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와 사회적 모순의 심화
이와 같이 19세기 초·중엽에는 정액 조세금납에 의한 화폐수탈이 진행되는 한편 금납화의 한계에 의해 지방 차원의 법외적 화폐수탈이 모든 세목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치로서 파악하기 어려운 엄청난 양의 동전이 매해 조세로서 수취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화폐수탈은 19세기 유통경제적 조건, 봉건적 재정구조의 한계, 그리고 이 시기 심화되고 있는 총액제·공동책납제 수취운영의 모순이 서로 결부되는 가운데 확립되었다.1114) 수령을 책임자로 하는 지방징세기구·조세청부업자가 중앙권력과 함께 화폐수탈의 주체로 전면화되었고, 상품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신흥사상의 성장이 화폐수탈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화폐수탈은 그 분쟁이 늘「종시가」작전가 문제에 집중되고 있듯이 물가상승을 배경으로 실현되었고, 많은 경우 경제외적 강제성을 동반한 고리대 수탈로서 전개되었다.1115)
삼정의 문란은 이러한 양상의 구조적 확립을 의미하였다. 도결의 발달에서 여실히 나타나듯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총액제·공동책납제의 모순이 한층 심화되면서 화폐수탈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로부터 집중적으로 몰락하고 있었던 것은 소농민·빈농이었다. 도결가의 증대가 지주의 부담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대개 作人에게 전가되어 화폐수탈을 당하는 것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요호부민층 역시 파산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른바「貧富俱困」현상이었다.1116) 결가의 상승, 환곡작전, 고리대수탈은 이들의 지주·부농경영으로부터 형성되는 잉여를 파괴하였다. 화폐수탈 증대에 대한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저항은 항세운동으로 나타났고, 급기야 농민항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화폐수탈의 제반 구조적 특질과 관련하여 일차적으로「都結革罷運動」으로 나타났다.
한편 화폐수탈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중앙 재정구조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봉건국가권력이 화폐수탈의 독점권을 상실하는 데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화폐유통의 주도권은 향촌의 징세기구와 富商들, 그리고 이들 배후에 있는 중앙 權門勢家에게 이전되고 있었고, 국가의 화폐통제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1117) 더욱이 19세기 이후 봉건정부의 지출경비는 늘어난 반면 수입은 줄어「量入爲出」의 재정원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철종연간 동전발행이 급증하였던 것도 이러한 재정구조와 화폐경제 상황에 대한 미봉책이었다. 정부의 화폐통제력 약화와 재정구조의 악화는 나아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유통기구를 전반적으로 해체시키고 있었다. 통공정책 이후 市·貢人의 독점적 특권상실은 필연적 추세였는데, 정부가 이들에 대한 국역 부담을 증대시켜 재정보전을 꾀하였기 때문에 봉건적 유통기구의 해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반해 화폐수탈을 주도하면서 자본을 축적해온 사상은 도고활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권력과의 유착관계를 강화하고 공인권 등 각종 이권에 참여하면서 상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19세기 이후 전개된 이러한 화폐수탈의 양상과 구조는 조세를 통해 토지 및 인민지배를 관철한다는 봉건적 수취원리의 해체과정, 봉건국가권력이 화폐수탈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봉건적 재정구조의 해체과정을 의미하였다. 현상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수탈량의 폭력적 증대를 동반하였지만 그것은 봉건국가권력의 해체과정을 조세제도·재정구조의 측면에서 반영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화폐수탈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조세제도 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그리고 이는 개항 후 근대국가수립운동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조세제도·재정구조의 근대적 전환과정의 내적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方基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