
            • (1) 탕평책의 제기
            • (2) 완론탕평파의 대세 장악과 반탕평파·준론탕평파의 연대
            • (3) 정국의 추이
          • 2) 정치 구조의 변동
          • 3) 기본 법전의 정비
          • 4) 군영 정비와 군주권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준론탕평과 군신 의리
            • (1) 준론탕평론의 적용
            • (2) 정국의 추이
            • (3) 정국운영의 특징
          • 2) 규장각과 왕정
          • 3)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1. 양역의 편성과 폐단
          • 1) 양역의 편성
          • 2) 양역의 모순과 폐단
        • 2. 양역변통론의 추이
          • 1) 양역변통론의 여러 형태
          • 2) 양역변통론의 대두
          • 3) 양역변통론의 전개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1) 균역법의 제정 경위
            • (1) 감필
            • (2) 급대재원의 마련
          • 2) 균역법의 내용
            • (1) 감필균역
            • (2) 균역청
            • (3) 군액감축
            • (4) 급대재원 조달
            • (5) 급대
          • 3) 균역법의 의미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1) 세도정치의 성립
            • (1) 권세가의 권력 독점
            •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 2) 세도정치의 성격
            • (1) 정치 참여층
            • (2) 권력의 주체
            • (3) 국정 인식과 정책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1) 비변사
            • (2) 중앙 군영
            • (3) 언로와 공론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1)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순조 즉위년∼3년)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
            • (3) 순조 친정 중기(순조 12년∼26년)
            • (4)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순조 27년∼30년 5월)
            • (5) 순조 친정 말기(순조 30년 6월∼34년)
          • 2) 헌종대의 세도정치
            • (1) 헌종대 순원왕후 수렴청정기(헌종 즉위년∼6년)
            • (2) 헌종 친정기(헌종 7년∼14년)
          • 3) 철종대의 세도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1) 전세제도의 문란
            • (1) 전결세 항목의 증가
            • (2) 전정의 부실
            • (3) 전정의 폐단
          • 2) 군역제의 해이
            • (1) 군역제의 변화
            • (2) 군역제 개혁
            • (3) 군역제의 문란
          • 3) 환곡제의 변질
            • (1) 환곡제 운영
        • 2. 삼정개혁론의 전개
          • 1) 19세기 전반기의 삼정개혁론
          • 2) 1862년 농민항쟁기의 삼정개혁론
            • (1) 삼정에 대한 책문
            • (2) 삼정개혁방안
          • 3) 삼정이정론의 반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1) 삼정체제의 구조적 모순
          • 2) 전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전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 추진의 실상과 한계
          • 3) 군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군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4) 환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환정의 구조적 문제와「파환귀결책」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1) 호란 후 대청관계의 수립
          • 2)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 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 4) 백두산 정계비 문제
          • 5)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1) 17세기 초 국교 회복 교섭과 대일본정책
            • (2) 기유약조의 체결과 통교체제의 확립
            • (3) 통교 회복 직후 조일 교린관계의 실태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1) 국서개작사건과 통교루트의 일원화
            • (2) 통교체제의 개편
            • (3) 겸대제 실시와 외교 사행의 정비
            • (4) 왜관 중심의 통교·무역과 조일 교섭체계의 형성
          • 3) 17세기 후반 이후 조일 통교양상의 변화
            • (1) 1711년 신묘년 통신사에 대한 의례 변경과 그 의미
            • (2) 17세기 후반 조일 양국민의 접촉과 대일정책
          • 4) 19세기 조일 통교체제의 왜곡
            • (1) 통신사 의례의 왜곡
            • (2) 조일 교린관계의 변화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1) 개항 전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대마번의 조일 통교 대행
            • (2) 왜관 침탈과 조일관계의 변질
            • (3) 조일수호조규 성립과 전근대 조일 통교체제의 붕괴
        • 3. 서양과의 관계
          • 1) 조선과 서세동점
          • 2) 조선 선교의 시도
          • 3) 서양인과의 접촉
          • 4) 이양선의 출현
          • 5) 서양인의 조선 인식
          • 6) 지도 제작과 조선 인식의 확대
          • 7) 조선인의 서양 인식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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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상호 유기적 연결을 가진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는 탕평론 및 세도정치의 전개라는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물론 18세기 탕평론이 제시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었고, 영조대에 전개된 緩論蕩平의 입장과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峻論蕩平은 각기 상이한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양자는 탕평론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상호 합치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정치를 이끈 통치이론이었다.

 한편 개항 이전 19세기의 정치사에서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고 있었다. 세도정치는 왕권강화론의 일부로 제시되었던 탕평론에 맞서 소수 집권가문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이론이었으며, 이는 탕평 정국의 출현 및 지속에 대한 집권 귀족층의 반작용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었다.

 조선 후기 탕평론이 제시된 배경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민·하층민들의 정치적 지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양반 중심의 정치질서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에 양반 지배층들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했다. 또한 17세기 이래 지주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접근하던 일군의 학자들은 朱子의 토지론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箕子 箕田說·井田說 등에 주목한 바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기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洪範 皇極說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 후기 양반 지배층 가운데 일부는 四書 중심의 주자학적 체계에 비판을 가하면서 六經 중심의 古學에 경도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書經의 洪範篇이 재음미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주체를 天子 내지는 國王으로 보려는 皇極蕩平論의 토양이 마련되어 갔다.

 탕평을 표방하는 정국운영론은 이미 숙종 말년부터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탕평론은 영조 5년(1729) 이후에 이르러 실제 정치운영의 원리로 작용되었다. 換局政治의 극심한 폐해를 체험한 당시의 지배층 일부에서는 현실 정치에서 최대의 현안이 붕당의 타파에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정치집단을 당시에는 온건한 주장을 펴는 정파라는 뜻에서 緩論이라고 호칭되었다. 반면에 사림의 정치원칙인 각 붕당의 義理 자체가 붕당 타파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집단도 있었다. 이들은 완론에 대칭되는 준엄한 입장을 펴는 정파라 하여 峻論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 연간에는 붕당의 타파와 당론의 제거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판단되었다. 여기에서 영조는 각 당의 의리론을 黨論으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公論 내지는 士論에 의해 좌우되던 기존의 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영조는 국왕의 은혜인 君恩과 관료 임면권인 用捨權을 강조하며, 각 당파에서 제시하는 政論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간에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등용하여 군주권을 강화시키려 했다. 여기에서 영조는 완론 중심의 탕평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조는 남인 학자 계열의 古學을 상당 부분 수용하여 周禮에 기초한 정책을 구상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서적으로 평가되던 大學을 탐구했으며,≪貞觀政要≫를 학습함으로써 군주권의 신장을 의도하고 있었다.

 또한 영조는 비변사에 탕평파 대신들과 군문대장을 배치하여 현실 정치에 대한 자신의 관여도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八道句管堂上制를 시행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청요직을 혁파하여 사림의 공론이 발휘하던 영향력을 제한하고 군주권과 재상권의 강화를 꾀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방식의 하나였던 上言과 擊錚제도를 활성화시켰다. 또한 영조는 기본 법전을 정비하였다. 영조의 이같은 노력은 정조 9년(1785)≪續大典≫의 편찬으로 귀결되었다.

 영조는 권력행사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의 강화를 시도하여 군영을 정비해 갔다. 그리하여 병조판서가 통솔하는 통일된 편제 및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 삼군문 도성수비체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군제인 속오군의 조직에 대한 점검과 관리도 강화시켜 갔다. 이처럼 영조 연간에는 완론 탕평책의 시행을 통해서 군주권을 강화시키고 귀족권을 제한할 수 있었고, 효율적 국가재정의 운영을 통해 對民 부담을 경감시켜 갈 수 있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의 경우에도 탕평정책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조대의 완론 탕평정국을 거부하며, 완론탕평에 참여했던 무리들이 蕩平黨을 형성하여 당론을 일삼아 탕평의 근본 정신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는 정치원칙을 지켜 나가는 淸議·峻論을 중심으로 한 탕평, 곧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이 필요함을 표방했다. 이 준론탕평론에서는 의리의 변별을 중요시했지만, 붕당의 타파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긍정하고 있었다.

 한편, 정조는 외척세력의 전횡으로 야기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척신들로부터 자신에게 가해지던 압력을 체험한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척신의 배제를 정치의 첫째 원리로 삼았다. 그는≪大學≫을 새로이 탐구하여 군주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제왕학을 세웠고 정국운영은 군주가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여기에서 신하들의 정국 주도를 긍정하는 제도적 장치인 붕당은 당연히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는 ‘혼돈의 탕평이 아닌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였고, 외척당의 배격을 실현시켜 가면서 준론을 중심으로 한 탕평책을 실행하였다. 정조대의 정국운영도 영조대처럼 군주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추구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영조 치세 때 탕평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시행되었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적극 수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정조의 탕평정치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먼저 재상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주권 강화의 보조적 장치로 재상의 존재를 규정한 데에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통제가 강화되었다. 이미 영조 연간에 마련된 바 있었던 팔도구관당상제도 계속 실시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정조 연간에는 암행어사를 비롯하여 어사제도가 강화되었다. 정조는 어사제도를 통해서 지방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성장하는 사회세력과 발전의 성과물에 대한 동태적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정조는 기층세력의 저항을 포함하여 제반 사회변화를 국왕이 직접 파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강화시켰다. 그는 상언과 격쟁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또한 그는 성장하는 중간계층을 국왕과 직접 연결되는 세력으로 재편성하는 데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편파적 상황의 타파를 표방하는 탕평의 원칙을 사회에도 확대 적용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萬川을 고루 비추는 明月’과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모든 백성을 군주의 赤子로 보는 입장에서 서얼과 노비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했다.

 한편 자신이 학자이기도 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새롭게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의 문화정책을 수행했다. 그 문화정책은 국가의 체제정비와 연결되었고, 군주권의 강화를 지향하는 六經 중심의 古學을 장려했다. 또한 그는 탕평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력의 확보를 위해서 장용영을 설치하고 軍權을 군주권 아래에서 일원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水原에 華城을 축조하여 군주권의 보조적 요충지로 만들고자 했다.

 요컨대 영조·정조의 탕평책이 시행되어 가던 기간에는 군주권이 강화되었고, 군주는 세상을 다스리는 바른 도리인 世道의 담당자요 책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군주는 모든 의리를 군주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타파붕당의 기치 아래 당론을 배격하고, 사족 지배층을 억압하며 對民 肯定的 정책들을 강화시켜 갔다. 그러나 탕평정국을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립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과 관련하여 19세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세도정치가 시행된 배경으로는 탕평정국을 거치는 동안 진행된 붕당의 퇴조현상과 그리고 정조의 사후 왕권의 약화현상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순조와 헌종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군주의 국정 주도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국왕은 국정 운영 전반에 있어서 그 관념상의 권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주권의 약화에 대응하여 전개된 세도정치기에는 중앙의 정치권력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 특정한 소수 가문에 집중되었다.

 한편 지난 17세기 붕당정치기에 있어서 지배계층은 士論의 확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의 근거를 삼았다. 그러나 19세기의 세도가문들은 정권의 장악과 유지의 중요한 기반을 국왕 또는 왕실의 권위에 두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써 이 권위를 강화시켜 보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왕실의 권위가 강조되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군주권이 강화되었던 상황이 19세기에 이르러 세도가문들에 의해서 변칙적 형태로 역이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밟아 온 변화의 귀결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세도가문들은 군주라는 중세적 정치체제의 전통적 권위 위에서 존립했고, 이로써 그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서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세도가문들 사이에는 時僻이라는 당색의 차이보다 더욱 강한 동질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 동질성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통해서 강화되기도 했다.

 세도정치 기간에 진행된 외척 권세가의 권력 장악은 군주권의 쇠퇴와 정치적 권력이 소수의 세도가문에 집중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군주권에 전적으로 귀의하던 성향을 보이고 있던 일부 남인들은 세도정치의 성립으로 인해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세도정권이 성립되던 당시부터 중앙정계에서 남인이나 혹은 노론을 각기 하나로 묶는 동류의식이나 결집력은 이미 소멸되어 갔다. 세도정권의 핵심 집권세력이 노론으로 분류될 수 있었지만, 정국운영의 기본축은 소론이나 남인과 경쟁하던 노론 또는 시파와 벽파라는 붕당의 범주로 설명하기가 점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도정치는 소수의 세도가문간의 연합통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고, 세도가문들은 상호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앙의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주도한 세도집단들은 제도의 개혁이나 민생의 안정에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관심이 약했다. 그들은 현실적 문제를 논의하더라도 관념적 원론의 수준에 머무는 의견을 제시하는 데에 그쳤고,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지는 않았다. 민생에 대한 책임은 지방의 수령에게 돌렸고, 對民 인식에 있어서도 취약성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민의 입장을 반영하는 전진적 개혁의 노력을 거부했다. 세도집단들은 전국에 대한 균형잡힌 배려보다는 서울 중심의 정책을 수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비변사를 장악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비변사는 행정기구가 아니라 중요한 정치기구로 변신되어 갔다.

 세도정치 기간 동안 국가의 군사력과 군사제도도 세도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으로 작용했다. 또한 言路를 제한하고 公論의 의미와 기능을 유명무실화했다. 이는 유생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억압했던 경향이 빚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여러 현상들은 그 세도집단들이 앞 시기의 지배체제를 변전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관행 속에서 성장해 온 세력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도정치는 순조가 즉위한 이후 전개되어 나갔다. 세도정치의 첫 단계는 순조 즉위 후 3년에 걸친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수렴청정하는 貞純王后와 그의 권위를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경주 김씨 중심의 벽파세력이 노론 내의 시파세력과 경쟁하던 단계였다. 한편 순조가 친정을 단행한 순조 4년(1804) 이후 11년까지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가문 등이 상호 협력하여 권력을 집중시켜 가던 시기였다. 순조 12년부터 26년에 이르는 기간은 국정을 주도하기 위한 순조의 노력이 실패한 상황에서 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들이 趙得永과 협력하여 순조 외가측 인물들을 견제하던 단계였다. 그리고 순조 27년 이후 30년에 이르는 孝明世子 대리청정의 시기는 효명세자가 정치의 주도권을 강력히 행사하려 꾀하던 때였다. 효명세자가 죽은 이후 헌종이 즉위하는 순조 34년까지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에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들을 도태시키고 기존의 세도집단들을 중심으로 권력질서를 재편하던 시기였다.

 순조대에 이어서 전개된 헌종대의 세도정치는 대체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이라는 두 세력 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철종대의 세도정치 또한 기존의 세도가문들 상호간의 협력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었다. 세도정치 기간 중 유력가문을 중심으로 한 상호간의 협력관계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 있어서는 강한 동질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세도집단 내부에 존재하던 이와 같은 동질성은 대원군 집권기를 통해서도 철저히 불식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 18∼19세기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각종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여러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조선왕조가 당면했던 17세기의 재정위기는 大同法의 시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대처해 나간 바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적 재정이 갖는 한계로 인해서 재정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다. 18세기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재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군역제와 관련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均役法 시행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영조 28년(1752)에 시행된 이 균역법은 양역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양인층의 피역 저항이 강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양인층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확보한다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제정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국가의 재정체계가 租庸調 체제로부터 田政·軍政·還穀이라는 三政體制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사회변동의 여파에 따라서 부세제도가 총액제 수취방법으로 변동되어 갔고, 부세제도 자체의 문란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民의 저항이 강화되자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삼정문란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은 조선왕조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로 중요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각종의 변통론 즉 개혁안들은 사회구조의 근본적 개혁의 방향을 지향하는 대변통론을 취하기보다는 기존의 체제 내에서 수취방법을 개선하려는 소변통론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사회가 추구하고 있던 개혁의 한계점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제도의 개혁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 것은 양역변통론이 제시되었고 균역법이 시행된 사건을 들 수 있다. 균역법 시행의 배경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중앙군의 개편 과정에서 등장한 5군영의 설치를 우선 주목할 수 있다. 당시 정부에서는 군사비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人丁을 단위로 하여 양반을 제외한 常民들에게 每人當 2필의 군포를 부과하였다. 당시의 상민들은 대부분 군역세를 납부하는 납포군으로서 군역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집안에서 군역 부담자 3∼4인이 양역을 부담할 경우에 이 군포를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냥 내외의 부담이 되었다. 이 부담액은 당시 소농들의 실질적인 토지 소득이 25냥 내외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소농들의 생계 파탄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군역 즉 양역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양역의 폐단은 군제 편성상의 모순에서도 초래되었다. 조선 후기의 軍門에서는 直定과 自募를 통해서 軍丁을 확보해 나가는 초법적 조처가 시행되고 있었다. 직정이란 정상적인 행정체계를 거치지 않고 각 군문들이 직접 군보를 지정하여 자신의 군문에 예속시키는 것을 말하며, 자모란 正軍 자신이 스스로 보인을 확보하면 해당 군영에서 그 보인의 군역세를 처리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각 군영들이 경쟁적으로 직정과 자모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良丁의 부족이 심각한 현상으로 제기되었고, 양정들은 一身疊役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감영이나 병영·수영 등 뿐만 아니라 중앙의 각 사나 향교·서원 등에서도 자체의 비용조달을 명분으로 양역보다는 적은 비용의 유리한 조건(歇役)을 내세워 양정을 모집하는 사모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정의 부족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闕額의 보충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한 黃口簽丁과 白骨徵布가 만연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역 징수상에서도 총액제가 등장했다.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에 일정한 군액을 배정하면 지방관은 그 군액에 해당하는 군보를 확보하여 번상시키거나 포를 상납해야 했다. 이를 軍摠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지방관들은 이 군보의 확보를 위해서 황구와 백골에 대한 첨정 징포를 계속해야 했다. 이 때문에 양역의 폐단은 더욱 심화되어 갔고 이로 말미암아 양인들의 저항이 야기되었다. 양역의 폐단은 양인의 생활과 조선의 군제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양역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변통론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제시되었던 양역변통론은 대변통론과 소변통론으로 대별된다. 소변통론은 양역 폐단의 원인이 양정의 부족과 양역제의 불합리한 운영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고 이의 해소를 시도하는 개혁의 방안이었다. 이 소변통론에서는 우선 피역자의 색출, 사모속의 금지, 落講 校生의 군역 편입, 군사 정원의 감액, 군문의 혁파, 신역 부담액의 감소(減疋論) 등 여러 종류의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변통론은 양인에게만 군역이 부과되는 身分兵役制的 특성을 가지고 있던 양역제 자체를 철폐하자는 논리였다. 대변통론은 양역의 폐단이 양정 부족에서 초래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역 부담의 불균과 불공정에 양정 부족의 원인이 있다고 파악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軍役不應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양반사족층에 대한 수포의 방안을 마련해 보고자 했다. 그 결과로 戶布論·口錢論 등이 제시되었다. 이 견해는 군역 징수의 대상을 신분을 기준으로 한 양정이 아닌 家戶나 人口 또는 田結을 단위로 변경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兩班不役論이 의연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및 18세기 초의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양역부담자가 급속히 감소되었고, 피역저항의 형식으로 양인농민들의 토지 이탈이 강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양반에게 군역을 직접 부담시키지 않고 양역의 폐단을 해소시켜야 했다. 그 결과 영조 26년(1750)에 단행된 균역법은 양역 폐단의 극복 방안으로 소변통론의 일종인 減疋論이 제시되었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인의 군역 부담은 대략 연간 1인당 2疋役에서 1疋役으로 조정되기에 이르렀다.

 균역법의 시행 결과 군포 수취가 1필로 감소되었다. 따라서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군사 유지비용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한 방안들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군사 정원을 감축 조정하여 군사 유지비를 절감시키는 방안들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인두세적 성격을 지닌 병역세를 점차 토지세로 전환시켜 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균역법의 체제하에서는 免稅結이나 復戶結까지를 포함하여 田土를 기준으로 해서 經常稅의 일종인 結作米가 부과되었다. 결작미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6도의 전결에 米 2두씩 부과된 것이었다. 또한 왕실의 수입으로 되어 있던 魚鹽船稅를 국가재정에 귀속시켰고, 隱餘結에 대한 과세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納粟補官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향상시킨 이들에게는 宣撫軍官布를 부과했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민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조세 감면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상은 신분제에 바탕을 둔 부세체제를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신분병역세제의 성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던 균역법은 유명무실화되어 갔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어 온 양역의 모순은 ‘三政紊亂’의 일부가 되어 19세기 민란에서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신분병역제를 무너뜨린 호포제의 시행은 19세기의 60년대 대원군 집정기를 기다려야 했다.

 조선 후기 삼정문란에 관한 문제제기는 군정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전정이나 환곡 분야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삼정 가운데 전통적으로 중요시되어 오던 분야는 전정이었다. 전정은 조선 후기 당시 토지에 부과되는 각종 잡다한 항목의 조세를 관리하는 문제를 뜻했다. 당시의 토지세는 國納, 船給, 邑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납은 결당 4두 씩 부과되던 전세를 비롯하여 대동미, 삼수미, 결작 등의 경상세를 말한다. 선급은 국납에 따르는 각종의 부가세를 뜻하며, 읍징은 해당 고을의 잡다한 용도에 쓰이는 부가세를 일컬었다. 이 가운데 각종의 부가세가 수십 종류에 이르렀고, 부가세의 종류와 세액이 증가하여 전정의 문란은 가속화되어 갔다. 또한 양전이 철저히 시행되지 못함에 따라서 토지에 대한 수세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고, 전결세의 수취과정에서도 각종의 폐단이 자행되고 있었다.

 한편, 환곡제의 운영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원래 환곡은 진휼책의 하나로 춘궁기인 봄철에 관청에서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했다가 가을철에 元穀과 함께 이자인 耗穀을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방식이었다. 이 때 모곡은 원곡의 1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환곡의 진휼 기능이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당시 정부의 기관들은 이른바 經費自辦의 원칙에 따라 각 관청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에서는 다투어 모곡을 확보하려 했고 이를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각종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중엽에 이르러서 환곡은 삼정 가운데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정부에 대한 민의 저항이 강화되어 갔다.

 또한 국가재정 운영 방식의 변화와 삼정의 문란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都結의 출현에 관한 문제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총액제에 의한 재정 운영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총액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의 부세 운영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파악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面·里 단위로 부세 단위가 상향조정되었고 국가 공권력이 미치는 범위도 면·리로 축소되었다. 그 후 共同納의 관행은 점차 넓어져 갔다. 즉 人丁稅는 공노비의 庚申摠(영조 16년, 1740) 및 양역의 庚午摠(영조 26년, 1750)에 의해서 정총제로 전환되었고, 전세는 비총제로, 환곡은 환총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모든 부세가 공동납 형태로 징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전결세 수취의 변형된 형태의 하나로서 19세기 초반에 도결이 등장했다. 도결의 등장은 당시의 조세 수취방법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이른바 八結作夫制에 의해서 8結을 묶어 하나의 戶首를 내고, 그 호수가 조세수납의 책임을 졌으며, 조세 수납과정에서 中間 代納을 통해 많은 이익을 私取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결은 官이 호수의 역할까지도 직접 담당함으로써 조세수취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출현했다. 즉 도결은 수령이 호수를 통하지 않고 조세 부담자들에게서 직접 세를 거두어들이는 전결세 수취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 도결은 현물납이 아닌 화폐납을 원칙으로 했다. 도결의 시행과정에서 지방관은 鄕會와 협의하여 매결당 결가를 정하여 화폐로 수납하고, 이 화폐를 해당 색리에게 분급하여 현물(米穀)을 사서 바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화폐납을 중앙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지방의 경우에는 방납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고, 방납업자들에 의해서 서울에 대한 米穀의 공급이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도결은 당시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전개된 것이었다.

 이 도결의 관행은 점차 중세적 부세수취구조가 토지를 매개로 일원화되는 과정에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전결세뿐만 아니라 부족해진 군역세나 포탈된 환곡과 각종의 부가세들이 救弊라는 명목으로 금납화되어 도결이란 명칭 아래 토지소유자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기에 이르렀다. 도결은 전결세를 비롯하여 군역이나 환곡·잡역 등이 토지를 매개로 하여 일괄적으로 처리됨으로써 납세자와 징수자에게 편리한 측면도 있었다. 또한 도결은 민에게 조세 부담상의 편리를 보장해 주었고, 官에서는 부세의 대상을 확정하고 중간수탈의 이익을 회수하여 지방 재정의 부족분을 채우게 되는 이점이 있었다. 도결은 당시 총액제로 운영되던 부세량의 부족액을 확실히 채울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수령들에 의해서 선호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결의 시행은 확대되어 갔다.

 도결이 형성되던 시기의 결가는 결당 8량 정도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으므로 농민들의 입장에서도 이를 반대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도결이 실시된지 얼마 후 결가가 급등하게 되어 20여 냥 내지는 그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결의 실시는 농민의 부담을 급속히 증가시켜 준 셈이 되었다. 동시에 도결로 말미암아 일종의 조세 청부업에 종사하던 기존의 호수나 방납 담당자들은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반 지주들도 자신들이 누리던 기존 특권의 일부를 침해당했으니, 토지에 군포의 포흠이 부과될 경우 양역을 면제받던 양반층들은 반상의 구별을 요구하면서 저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결로 인한 피해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도결에 대한 반대가 강화되어 갔다. 19세기 중엽 광범하게 전개된 농민저항운동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요컨대,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삼정이 문란해지고, 도결과 같은 새로운 조세 수취방법의 등장으로 인해서 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 해결방안은 미쳐 제시되지 못하고 있었다.

 18∼19세기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17세기에 재편된 동아시아적 질서를 기초로 하여 조선의 대외관계가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가 드러내고 있는 특성은 대륙에서의 明淸交替, 일본에서의 德川幕府 등장, 그리고 동아시아에 대해 구미 여러 나라들이 중상주의적 접근을 강화해 오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의 대외관계는 對淸 관계, 對日 관계 및 서양과의 관계가 검토되어야 한다.

 17세기 이후에 조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쳐 주고 있던 국가는 중국의 청조였다. 조선은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명청 교체의 과정에서 인조 14년(1636) 丙子胡亂을 겪었고, 대명관계의 단절을 강요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과 청 사이에는 청측이 주도하는 사대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 사이에는 군사적으로는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청은 조선에 대해서 상호간에 설정된 군신관계의 틀 안에서 청 중심의 천하 질서에 편입되기를 요구했고, 助兵 등의 정치적 요구를 계속했다. 청이 조선에 대해서 조병을 요구했던 사례는 청 崇德 5년(1640;인조 18년), 청이 錦州衛를 공략할 때와 順治 11년(1654;효종 5년) 羅禪征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와서 청은 만주를 청조의 발상지로 중시하는 정책을 수행하면서 조선과의 국경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康熙 52년(1712;숙종 38년) 白頭山에 定界碑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 정계비의 건립도 청의 주도에 의한 독단적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과 청과의 사이에 존재하던 불평등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부터 歲幣나 貢物의 형식으로 경제적인 수탈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조선의 경제적 부담은 1644년 청의 入關을 전후하여 감면되기도 했으나, 조선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과중한 대청 外交費를 부담해야 했다. 또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청을 夷狄視하여 배격하며, 중화문화를 유일하게 지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조선 자신의 문화적 사명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용후생적 차원에서 청조의 문화를 배우고 수용하고자 하는 북학의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 때를 전후하여 조선의 學人들은 청조에 이입된 구라파의 문화를 뜻하는 淸歐文化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청조를 통해 西學과 같은 새로운 경향의 학문을 수용했고, 조청관계에서는 문화분야가 중요성을 더해 갔다. 요컨대 조청관계는 조선왕조의 대외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청은 조선에 대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국제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켜 나가던 과정에서 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한편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17세기 이래로 새롭게 전개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일본에 대해서 羈縻와 對等의 외교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 주도의 독자적인 통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여지없이 파괴되었지만, 인접한 양국간의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후 광해군 원년(1609) 일본과 己酉約條를 체결했고, 이로써 일본과의 통교 무역에 관한 틀이 재정비되어 갔다. 이 기유약조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과 맺었던 약조들을 집약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 약조를 통해서 대마도를 조선의 기미권 안에 재편입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약조에서 대마도가 요청해 올 교역관계의 확대 요구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기유약조는 대마도를 통한 일본 막부와의 간접 통교 루트를 설정함으로써 조선 후기 조일관계의 기본골격을 마련해 주었다.

 기유약조의 체결을 전후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발생한 被虜人 송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일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중앙정부는 부산의 왜관을 통해 대마도와의 교역을 재개했다. 이 교역은 근대적 의미의 무역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서 일본의 歲遣船使가 가져오는 진상예물에 대해 조선이 상국의 입장에서 회사품을 내리는 형식이었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도 정부 차원에서 問慰行이라는 외교사절을 파견했다.

 한편, 조선은 기유약조를 전후하여 외교사행을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이로써 朝鮮國王과 日本國大君이라는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외교관계가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일본 幕府 將軍의 襲職 축하 등을 명분으로 하여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 바 있었다. 이 통신사의 파견은 일본 막부 장군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기회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르러 막부에서는 통신사행의 접대비 절감문제가 제기되고, 조선에 대한 외교적 인식이 변경되어 통신사행이 대마도에만 파견되는 易地交聘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명치유신 이후 대폭 전환되어 갔다. 명치정부는 대마번을 통한 간접 통교 방식을 단절시키고 조선과의 직접 통교를 추진하여 성취했다.

 한편 17세기 이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어 갔다. 그리고 조선연해에서는 중상주의적 서양 선박들이 출현했고, 서양인 표착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현상은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빈번해졌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식민주의적 세력들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시켜 나간 여파로 이양선으로 불리던 서양 선박들이 조선연해에 출몰하고 있었다. 또한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의 성행과 관련하여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직접 입국하여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으로 인해서 조선은 서양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인식했다. 이 일련의 사실들은 조선과 서양이 새로운 국제 관계를 수립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 및 일본과 맺고 있던 전통적인 국제관계만을 고수하고자 했고, 변화해 가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병인양요(1866)나 신미양요(1871)의 경우처럼 프랑스 및 미국과 같은 구미열강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을 향한 제국주의적 침략은 점차 강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趙 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