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한국병합’ 과정에서의 통감부의 역할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여 명실상부한 완전한 식민지로 약탈하기 위하여 개항 이래 장기간에 걸친 치밀한 준비를 하여 왔다. 그 침략준비과정에서 일본은 2차의 국제적 전쟁을 감행하여 승기를 잡음을 비롯하여 직접 군사적 또는 정치적 압력을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침략에 유리한 기반을 구축해 갔으며 한편으로는 갖은 방법으로 친일분자를 육성하여 그들을 앞장세워 친일세력을 부식시키고 왕조권력을 내부로부터 붕괴·와해시키는 수법을 구사해 왔다. 여기서 통감부가 합병 전까지 친일분자를 육성하여 이용해 온 수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청년을 일본유학생으로 받아들여 친일파로 육성하여 이들을 친일관료로서 정치적으로 충원해서 정부기능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썼다. 이 방법으로는 1881년의 紳士遊覽團과 1895년·1897년의 官費留學生 파견이 대표적이며 이와 함께 私費留學生도 매년 증가하여 1908년에는 493명에 달하였다. 일본파견의 관비유학생 선발에서는 초기의 고위급 한국관료의 가족이나 친척 등 문벌중심주의에서 친일성을 천거기준으로 변경하였으며 1905년부터는 관리채용시험을 실시하였는데 그 시험과목에는 科擧式의 詩文 중심이 아니고 정치·경제·법률·어학 중 1과목을 임의 선택케 함으로써 일본유학생 출신에게 유리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정부 각부 내에서 일본유학생 출신의 지위가 강화되어 갔고 특히 기술계와 교관, 그 중에서도 무관과 무관학교의 교관에 일본사관학교 출신자가 압도적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둘째, 통감부시대에 정부 각부에 일본인 고문이 배치되면서부터 인사행정에 깊이 간섭하여 친일성이 가일층 중요시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1907년의 정미7조약체결 후에는 고급관리에 대한 인사권이 완전히 통감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어 경력을 무시하고 친일성만을 기준으로 유학생 출신과 일진회계를 낙하산식으로 대량을 중앙과 지방에 고위요직에 임용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료제도에 일대 혼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이토의 승인을 받고 임용된 이들 친일관료는 대부분 당시의 지배층 양반 중에서도 비교적 신분이 낮은 계층이나 중인출신으로서 평소에 전주 이씨, 외척 민씨 등의 특권적 지배층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반감도 겹쳐 지배층 내부의 질시·반목과 관료층 내부의 분열을 촉진하게 되어 정부기능은 마비상태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와 같이 일본유학생 중심으로 친일분자를 육성하여 정부요직에 충원하고 그들 친일관료의 買辦的·賣國的 성격을 이용하여 왕조권력 탈취를 획책하였다.
셋째, 정변 관련자나 망명자를 비호·회유해서 친일파로 육성하여 이용하였다. 1884년 甲申政變에 관련된 개화파의 생존자 일부를 일본에 망명시켜서 그 중 柳赫魯·申應熙·鄭蘭敎·李圭完 등 尉官級 장교를 장기간 비호한 후 1907년의 정미7조약 체결 후 귀국시켜 이토에 의해 칙임관에 임용하여 한일합병공작에 이용하였다. 다음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895년의 민비시해사건, 1896년의 金弘集내각 붕괴 후의 일련의 정변 관련자522) 중 일본에 망명한 兪吉濬(내부대신)·張錫周(법부대신)·趙羲淵(군부대신)·李容泰(참판) 등 20여 명은 거의 전원 귀국하여 이토에 의해 칙임관급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합방 후에도 총독부의 道長官·參與官·中樞院參議 등에 복무하였다.
넷째, 일본은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이를 합방실현을 위한 여론조작과 매수공작에 이용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애국적 민중과 의병의 투쟁이 전국적 규모로 고조되는 가운데 침략책동을 본격화시키기 위하여 일본군부가 주동이 되어 일진회를 조직하였으며 일진회는 합병추진을 위한 여론형성과 애국세력에 대한 중상·모략·탄압 및 매국공작에 동원되었다. 이밖에 새로이 進步黨·政友會·大韓商務組合 등 친일단체와 많은 친일적 유령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배일단체처럼 위장시켜 친일단체로 이용하거나 기존의 배일적 단체를 변질시켜 친일적 단체로 이용하기도 하였다.523)
522) | ≪齊藤實文書≫733, 明治 27년(갑오) 이후 政變關聯人等名簿. 총관련자(직접·간접 관련자 포함) 176명 중 망명자는 21명이었다(姜東鎭,≪日本の朝鮮支配政策史硏究≫, 東京大出版會, 1981, 121∼122쪽 再引用). |
---|---|
523) | 進步黨은 閔元植·文鐸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표방한 친일단(회원 500명)이며 政友會는 이완용 후원 하에 金宗漢(총재)·高羲駿·민원식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표방한 친일단체(회원 460명)이며 大韓商務組合은 閔泳綺가 조직하고 일진회의 합방공작을 동조한 御用的 보부상 중심의 친일단체(회원 100만 여)이었다(內田良平,<朝鮮時局私見>,≪齊藤實文書≫943 ; 姜東鎭,≪日本の朝鮮支配政策史硏究≫, 129∼134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