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갑오의병의 전개
조선인의 반일운동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의 체결 전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구체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84년부터이다. 甲申政變이 비록 개화당의 3일천하로 끝나고 그 주역들이 망명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유생을 중심으로 한 재야 지식인들은 金玉均을 비롯한 개화파들을 ‘甲申凶賊’이라고 하며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陽城의 李敎奭 같은 유생은 구체적으로 의병을 초모하여 ‘賊臣’인 개화당과 ‘外敵’인 일본을 상대로 ‘決死抗戰’할 것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 고종의 해산칙유를 받고 자진 해산하였지만 당시 유생들의 개화당에 대한 인식과 항일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1126)
그러나 항일 의병투쟁은 1894년 6월 21일 일어난 갑오변란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개시되었다. 척사유생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갑오변란을 민족존망의 위기상태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사주를 받는 친일적 개화정권의 정치사회적 정책을 일본화를 위한 예속정책으로 인식한 조선인들은 무력적인 투쟁으로 일본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 지평의 安承禹, 홍주의 安昌植, 안동의 徐相轍, 상원의 金元喬, 철원의 洪範圖 등은 무력 투쟁을 위한 의병을 모집하기까지 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안승우·안창식·홍범도의 경우는 비록 모병단계에서 끝나고 구체적인 항전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 나타나지만, 서상철·김원교의 경우는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안승우는 경기도 지평출신으로 이항로 문하의 유생이다. 그는 1894년 여름 고향인 지평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마침 그 지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일을 그르칠 것을 염려하여 중지하였다. 홍범도는 1907년 함경도 일대에서 포수를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활발히 투쟁한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작성한 자필이력서에 의하면 자신이 1894년 철원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침략군과 대항하고자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1127) 물론 이 사실을 알려주는 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사실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이 시기 반일의식에 눈떴음은 분명하다.
홍주지역에서 청양의 유생인 안창식을 비롯한 朴昌魯·李世永·李鳳學 등이 1895년 4월에 장곡에서, 6월에는 청양장터에서 기병하기로 하는 등 을미사변 직전까지 일련의 항일의병봉기를 계획, 준비하였다. 비록 이들의 활동은 군사활동으로 발전되지는 못하였으나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9월부터 의병초모와 무기수집을 추진시켰으며 단발령 공포 직후인 1895년 12월 초 김복한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안동의 서상철, 상원의 김원교 등은 의병을 모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기까지 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1128) 안동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서상철에 의해 추진되었다. 서상철은 종형인 서상렬을 통하여 柳重敎의 문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그의 학문적 연원이 화서학파에 닿고 있음을 알 수 있다.1129)
서상철은 갑오변란으로 경복궁이 유린당하고 고종이 핍박당함에 이에 분기하여 기병하였다. 그는 韓麟錫·李罄載·韓守東 등과 함께 격문을 발표하고 1894년 7월 25일 안동향교에서 거의하고자 한 것이다. 계획했던 안동의거는 안동부에 의해 강제로 정지당하였다.1130) 서상철은 계속 의병을 초모하여 상주의 태봉에 있는 일본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청풍 일대로 후퇴하였다. 그 후의 안동의병의 행방은 알 수는 없으나 서상철은 단양의 곤지암 지역으로 피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1131) 이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비록 뚜렷한 전과를 내지는 못하였으나 갑오변란 직후 청일전쟁이 전개되고 있던 1894년 7∼9월간에 경상도 북부지역과 충청북도 일부 지역에서 동학군이 아닌 의병세력이 일본군과 무력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상원의병은 전 관료 출신인 김원교에 의해 1895년 7월 22일 상원관아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원교는 일본과 개화정권을 ‘夭敵’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반침략·반개화의 이념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상원의병은 상원관아에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미곡 등을 탈취한 후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소식에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성으로 이동하였다. 상원의병은 장수산성까지 이진하면서 봉산·재령 등지에서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에 참여할 것을 알렸다. 이에 따라 동학군의 일부가 장수산성으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김원교는 부대를 정비하고 1895년 8월 6일 ‘평안도창의사 김’이란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고 8월 10일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해주부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해주부의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8월 12일 장수산성을 포위하고 방화하면서 공격하자 의병부대는 평안도 덕천방면으로 이진하여 그 후 9월 중순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1132)
1126) | ≪高宗實錄≫권 21, 고종 21년 11월 27일,<陽城義兵倡首李敎奭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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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 ≪레닌기치≫, 1989년 4월 11일,<적위병 및 붉은 빠르티잔의 이력서>. |
1128) | 金祥起,<朝鮮末 甲午義兵戰爭의 展開와 性格>(≪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
1129) | 徐相烈,≪敬菴集≫권 1, 雜著,<搬移堤川長潭記>. 徐相轍(1859∼1932)의 자는 子由, 호는 敬殷이라 한다. 본관은 달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제천의 청풍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1860년(경신년, 철종 11년) 徐省의 9대손인 敎淳의 장자로 태어났고, 國輔의 장자인 浩淳에 입양되었다. 이로써 제천의병 소토장 서상렬과는 6촌간이 됨을 알 수 있다(≪大丘徐氏世譜≫己未原譜 참조). 그는 서상렬을 따라 제천의 청풍으로 이거하여 거주하면서 화서학파의 도맥을 승계한 유중교의 가르침을 받았다(≪長潭講錄≫참조). 이≪長潭講錄≫에 의하면, 1889년 11월 하순 실시한 강회에서 서상철이≪孟子≫의 梁惠王篇 沼上章을 강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서상철의 인적사항을 “子由, 庚申生, 達城人, 靑風居住”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891년 3월 25일 강회에서도 ‘大學經一章’을 강했다. 한편 1891년 9월 27일 유중교가 ‘주인’의 자격으로 실시한 향음례에 ‘觀廳位’로 참석했음이 확인된다. |
1130) | 李晩燾,≪響山日記≫(國史編纂委員會, 1985), 1894년 7월 14일·7월 20일. |
1131) | ≪舊韓國外交文書≫(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67∼1973),≪日案≫3, № 3231 忠淸道東徒制壓狀況通報에 의하면 서상철이 昆池岩으로 피한 것이 탐지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곤지암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소재의 곤지암으로 확인된다(具玩會,≪韓末의 堤川義兵≫, 集文堂, 1997, 46쪽). 즉 청풍에 거주하던 서상철은 자신의 집 근처에 은신한 것이다. |
1132) | 金祥起, 앞의 글(1989). 과학백과사전출판사,≪조선전사≫14 (1980), 26∼2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