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철종 2년(1851) 문화에 사는 柳興廉, 蔡喜載와 영남의 金漢斗(후에 金守禎으로 改名) 등이 소현세자의 후손으로 황해도 풍천 椒島에 유배 중이던 李明燮을 추대하는 변란을 모의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다.704) 이들은 구월산성 호위군을 포섭하고, 안악, 문화를 점령한 후 황해도 감영을 점령하고 평양에 모여 있는 群黨들과 합세하여 서울로 직향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거사계획이 시작된 것은 헌종 12년(1846) 이전이었다. 유흥렴이 인근 장수산에서 삼밭을 경영하며, 초당을 짓고 살던 奇東洽(奇德佑)을 찾아가서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것이 헌종 12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축년(1853)에 청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로 건너올 것이니 충의로 결합하여 물리치자는 말로 동모자를 포섭하였다. 또 주모자인 유흥렴은 자신이 병자호란 때 전사한 충신의 후손이며 평소에 北伐을 꿈꾸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남해 가운데에 田橫島라는 섬이 있으며, 여기에는 명나라 말에 남경에 살던 士族들이 많이 망명해 있으므로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들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이들은 병사동원과 자금마련을 위해 구월산 산성별장으로 있던 崔致珏과 송도의 부상 白大顯, 林致守와 연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또한 石島·大淸島 등지에서 고기잡이와 소금굽기를 하거나 해상에서 곡물을 실은 배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705)
황해, 경상, 평안, 강원도의 인물로 구성된 주도세력은 주로 개별적인 인맥이나 인척을 끌어들여 세력을 규합했다. 주모자 유흥렴은 오래 전부터 황해도와 평안도, 멀리는 경상도, 충청도까지 편행하며 동조세력을 모았다. 또 동모자 가운데는 錦屛島에 사는 鄭道和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데 ‘海道에서 鄭眞人이 나온다’는 감결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사에 성공을 하면 각기 차지할 三公, 六卿을 배정해 두고 있었고, “병자호란 때의 원수를 갚고 태조의 창업을 이을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기도 했다.706) 결국 동모자 高成旭의 고발로 탄로가 나 채희재 등 50여 명이 체포됨으로써 거사계획은 불발로 끝났으나, 2년 뒤 도망간 餘黨이 서울에서 두번째의 변란을 모의하였다.
철종 4년(1853) 서울에서 시도된 두번째의 모의는 西水羅로 도주한 유흥렴과 서울로 도주하였다가 자칭 借力士이자 약장수인 崔鳳周라는 謀士를 만난 김수정(김한두)이 단천에 유배중이던 왕족 李明燮의 동생 李明赫을 내세워 서북지방의 別部料軍과 삼남세력을 규합하여 거사하려던 계획이었다. 이들은 구월산 일대에서의 거사가 실패한 것은 첫째, 한양에서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고, 둘째, 거사에 동원한 주력부대 역시 한양의 중앙관군이 아니라 구월산성의 호위군이었고, 셋째, 시기가 미성숙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이들이 서울에서 거사를 계획한 것은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김수정은 헌종 10년(1844)에 향시에 장원급제한 한 바 있는 자로 철종 2년의 거사가 실패한 후 이듬해에는 일월산 일대에서 또 한 차례의 변란을 계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가 최봉주에게 “재작년 구월산 적도와 작년 일월산 적도는 경솔하게 거사를 모의하려다 스스로 일을 그르쳤다”고 한데서 드러난다.707) 철종 3년의 거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그 해 7월 영양에서 정우룡이 울릉도의 적도들과 연결하여 기도한 작변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708)
주모자의 한 사람인 최봉주는 이전부터 함흥, 동래 등지를 편력하며 동지들을 규합해 오던 자이다. 그는 1천 근을 들고도 하루 5백리를 달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민생이 곤궁한 것을 보고 濟世의 뜻을 펴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世將不久之說’ 혹은 ‘彗星之災’ 등의 참언과 영남과 함경지방에 산재해 있는 차력사들이 합세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는 한편, 거사에 성공하면 이명혁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김수정은 병조판서, 최봉주는 三道統制使, 그 외의 동조자에게도 관직을 분배하겠다는 말로 동지들을 규합했다.709) 또 자금마련을 위해 前軍校이자 富商인 申錫範을 끌어들였다. 거사시에는 서북지방의 별부료군을 동원하여 종로에 방화한 후 혼란을 틈타 궁궐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금마련을 위해 동모자로 끌어들였던 신석범의 고발로 실패하여 김수정은 참수당하고, 최봉주는 영암 추자도로 정배되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고종 14년(1877)에 최봉주는 유배된 몸으로 재차 변란을 기도했다. 유배지인 추자도에서 楸王으로 불릴 정도로 주민들의 추앙을 받던 최봉주는 고종 10년에 전라도 능주로 移配되었다. 거기서 최봉주는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변란을 기도했다 잡혀 유배된 張赫晋·李士允을 만나 호남, 영남 세력을 끌어들여 변란을 기도한 것이다.
장혁진은 봉화 사람, 이사원은 칠곡 사람으로 고종 9년 안동에서 그 곳의 양반 柳興榮 등과 함께 안동·경주·진주·가산 등 4개처에서 동시에 거사하여 대구를 공격한다는 변란을 모의하다가 탄로가 나서 각각 신지도와 금갑도에 유배된 자들이었다. 장혁진은 “북방에 붉은 기운이 있으니 우리 나라에 불길하다. 금년 3월 8일은 壬辰日이므로 우리 나라에 액운이 있을 것이다”는 말로 민심을 동요시키는 한편, 화적을 가탁하거나 혹은 장례를 치른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이들은 십여년 전부터 군기, 군복 등을 갖추고 준비해왔다고 한다.710)
고종 10년에 능주로 유배지를 옮긴 최봉주는 고종 13년에 흥양으로 移配된 장혁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후 흥양에 거주하던 송지국 등과 만나 의기투합, 또 다시 거사를 계획한 것이다. 이들은 南朝鮮이 장차 우리 나라를 침공할 것이니 ‘利在弓弓’하다는 말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시키는 한편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우선 동래의 倭米를 移貿한다는 구실로 진도에서 船業을 하는 李奇執을 끌어들였다. 또 강진 병영 이서배들의 죄상을 적은 글로 그들을 협박하여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고, 순천에 사는 진사 李明七에게 돈 천 냥과 쌀 100석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먼저 추자도를 공격하여 군기를 차지한 다음 제주도를 점령, 그곳은 적당한 인물에게 맡기고 육지로 나가 기회를 노릴 계획이었다.711) 그러나 자금마련을 위해 끌어들인 이기집의 고발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해서와 영남지역의 변란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일련의 변란은 왕족을 추대한 점, 그리고 三公六卿이나 병조판서, 三道統制使 등을 미리 정해 놓은 데서 보이듯이 엽관적인 경향을 강하게 노출하고 있었다. 또 명나라 망명세력과 연합하여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는다거나 태조의 창업을 계승한다는 점 등에서 왕조체제 자체에 대해 부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華夷論的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서와 영남세력의 변란은 왕조의 전복을 기도하였으며, 그 뿌리가 20년 이상 이어졌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변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704) | ≪捕盜廳謄錄≫하, 신해 9월 海西獄事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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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 | ≪捕盜廳謄錄≫하, 신해 9월 海西獄事, 186∼187·195·198쪽. |
706) | ≪捕盜廳謄錄≫하, 신해 9월 海西獄事, 184·187쪽. |
707) | ≪推案及鞫案≫ 295책, 계축 逆賊守禎等獄案, 720쪽. ≪捕盜廳謄錄≫하, 계축 10월 申錫範告變, 242쪽. |
708) | 李離和, 앞의 글(1984) 참조. |
709) | ≪推案及鞫案≫295책, 계축 逆賊守禎等獄案, 695·705·718쪽. |
710) | ≪捕盜廳謄錄≫하, 정축 10월 湖南逆謀發告. ≪推案及鞫案≫309책, 임신 逆賊沈聃應等鞫案. 朴周大,≪羅巖隨錄≫(韓國史料叢書 27, 國史編纂委員會, 1980). |
711) | ≪捕盜廳謄錄≫하, 정축 10월 湖南逆謀告發, 589∼59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