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민의 투쟁
조선 후기 이래 場市는 지역주민들의 경제생활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장시개설에 따른 이권을 둘러싸고 상인·지역간에 분쟁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장시의 성격은 구한말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외국상인들의 국내시장 침투와 商權침투에 대해 한국 상인들은 장시개설을 중지하거나 상업행위를 중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퇴위나 군대 해산 같이 국운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도 서울·평양 등 대도시에서는 撤廛하거나 지방의 장시에서는 시장개설을 거부하는 등으로 저항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 조선왕조는 청·일의 각축과 구미열강의 이권쟁탈로 말미암아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개항 직후 日商의 활동범위가 개항장 거류지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로는 사실상 국내 전체로 확장되면서 청·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 때 淸商이 일상을 압도하고 內地에서의 輸入洋品 판매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지만, 일상의 內地行商이 허용되면서부터는 그들이 직접 미곡산지나 포구에 진출하여 곡물을 매집함으로써 조선 상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품유통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상의 내지행상과 이들에 의한 곡물의 대일유출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촌경제는 붕괴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응하는 조처로 지방관은 자주 방곡령을 발령하고 있었으나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방곡령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 일제는 정치적 지배력을 이용하여 경제부문에서도 각종 이권을 차지하여 갔다. 더욱이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과 함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직접적인 식민지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은 더욱 치열해졌다. 또한 일상의 내지행상도 조선 정부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투쟁과 반일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일제의 국권침탈이 극에 달한 1909년 12월부터 1910년 4월에 걸쳐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거센 시장세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寧邊·順川·安州·龍川 등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장세 반대운동은 단순한 시위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순사주재소·郡衙 등의 관서를 습격,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일인관리 및 상인들을 타살시키는 등 적극적인 반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시장세 반대운동은 평안도내 뿐만 아니라 그 규모의 크고 작음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전국적인 양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