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화폐경제의 확립과 영조대의 동전유통정책
18세기에 접어들어 동전유통과 그 가치법칙의 작용 범주는 더욱 확대되었다. “근래 각양 물종은 동전이 아니면 매매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米木이 있더라도 반드시 동전으로 바꾼 후에야 거래할 수 있다”1039)고 하는 바와 같이, 18세기 전반 동전은 추포유통을 구축하고 일반적 교환수단·지불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증대시켜 나갔다. 일반 거래는 물론 각종 雇價가 대부분 동전으로 지불되었고, 국가재정도 일부 화폐화되었다. 또 화폐유통의 발달은 상호 인과적으로 상품생산과 교환관계를 촉진시켜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달하였다. 서울에서는 亂廛과 사상의 활동이 특권시전상업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고 지방 장시의 5일장 체계가 더욱 확대되는 가운데 서울과 장시망을 연결하는 水上·陸上의 상품시장권도 형성되었다.1040)
이와 같이 화폐경제가 사회경제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함에 따라 그것은 농촌사회의 분해를 촉진하고 조선봉건사회의 체제적 변동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화폐유통의 발달은 농민층과 화폐경제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농민층은 화폐를 얻기 위한 상품생산과 교환관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일부 力農層이나 지주층에게는 상업적 농업을 통한 이윤 축적의 좋은 계기가 되었지만, 경영조건이 열악한 많은 농민층에게는 오히려 몰락의 계기로 작용하였다.1041) 즉 화폐경제가 확립되면서 농민층은 농업생산 재료나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또 조세납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전 마련을 위한 교환시장에 편입되었다. 이 때 농민층은 시장가격의 계절적·지역적 변동에 의해 농업생산물은 싸게 팔고 필요한 물건은 비싸게 사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실태였고, 많은 경우 자신의 필요생산물까지 값싸게 팔아야 하는 이른바「窮迫販賣」에 의해 파산하고 몰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립은 농민층을 전반적으로 高利貸수탈로 몰아 넣었다. 화폐유통은 양반귀족·봉건지주들의 재부축적욕과 사치생활을 유인하여 이들은 동전을 집적하고 이를 고리대로 활용하였다. 고리대는 오래된 봉건지배층의 농민수탈 방법이지만 특히 이 시기에는 그것이 화폐유통을 계기로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수탈성 또한 극히 가혹하였다. 양반지주나 토호들은 필요한 동전을 마련하지 못한 농민이나 식량이 궁한 농민에게 춘궁기에 연 50∼100%의 이자로 동전을 빌려주고 곡가가 하락하는 추수기에 동전을 곡식으로 환산하여 원금과 이자를 반환하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원금의 5, 6배나 되는 이익을 보았고, 이를 갚지 못한 농민층은 결국 토지를 빼앗기고 몰락하였다.1042) 이를 흔히「甲利」라고 하는데, 이는 화폐를 이용한 민간고리대 곧 私債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화폐를 이용한 고리대는 민간고리대에만 한정되지 않고 또한 봉건국가 차원에서도 광범히 전개되었다. 이른바「公債」로서, 당시 중앙 및 지방의 관청에서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이나 축재수단으로서 공공연하게 화폐를 퇴장시키고 이를 고리대로 사용하였다.1043)
18세기초부터 대두한「錢荒」은 이상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동반하며 정착한 초기 동전유통의 성과와 한계를 반영한 현상이었다. 전황은 시중에 동전유통량이 부족하여 화폐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는데,1044) 이 시기 전황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었다. 우선 초기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농촌사회에 이르기까지 동전의 유통범위가 광범하게 확대되고 있는데도 봉건정부가 숙종 23년(1697) 이후 장기간 동전을 발행하지 않아 통화량의 부족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또한 양반지주·부상·토호는 물론 봉건관부까지 다량의 동전을 退藏시켜 이를 고리대자본으로 활용함으로써 통화량 부족을 부추겼다. 對淸貿易의 발달에 따르는 지속적인 은화의 중국유출과 그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는 私商大賈의 화폐장악 역시 전황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요컨대 18세기초의 전황은 동전을 폐지하거나 더 발행하지도 않는 봉건정부의 현상유지적 화폐정책이 지속되는 가운데 상품생산·시장권의 성장에 기초한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동전이 봉건관부·양반관료·지주·부상들에게 집중됨으로써 야기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전황으로부터 집중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계층은 직접생산자층과 자본력이 열악한 소상인층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농민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매년 수십만 냥에서 백만 냥을 헤아릴 만큼 봉건관부에 유입되는 각종 조세 金納量도 급증하였기 때문에, 화폐구득을 위해 농민층이 궁박판매와 고리대수탈에 편입되는 것은 필지의 추세였다. 당시 실학자 鄭尙驥가 “근년에 이르러 동전이 매우 귀해지고 물건이 천해지니 농민과 상인이 함께 곤란해져 능히 견디지 못한다”1045)고 한 말은 이러한 전황의 본질을 잘 지적한 것이었다.
전황에 의한 폐해가 영조 즉위 후 더욱 심화되자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처음 논의의 방향은 주로 동전유통을 억제하고 공·사채와 대청무역을 규제하며 장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그것은 동전유통이 고리대와 사치풍조를 조장하여「農本」을 중시하는 주자학적 가치관을 동요시키고 농민층 몰락을 야기하자 동전유통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인데, 영조 자신이 이러한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영조 3년(1727)·5년·10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조세금납제를 폐지하는「純木令」을 반포하여 포납제로의 복귀를 시도하였고, 楮貨나 布貨를 다시 법화로 통용시키고자 하였다. 순목령은 곧 화폐유통을 국가재정과 차단시킴으로써 농민의 동전구득난을 해소하고 동전가치를 떨어뜨려 동전퇴장을 해결해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었다.1046)
그러나 동전이 이미 일반적 교환수단·가치척도로 확립된 당시 유통경제의 성격상 순목령은 오히려 농민층에게 화폐구득과 면포구득이라는 이중의 부담만 가중시켰다. 또한 시전·공인 등 봉건적 유통기구와 직결되어 있는 국가재정을 면포유통구조로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결국 봉건정부의 화폐정책은 동전을 발행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그리하여 영조 7년 9월 호조와 진휼청에서 30년 만에 주전을 재개한 이래, 영조 18년 중앙과 지방에서 50만 냥을, 영조 25년 중앙 3군영에서 60여만 냥을 주조하는 등 영조연간 10여 차례 동전발행이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주전사업을 중앙관청으로 집중시키고<鑄錢節目>을 작성하는 등 주전관리체계에 대한 감독과 통제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는 일본 동의 수입 부진으로 인한 동전원료난과 관련하여 동전 1문의 무게를 2錢 5分에서 1전 2푼으로 줄이게 되었고, 일부 논자들은 當五錢·當十錢·當百錢 등 고액전의 유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047)
주전사업의 재개로 비등하였던 전황 현상은 약간 진정되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전황은 화폐경제의 발달과 봉건적 유통경제의 해체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동전발행의 증대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봉건정부의 주전사업은 단지 전황 대책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동전 무게를 감량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주전이익을 통해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는 성격도 강하였다. 따라서 전황은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달하고 봉건적 경제구조의 해체가 가속화될수록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1039) | ≪備邊司謄錄≫98책, 영조 11년 12월 13일. 물물교환의 경우에도 화폐가치로 표시되는 상품가격에 따라 거래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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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 金泳鎬,<朝鮮後期에 있어서의 都市商業의 새로운 展開>(≪韓國史硏究≫2, 1968). 韓相權,<18세기말∼19세기초의 場市發達에 대한 基礎硏究>(≪韓國史論≫7, 서울大, 1981). 李炳天,<朝鮮後期 商品流通과 旅客主人>(≪經濟史學≫6, 1983). 高東煥, 앞의 책. |
1041) | 金容燮,≪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一潮閣, 1990) 제3장. |
1042) | 이 시기 고리대에 대해서는 崔虎鎭,≪近代朝鮮經濟史≫(慶應書房, 1942) 後篇;元裕漢, 앞의 책, 171∼173쪽 참조. |
1043) | 吳永敎,<朝鮮後期 地方官廳 財政과 殖利活動>(≪學林≫8, 延世大, 1986). |
1044) | 장국종,<18세기 동화의 주조와 전황문제>(≪역사과학≫1963년 1호). 元裕漢,<朝鮮後期 貨幣流通에 대한 一考察>(≪韓國史硏究≫7, 1972). 方基中, 앞의 글. ―――,<19세기 前半 租稅收取構造의 特質과 基盤>(≪國史館論叢≫17, 國史編纂委員會, 1990) 참조. |
1045) | 鄭尙驥,≪農圃問答≫祛弊瘼. |
1046) | 方基中, 앞의 글(1984), 169∼175쪽. |
1047) | 元裕漢, 앞의 책, 98∼106·113∼12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