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1) 화이사상과 중국의 조공제도
            • (2) 조선왕조와 청조:청한 종속관계
            •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 2) 서세 동점과 동아시아 제국
            • (1) 서방제국의 동방진출
            •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 (3) 일항 무역:전통적 동서무역 제도
            • (4) 화란과 영국의 진출
            • (5) 중영 무역의 변천:차에서 아편으로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1) 러시아의 통상요구
          • 2) 프랑스의 통상요구
          • 3) 영국의 통상요구
          • 4) 미국의 통상요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 2) 개화사상의 형성
          • 3) 1866년 개화사상 비조들의 활동
          • 4) 최초의 개화사상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1) 동학 창도의 배경
          • 2) 동학의 창도 과정
          • 3) 동학사상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1. 흥선대원군의 집권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1) 대원군의 인재등용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 4) 민란 대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 3) 병인양요와 대응책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 5) 대일 강경책
        •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 2) 강화도조약의 체결
            • (1) 운요호사건과 조선정부의 대응
            •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 3)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 (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 (2)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통상장정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 3. 조미조약의 체결
          •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2) 한·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4) 한·불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5) 기타 유럽국가들과의 조약체결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민란 대책

 1862년 전국적 규모로 전개된 임술민란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대원군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집권 초기 대원군은 향촌사회의 토호들의 사적 권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는 한편, 부세제도의 운영을 개선하여 향촌사회를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초기에 실시한 정책들은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이 치유되지 않는 한 소기의 성과를 볼 수 없었다. 지주제라는 기본적인 모순은 그대로 둔채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정책만으로는 이미 체제가 동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군 집정기에 농민항쟁은 민란과 변란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대원군 집권 10년 동안 군현을 단위로 한 민란은 그전 시기에 비하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 성격도 일률적이지 않았다.

 고종 원년(1864)에 발생한 황해도 豊川민란은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놓고 鄕任層과 서리·군교 층의 대립이 격화된데서 연유하였다. 향임세력은 부세운영의 권한을 획득하기 위해 기존에 그 권한을 쥐고 있던 서리·군교의 비리를 폭로하였다. 아울러 면·리 단위의 공동체적 결속력에 힘입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합법적인 呈訴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민란으로 전환되었다. 농민들은 관청을 습격하고 서리와 군교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부세운영 과정의 비리를 폭로한 세력이 바로 향임세력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사항이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에 비해 매우 구체적이었다. 이 민란은 鄕戰이 민란으로 전화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원군 정권은 이 민란의 원인을 향촌사회 유력자층이 수령의 통제를 벗어나 벌이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문제의 발단을 야기한 향임층과 서리·군교 출신의 당사자들이 모두 처벌받았다. 그에 반해 민란에 가담한 농민층에 대해서는 철종조의 대책에 비하면 훨씬 관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고종 5년(1868)에 발생한 柒原민란은 수령의 부정탐학에 연유한 것으로, 농민들이 면·리의 공동체적인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수령을 몰아낸 사건이었다. 이 민란은 이 시기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던 농민적 지식인층으로서 관에 의해 ‘營訴로 가산을 탕진하고 민폐에 가탁하여 수령의 정사를 헐뜯는 자’로 지목된 黃上基라는 사람이 주도하였다.

 칠원민란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은 풍천민란의 경우와는 달리 가혹한 처벌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1862 임술민란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는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동요하는 조짐을 보인 농민층을 강력한 탄압을 통해 통제해 보려는 대원군 정권의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현감에 대해서는 파직처분에 그쳤지만 항쟁에 가담한 황상기 등의 지도층은 모두 효수하였다.

 고종 6년에는 경상도 통영에서 민란이 발발하였다. 이 민란은 고성현의 戶籍監色이 통제영이 소재한 춘원면민의 호적을 엉터리로 작성하여 군전을 걷고자 하였다가 民所라는 농민자치기구의 주도하에 69개 동의 동민이 참여하여 문제의 호적감색을 타살한 사건이었다.

 통영민란의 보고에 접한 중앙정부는 호적감색을 살해하는데 앞장 선 자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정부는 固城縣과 統制營의 관할 구역간의 대립이 민란을 야기한 원인이었다고 파악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대원군 집권기 민란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폭력적 봉기로 발전하기 이전에 다양한 發通聚會, 정소운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단계의 운동은 대부분 향촌의 유력자들로서 향임이나 民所와 같은 자치기구의 지도적 인사들이었다.

 민란에서 군중을 동원하는데 활용된 것은 면·리 조직이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면·리 단위의 부세 공동납이 강화된 것과 연관된다. 원래 면·리 조직은 자치적인 기구였으나, 봉건정부에 의해 하나의 말단 행정기구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재지 중간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이러한 말단 지배기구들은 농민의 저항을 조직화하는 기구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이때 面任이나 里任들이 주도적으로 농민동원에 앞장섰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하지만 이 양상은 1862년 임술민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 바 있었다.

 민란이 폭력적인 봉기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주도층의 변화가 나타났다. 면임, 리임들의 지도성은 소멸되고 그 대신에 농민들의 정소를 대리해주던 농민적 지식인층이나 몰락양반들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즉 민란의 지도층은 평소에 정소운동을 통해 농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고 있던 인물들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칠원민란의 지도자 황상기가 營訴로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166)

 대원군 집정기의 민란은 그 이전 시기의 민란과 비교하여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민란의 전개과정이나 군중의 동원, 민란의 지도층 등의 측면에서 1862년 임술민란의 특성들이 대원군 집정기의 민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생산활동이나 그 결과인 잉여생산물의 분배에 직접적인 이해를 갖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부세수탈이나 수령·이서 층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발통 취회, 정소 등을 거쳐 봉기를 일으키는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의 민란은 고을 단위에 국한된 지역적 제한성을 보이고, 투쟁목표도 경제적 차원에 머무르며, 국가권력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나 이서층을 공격하고 읍권을 장악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원군 집정기의 농민항쟁에서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던 특징적인 것은 민란과는 구분되는 變亂이라는 형태가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변란은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의생, 훈도, 지관 등을 생업으로 삼아 각지를 편력하는 몰락양반 일부가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 불만을 품고 鄭鑑錄類의 이단사상을 이념적 무기로 삼아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변란은 특정 고을을 벗어나 지역 간에 연계된 조직에 기반하여 읍권을 장악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 자체를 전복, 장악하려는 동향을 드러내고 있었다.167)

 고종 6년(1869) 3월에 전라도 光陽亂은 19세기에 들어 허다하게 기도된 모의 가운데 처음으로 거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閔晦行은 20여년 전부터 異圖를 품고 영남과 호남을 편력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왔으며, 또한 1년 전에도 이미 전라도 장흥에서 변란을 기도한 바 있었던 자였다. 변란 참가자들은 계획적으로 사전에 봉기를 준비하였으며, 봉건왕조 자체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 사건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李弼濟의 亂이었다. 이필제는 고종 6년에서 9년에 걸쳐 충청도 진천, 경상도 진주·영해·문경 등 네 곳에서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하였다. 이중에서 영해 변란은 네 차례의 변란 시도 중에서 유일하게 거사에 성공한 사건이었다. 봉기 참가자들은 모두 무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투쟁양상이 격렬하였고, 관아습격을 끝낸 뒤 재빨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유격전술을 구사하는 등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崔鳳周·張赫晋에 의해 주도되던 변란세력은 일찍이 1850년대부터 조직적 결속을 시작하였고, 구월산과 일월산을 근거로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며, 영남·호남·황해도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비록 거사를 일으키는데는 실패하고 사전에 적발되었지만, 조선왕조 자체를 적대시하고 있으며, 그 뿌리가 2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변란세력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변란의 주도층은 세도정권이 성립함으로써 더욱 소외되고 그 몰락을 재촉받고 있던 몰락양반들이었다.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향촌사회를 떠나 각지를 편력하다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변란을 기도하게 된 것이다.

 변란의 이념적 배경은 주로 정감록이었다.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정감록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열강의 침공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정감록이 내포하고 있는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한 부정과 결합함으로써 변란의 이념이 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은 종래의 민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고을 단위의 고립성을 벗어났으며, 장기간에 걸쳐 몇몇 인물이나 세력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준비되었으며, 봉건왕조 자체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나타났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로는 반외세적인 구호도 이들에 의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농민항쟁을 전국적 차원의 농민전쟁으로 끌어올릴수 있는 조직적, 이념적 기반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세력은 농민대중과의 결합이 절연된 상태로 머물렀다. 변란주도층이 내건 왕조타도라는 구호는 농민들의 정서나 현실적인 요구와는 괴리가 컸다. 1862년 임술민란 당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지만 이서배가 아닌 수령을 죽인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던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반 농민들에게 왕조타도의 구호는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없는 불경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성은 변란의 이념적 무기가 된 정감록의 성격과 변란주도층이 갖고 있는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정감록에는 새로운 사회의 숙명적인 도래와 병란과 재해, 질병으로부터의 도피나 살아남는 방법만 언급될 뿐이었다. 새 사회의 도래 과정이나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변란 주도층은 특권을 상실하였다고는 하나 신분적 속성은 양반이고 지식인이었다. 특히 이들이 처해있는 생활 역시 직접적인 생산자의 그것과 달리 대체로 떠돌이 생활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정서와 일반 농민의 그것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1869년 광양란과 1871년의 이필제의 난에서는 민란과 변란이 결합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변란주도층이 농민대중과 결합하게 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비로소 가능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볼때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은 철종 말년의 지방분산적 임술민란에서 전국적 조직과 지도체계를 갖춘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해가는 과도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成大慶>

166)고동환,<대원군집권기 농민층 동향과 농민항쟁의 전개>(≪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167)배항섭,<19세기 ‘변란’의 추이와 성격>(≪1894년농민전쟁 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