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육상교통의 발달과 장시의 증가
가. 육상교통의 발달
18세기 이후 상품유통의 발전에 따라 육상교통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민간뿐만 아니라 관료·왕에 이르기까지 도로 교통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도로에 대한 관심은 幹線道路網의 확대로 이어졌다. 영조 46년(1770)에 申景濬에 의해 쓰여진≪道路攷≫에 의하면 전국을 연결하는 大路(간선도로)는 서울-義州路, 서울-慶興 西水羅路, 서울-東萊路, 서울-濟州路, 서울-平海路, 서울-江華路의 6대로였지만, 19세기 전반 편찬된≪林園經濟志≫에는 서울에서 太白山(奉化)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되었으며, 19세기 중엽에는 9대로, 그 후기에는 10대로가 되었다. 이것은 간선도로가 아니었던 別路나 支路들이 이용율의 증가에 따라 간선도로로 승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선도로의 확대는 주로 행정중심지나 군사요충지를 연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상품유통권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간선도로망의 확대와 더불어 실제 기존 도로에 대한 정비와 새로운 도로의 개설이 뒤따랐다. 숙종 30년(1704)에는 서울-강화로가 정비되었고, 정조 연간에는 수원성의 축성으로 수원과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거나 더욱 확장되어, 이 길은 新作路로 불리웠다.
한편 서울과 外方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도 새로 뚫리고 있었다. 18세기 전반까지 서울에서 함경도지역으로 가는 통로는 鐵嶺을 통과하는 길이 주된 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는 평강을 지나는 三防間路가 개척되었다. 삼방간로가 개설된 이후 다시 평강의 雪雲嶺을 통과하는 길도 새로 뚫려, 19세기초 상인들이 함경도지방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는 철령 한 길밖에 없다가 세 가지로 늘어나게 되었다.
서울에서 영남지역으로 통하는 길도 새롭게 개척되고 있었다. 嶺南路에는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鳥嶺과 竹嶺 외에도 사잇길로서 고갯길들이 개척되었다.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은 尙州와 西原(淸州)지방으로 통하는 고갯길과 聞慶과 槐山 사이의 고갯길이었다. 이 길은 모두 경상도와 충청도지방을 연결하는 지름길이었으므로, 상인들은 모두 이 두 길을 이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울에서 關北지역으로 통하는 길, 서울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 외에도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를 잇는 교통로가 개설되었고, 함경도 내의 六鎭지역의 교통로도 대거 확대되었다. 이 때 생겨난 도로들은 이전 시기와 달리 모두가 상인들이 상품유통을 빠르게 하기 위해 개척한 捷路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전국의 모든 지역은 도로교통의 발달로 그전에 비해 보다 빠르게 연결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장시의 발달을 촉진한 중요한 요소였다.0960)
0960) | 高東煥,<조선후기 交通發達과 全國的 市場圈의 형성>(≪문화역사지리≫8,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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