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1. 청일전쟁과 1890년대의 동아시아
        • 2. 전쟁의 배경과 전개
          • 1) 조선에서의 청·일 대립
          • 2) 일본의 전쟁 준비와 갑오농민전쟁
        • 3. 전쟁의 경과
          • 1) 한반도에서의 전투와 황해 해전
          • 2) 중국에서의 전투
        • 4. 중재와 강화
          • 1) 열강의 중재
          • 2) 강화 외교
        • 5. 전쟁의 영향
          • 1)<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전후의 동아시아
          • 2) 전쟁의 영향과 의의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1. 청·일군의 조선 출병과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 2. 청일전쟁의 발발과 농민군의 정세인식
        • 3. 평양전투와 농민군의 동향
        • 4. 일본군의 청국 진입과 농민군의 재봉기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1) 제1차 개혁의 배경
            • (1)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청일전쟁 중 일본의 대한정책
          • 2) 제1차 개혁의 추진세력
          • 3) 제1차 개혁의 내용
            • (1) 대외관계의 개혁
            • (2) 동학 ‘비도’에 대한 대책
            • (3) 정치·행정제도의 개혁
            • (4)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 (5) 경제제도의 개혁
            • (6) 군사제도의 개혁
            • (7) 경찰제도의 개혁
            • (8) 사법제도의 개혁
            • (9) 사회제도의 개혁
            • (10) 교육제도의 개혁
        • 2. 제2차 개혁
          • 1) 제2차 개혁의 배경
            • (1) 항일운동의 탄압
            • (2) 내정개혁의 추진
          • 2) 제2차 개혁의 추진세력
          • 3) 제2차 개혁의 내용
            • (1)<홍범 14조>의 반포
            • (2) 대외관계의 개혁
            • (3) 정치제도의 개혁
            • (4)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 (5) 경제제도의 개혁
            • (6) 군사제도의 개혁
            • (7) 경찰제도의 개혁
            • (8) 사법제도의 개혁
            • (9) 사회제도의 개혁
            • (10) 교육제도의 개혁
            • (11) 기타 개혁
        • 3. 제3차 개혁
          • 1) 제3차 개혁의 배경
          • 2) 제3차 개혁의 추진세력
          • 3) 제3차 개혁의 내용
            • (1) 대외관계의 개혁
            • (2) 정치제도의 개혁
            • (3)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 (4) 경제제도의 개혁
            • (5) 군사제도의 개혁
            • (6) 경찰제도의 개혁
            • (7) 교육제도의 개혁
        • 4. 갑오경장의 역사적 의의
          • 1) 갑오경장의 실시상황
            • (1) 대외적 자주·독립의 선양 조치
            • (2) 정치제도
            • (3) 지방제도
            • (4) 경제제도
            • (5) 군사·경찰제도
            • (6) 사법제도
            • (7) 사회제도
            • (8) 교육제도
          • 2) 갑오경장의 역사적 자리매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한국은 1894∼1896년에 근세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정치·문화권을 이탈하여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됨으로써 비로소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획기적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외적 요인은 淸日戰爭이었고, 내적 계기는 甲午更張이었다.

청일전쟁은 1894∼1895년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국과 일본간에 벌어진 전쟁으로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중심의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그 대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각축하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간의 제국주의적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계기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대상으로 바뀌어 인적·물적으로 전례없는 수난을 당하였다.

한편 東學農民蜂起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1894∼1896년간 추진되었던 갑오경장은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혁파하여 근대적인 체제로 개편하려 했던 제도개혁운동이었다. 갑오경장은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진압하면서 조선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 일본의 비호하에 집권한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이 오랜 개화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추진한 획기적 개혁운동으로서 甲申政變과 獨立協會運動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동학농민군의 봉기였다.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5월 7일(양력)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長城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全州를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함락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壬午軍亂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청국의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를 통해 청국에 援兵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直隷總督 겸 北洋大臣 李鴻章은 6월 6일<天津條約>(1885)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直隷提督 葉志超와 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牙山으로 급파하였다.

일본정부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衆議院에서 내각 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는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소장 휘하의 混成旅團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內政改革’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군을 발동하면서 對淸전쟁을 도발하고자 획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계획에 따라 6월 6일 참모본부내에 大本營이 설치됨과 동시에 오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의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항을 출발, 9일 仁川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하였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울∼인천간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의 불법적인 군사동원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일본정부가 조선의 요청없이 파병한 데 항의하면서 즉각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의 주둔구실은 사라졌다. 따라서 陸戰隊와 함께 본국으로부터 서울에 귀임한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공사와 원세개는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조선으로부터의 군대철수를 원하지 않는 일본정부는 청국과의 開戰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청국에 대하여 공동철병안 대신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청국측이 일본측의 예상대로 이 제안을 거절함에 따라 일본은 청국에 대하여 ‘제1차 絶交書’를 보내는 동시에 조선의 내정개혁을 단독으로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이에 이홍장의 조정의뢰에 따라 러시아와 미국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7월 중순 일본정부는 청국에 ‘제2차 絶交書’를 보내는 한편 영국과<英日新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확보하고 개전을 서둘렀다. 본국정부로부터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정부에 대하여 청국의 對조선 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다음 이에 대한 회답을 접수하기 전, 즉 23일 새벽에 景福宮을 불법 점령하면서 쿠데타를 통해 興宣大院君과 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청일전쟁은 바로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발단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서울주둔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킨 다음 牙山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향해 진격하였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해군이 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高陞號가 일본해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이어서 29일에 벌어진 成歡전투에서 일본육군은 아산에 상륙하였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初戰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청국도 이에 응하여 같은 날 對日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정부는 열강의 간섭을 피하여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쟁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육군은 9월 15∼17일 平壤에 집결한 14,000명의 청국군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은 黃海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첩을 거둔 일본군은 곧 이어 중국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하였던 일본군 제1군은 鴨綠江을 건너 南滿洲로 진격하였고, 제2군은 遼東반도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旅順·大連을 점령한 다음 1895년 2월 2일에 山東반도 威海衛의 청국 북양함대 기지를 공략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청국은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한 강화회담을 서둘러 張蔭桓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廣島)會談에서 일본측은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기 위하여 청국 전권대신의 위임장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일본육군은 요동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제야 청국은 이홍장으로 전권대신을 교체하고 강화회담의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재개된 이토오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한 강화회의는 3월 24일 이홍장 저격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미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이후부터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淸日講和條約>, 즉<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

청·일간에 조인된<하관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貢獻·典禮 등은 장래 완전히 이를 폐지한다.

둘째, 청국은 요동반도·臺灣·澎湖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셋째, 청국은 戰費배상금으로 庫平銀 2억 냥(약 3억 엔)을 지불한다.

넷째, 청국은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향유하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함을 승인한다.

이로써 중국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대하여 행사해 왔던 종주권이 폐지되었다. 동시에 일본은<江華島條約>·<濟物浦條約>·<天津條約>등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조선에 대한 우월한 정치·군사·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하관조약>이 체결된 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와 프랑스 및 독일 등 3국이 일본정부에 대하여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는 요구, 즉 三國干涉을 하였다. 프랑스는 러·프동맹의 동반자 입장에서, 독일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쪽으로 돌리게 만듦으로써 중국분할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의도에서 각각 러시아의 삼국간섭 제의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결국 5월 10일 3국의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인정한 일본정부는 이 간섭에 굴복하여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그 대신 청국으로부터 보상금 3,000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일본은 러시아를 장래의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고 장래의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확장에 착수하였다. 그후 머지 않아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남부를, 영국은 威海衛와 그 주변지역을, 독일은 膠州灣 주변지역을 각각 租借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은 주로 청·일 양국간의 군사적 대결이었지만, 한반도내에서 일본군과 東學‘義兵’ 간에 朝日戰爭을 수반한 전쟁이기도 하다. 1894년 10월 중순 전라 및 충청도에서 全琫準·金開南·孫和中·孫秉熙 등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의병)이 궐기하여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쟁, 즉 조일전쟁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이 동학의병의 항일 군사활동은 당시 요동·산동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중대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일본의 大本營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공사의 서울 부임과 함께 동학의병을 무력으로 조기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조선관군의 지원을 받아 동학군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전을 벌였다. 우수한 장비와 훈련을 갖춘 일본군과 조선관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직면한 동학의병은 11월 18∼19일간의 목천 細城山전투와 12월 4∼7일간의 牛金峙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어서 전봉준과 김개남 등 그 지도자들이 12월 24일에 체포당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노우에공사가 지휘한 동학의병 토벌작전이야말로 일본이 청일전쟁 중 조선에 대해 벌인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진행과정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추구한 정책 목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하는 데에 필요한 전략적 시설을 확보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구축된 불평등조약체제를 한층 강화하면서 본원적 자본축적에 필요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略取하는 것 등이었다. 서울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에 의하여 처음 표출된 일본의 조선보호국화방안은 7월 23일의 경복궁점령 소식에 접한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외상의 立案으로 8월 17일 내각회의에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정책목표로 설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정부로 하여금 내정개혁, 즉 갑오경장을 실시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8월 20일에는 경부·경인간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함을 보증한다는 내용의<朝日暫定合同條款>을, 26일에는 전쟁 중 조선이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진퇴와 그 식량준비 등을 위하여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의<朝日盟約>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리고 15일과 26일에는 일본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정부내에 배치토록 하는 내용의 약속을 조선정부로부터 받아냈다. 이로써 일본정부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열강의 간섭과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당분간 이들 조약의 즉각적인 실현을 요구하거나 급격한 제도개혁의 강요를 삼가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그 당시 집권하였던 金弘集·兪吉濬 등 개화파 관료는 軍國機務處라는 국정개혁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8월 중순의 平壤大捷을 계기로 일본의 對朝鮮태도는 돌변하였다. 즉,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대해 적극간섭정책을 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명치유신의 원훈이자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를 조선주재公使로 발탁하여 서울에 파견한 것이다. 이노우에공사는 조선의 보호국화라는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高宗과 朴泳孝 중심으로 친일정부를 조성하고 조선정부내 일본인 고문관 배치, 조선정부 제도의 일본식 개혁, 조선정부와 일련의 신조약 체결, 그리고 500만 엔의 정치차관 공여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 내정개혁작업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노우에공사는 500만 엔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조선을 영국치하의 이집트와 같은 실질적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 차관은 1895년 2월 하순에야 일본정부에 의해 300만 엔으로 그 액수가 감소·책정되었다. 차관제공이 시간적으로 지체된 데다가 그 액수도 원래의 기대치보다 적었으며, 차관공여의 조건이 불리하였기 때문에 이 300만 엔 차관은 박영효 같은 조선측의 ‘애국적’ 집권자들의 반발을 초래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더욱이 청·일강화의 조짐이 분명해진 1895년 2월 중순부터 러시아의 對韓간섭 움직임이 나타나자 전쟁종결외교에서 요동반도의 할양에 치중하기로 결심한 무츠외상은 2월 27일 러시아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명실공히’ 보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사실상 전쟁기간 일본이 조선에서 추구하였던 보호국화라는 정책목표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삼국간섭 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이노우에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다. 서울 부임 후 미우라공사는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 확보조처로서 스기무라서기관 등과 閔妃(明成皇后)弑害를 음모하였다. 그 결과 1895년 10월 8일 미우라공사는 일본군·순사·장사 등을 동원,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비를 시해한 다음 불태워버리는 萬古에 유례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또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이 12월 30일 斷髮令을 선포·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삽시간에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갑오경장은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조선의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1894년 7월 27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추진하였던 획기적 제도개혁운동이었다. 갑오경장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제2차 동학농민봉기, 삼국간섭, 민비시해사건 등 여러 難境을 넘기면서 3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차 개혁기간(1894년 7월 27일∼12월 17일)에는 軍國機務處가 약 210건의 개혁안을 의결·실시하였다. 이 기간에 청일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정부로서는 조선정부의 능동적 협조가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외교 내지 무력간섭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군국기무처의 개혁운동에 대해 일부러 적극적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기간의 개혁운동은 김홍집·유길준 등 군국기무처의 핵심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제2차 개혁기간(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6일)에는 駐조선 일본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의 지원하에 구성된 이른바 ‘金弘集·朴泳孝 聯立內閣’이 총 213건의 개혁안을 공포·시행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이노우에를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의 실질적 보호국화를 서둘렀다. 이 목적을 위해 이노우에공사는 반일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大院君을 정계에서 은퇴시키고 박영효와 徐光範 등을 입각시킴과 동시에 일본인 고문관을 내각에 배치하면서 300만 엔의 일본차관을 제공하였다. 이때 내부대신 박영효는 실권을 장악하고 독립·자주적인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려 함으로써 일본측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 결과 박영효는 ‘不軌陰謀’라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정계에서 축출당해 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제3차 개혁기간(1895년 7월 7일∼1896년 2월 11일)에는 김홍집·유길준이 각각 총리대신 및 내부대신으로 집권하여 약 140여 건에 달하는 개혁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박영효의 일본망명 직후 朴定陽·李完用·李範晋·尹致昊 등 친미·친러적 성향이 강한 貞洞派가 한 때 득세하였지만, 1895년 10월 8일의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김홍집 등이 재집권하여 개혁사업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비시해사건의 善後처리과정에서 친일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 아니라 단발령을 무리하게 공포·강행함으로써 보수적인 유생층과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드디어 고종이 1896년 2월 11일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파천)하여 실권함으로써 갑오경장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은 일본군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하였을 뿐 아니라 집권후에도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갑오경장은 전반적으로 타율적 성격을 띤 개혁운동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개화파 관료들은 개항 이래 꾸준히 조선의 개화운동을 주창 내지 주도했던 인사들로서 갑오경장 기간 비록 일본의 비호를 받았지만 가급적으로 독립·자주적인 개혁을 도모했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에는 자율적 측면이 있었다. 그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 외국에 체재하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明治日本의 ‘文明開化’相과 청국의 洋務運動 등을 눈여겨 살펴본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 및 부국강병 달성에 필요한 개혁방안을 고안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조선왕조를 중흥시키려고 기도하였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門地가 낮은 兩班이거나 中人 혹은 庶子출신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타파함으로써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던 개화파 관료들은 실제로 동학농민군이 제1차 봉기 당시에 제시한 弊政改革案 등 민중의 개혁욕구를 수렴함과 동시에 일본 및 서구의 효율적인 근대적 정치·군사·재정·교육제도 등을 도입함으로써 조선의 통치제도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내용의 개혁이 그들에 의해 시도 내지 단행되었다.

첫째, 대외정치면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양하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취해졌다. 종래 청국이 조선에서 향유했던 모든 특권을 폐지시키는<保護淸商規則>이 반포되었으며, 국호를 ‘大朝鮮帝國’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국왕의 칭호도 ‘大朝鮮皇帝’로 격상하려 시도하였다. 또한 ‘獨立慶日’과 ‘開國紀元節’의 제정, 國旗사용의 장려, 圜丘壇의 건축과 황제존호 奉位式의 실행 등이 결의되었다. 아울러 迎恩門을 헐고 慕華館과 弘濟院의 명칭을 바꾸는 안도 논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주의적인 국위선양의 구상은 1896년에 설립된 獨立協會가 추진했던 사업의 선구로서 주목된다.

둘째, 전통적인 절대군주제적 통치제도를 내각중심의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하였다. 이에 따라 국왕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宮中과 府中의 행정을 분리하고 신설된 宮內府로 하여금 국왕 및 왕실에 관련된 사무를 전담케 하였다. 특히, 議政府(나중에 內閣)를 통치의 중추기관으로 만들고 그 밑에 기존의 六曹 대신 8衙門(나중에 7部)을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지방제도 역시 종래의 道·府·牧·郡 등의 대소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府·郡체제로 일원화시킴으로써 지방행정의 합리화를 꾀하였다. 그 외에<鄕會條規>와<鄕約辦務規程>등을 통해 초보적인 민주적 지방자치제의 기틀을 마련하려 하였다.

셋째, 재정을 효율적으로 확충·관리하며 근대적인 상공업을 육성하려 하였다. 국가의 재무행정을 度支部 산하로 일원화하는 한편 은본위제와 금납제의 실시, 도량형의 통일 등을 통해 근대적 재정체계를 확립하려 하였다. 農商工部를 신설하고 그 산하에 근대적 산업을 육성할 각종 기구들을 설치하여 정부차원의 상공업진흥을 도모하였으며, 六矣廛 등 종래 일반국민의 殖産의욕을 억제했던 제도를 혁파함과 동시에 商務會議所를 설립함으로써 민간의 기업심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발상의 연장으로서 대규모 外債를 도입하여 근대적 상공업을 일으키려는 外資導入 경제개발계획도 수립하였다.

넷째, 근대적 常備軍과 警察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서울에 警務廳을 설립하고 지방에도 경찰제도를 확대시켰으며, 신식군대인 訓練隊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민비시해사건 후에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그 대신 서울에 親衛隊 2개 대대, 평양과 전주에 鎭衛隊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士官養成기구로서 武官學校를 신설하였다.

다섯째, 종래 科文중심의 교육제도를 혁파하고 근대식 학교제도를 수립하였다. 科擧제도를 폐지하였으며, 學部의 주도아래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을 개설하였고, 약 200명의 관비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한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글 사용을 장려하였다.

여섯째,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양반중심 신분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제반 개혁을 단행하였다. 전통적 신분제도, 문벌 및 지역에 의한 차별관습을 철폐하였으며, 과부의 재가 허용과 조혼금지 등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대우를 개선하였다.

일곱째,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고 근대적 재판제도를 수립하면서 고문과 연좌제를 폐지하였다.

갑오경장은 일본의 明治維新을 모방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혁파하고 이를 근대적인 체제로 개편하려 했던 개혁운동이었으나 淸末의 戊戌政變과 같이 中途半斷으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이 개혁을 통해 시도되었던 개혁안은 1896년 이후 死文化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개혁의 정신과 입법의 골격은 독립협회운동과 한말의 계몽운동으로 이어져 한국 근대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청일전쟁은 청국·일본·조선 등 관련 각국간의 국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시킴과 동시에, 이들 나라의 근대화 방향을 결정지운 역사적 전쟁이었다.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말미암아 요동반도를 약취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대만을 식민지로 확보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선발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였고, 나아가 청국으로부터 받아낸 배상금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반면 청국은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박탈당한 데다 열강간의 치열한 제국주의적 분할경쟁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대내외적으로 왕조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전쟁중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뻔했던 조선왕국은 갑오경장이라는 空前의 제도개혁을 치르는 것 이외에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동학의병의 패배, 민비시해 등으로 임진왜란 이래 최대의 민족적 수난을 당하였다.

<柳永益>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