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호남의병-전북
가) 이석용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李錫庸(1878∼1914)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 나라의 재정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 정부와 세계 열강들에게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李亻契은 일제의 침략상에 대하여, “예로부터 오랑캐가 중국 땅을 침략하여 화친을 강요하고 땅을 빼앗은 예는 많았지만 근세의 왜놈들처럼 반복무쌍한 짓은 없었다. 개화한 이래로 세계 각국이 왕래하여 온갖 변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저 왜적이 그 틈에 끼어 교활하고 간사하기가 다른 나라와 비교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유생들이 일제의 침략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석용은 1907년 2차 의병전쟁 때 궐기하였으나 단발문제는 계속 끊이지 않았다. 즉 1908년 2월의 기록을 보면, “저녁에 桐花 장터에 당도하여 머리깎은 사람을 매 때리고 백성들을 좀 먹은 任·長들을 불러들여 역시 매를 때렸다. 머리 깎는 데 앞장선 괴수놈들을 잡아 때리고 그 도당에게 일체 갓·망건을 쓰고 출입할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해 4월 22일 “旺方里를 지나다가 머리 깎은 사람이 갓·망건을 쓰고 각근히 지공하며 나에게 심심한 치하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 때에 近邑의 난민들 사이에 마음을 고친 자가 많았으나 죄를 입을까 두려워서 심한 자는 문을 닫고 머리를 길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석용의 기록을 통해서 보듯이 단발반대는 의병들의 일관된 전투구호의 하나였으며 단발은 곧 일제침략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기 의병장이었던 이석용의 1908년 기록에도 역시 단발령에 대한 저항의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석용이 궐기한 1907년 이후의 의병전쟁은 10여 년 전의 을미의병과 사뭇 상황이 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에 이어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해산으로 국권침탈이 노골화되자 1907년 이석용은 전북 임실에서 거의하여 일제을 구축하기 위한 대열에 나서게 된다. 이석용은 먼저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 정부와 세계 열강들에게 결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발포하였다.
이어서 8월 우리 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하여 토적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기삼연이 영광 隨綠山 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湖南倡義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구축이 필요함을 절감하여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倡義日錄≫에는 “지금 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사오며, 단군과 기자가 베푼 풍교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道學은 땅에 떨어졌아오나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어찌 누구인들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펼치고자 하는 것이 원이오나, 성공하고 못하는 것은 예측할 바 못되옵니다”라고 하여, 8월 26일 이석용이 아버지와 하직하며 고하는 글이 실려 있다. 8월 27일 이석용은 부모 곁을 떠나 임실군 성수면 소재 上耳庵에서 이미 모집된 의병들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8월 29일에는 야음을 틈타서 삼봉에서 황사현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 때 구성된 의병진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義兵大將 李錫庸 先 峰 朴萬華 崔德逸 宋判九 後 軍 金士範 尹明善 金成鶴 中 軍 呂桂穆 朴雲瑞 金成學 總 指 揮 朴甲洪 郭子儀 朴宗文 參 謀 全海山 韓士國 李光三 連 絡 洪允武 朴成武 尹炳俊 補 給 韓圭武 朴金東 朴文局 道路部長 金士元 金公實 金成慄 運 糧 吳畸烈 趙榮國 金學文
의진의 조직을 끝마친 이석용은 9월 5일 의진을 이끌고 백암을 출발, 홍도령에 이르러 진열을 정비한 뒤, 곧바로 장수 배룡리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의병을 모으는 한편, 방을 붙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9월 12일 그는 마이산에서 의병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그 동안 모집하였던 의병들을 마이산 南麓 龍岩 위에 집합하게 하였다. 그는 우선 일부 의병들로 하여금 나무를 베어 단을 쌓게 하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는 용암 위에 제단이 마련되자 제단 정면 위에 ‘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크게 써서 깃발로 걸게 하였다. 그리고 의병들에게는 ‘義兵倡義’라고 씌여진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게 하였다. 이 자리에 집합한 의병은 모두 500여 명이었으며, 부근의 부모형제와 장정들이 모여 주위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이 날의 거사를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의 수까지 합하면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하늘을 우러러 맹약한 뒤, 그는 다시 의병들이 지켜야 할 약속<義陣約束>15개 조항과<義令>을 의병들에게 선포하였다. 먼저<의진약속>15개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一. 우리의 창의는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 할 뿐이니 왜인이라면 대소인을 막론하고 보는대로 죽이되 청나라나 서양인들은 상하지 말 것. 一. 왜군들의 재물은 모조리 거두어 의병들의 군자금으로 삼을 것. 一. 오늘의 가장 급선무는 의병운동이므로 문벌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인물 본의로 쓰되 그 용맹과 재능에 따라 적소에 배치할 것. 一. 군중에 기용되는 弓匠·工匠·의원들이 가진 기능을 십분 발휘할 것이며 의병들은 이들을 각별히 보호할 것. 一. 복을 입고 있는 상가나 서당의 훈장들은 각별히 보호하고 예의에 벗어나지 말 것. 一. 군자금과 군량미는 왜인들 것을 빼앗아 쓰되, 동포 중 부호들은 의로써 타일러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내도록 할 것. 一. 무기는 되도록 왜병들 것을 빼앗아 쓰도록 힘쓰고, 工匠 기술자들은 이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거나 고쳐 쓰도록 연구 노력할 것. 一. 청색으로 군복을 삼되 낮에는 황토색 복장도 무방하다. 一. 군례는 상하 구별을 엄히 하여 존장에 실례를 범하지 말 것. 一. 군중에서는 말다툼, 의견충돌이 절대금물이니 일치단결 할 것. 一. 적을 업수이 여김은 패전의 원인이니 경거망동을 삼가할 것. 一. 상하질서를 엄히 하고 백난중이라고 사기를 잃지 말 것. 一. 왜병, 순검, 한국인 순검, 방장, 영수원들은 보는대로 잡되 한국인들로서 개과천선하는 자는 관용을 베풀 것. 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거나 부녀자를 범한 자, 사리사욕을 취한 자는 가장 엄하게 다스린다. 一. 왜병대장을 죽인 자는 상으로 일백 냥을 내리고 왜인을 사로잡는 자는 10냥을 상주어 공을 드러낸다.
<義兵十條>라는 명목으로 義令에 제시된 군규를 보면, ①국가에 충성하는 것(勤王事), ②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分), ③선비들을 존경할 것(敬士類), ④민심을 안정케 함(安民心), ⑤의병들을 배불리 할 것(接軍旅), ⑥자금의 충족(足軍用), ⑦무기의 관리(出品機), ⑧군률의 기강을 세움(揚律令), ⑨매국도당을 물리침(擊邪黨), ⑩유공자의 포상(定功賞)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조직과 군률을 정한 의진은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을 입힌 뒤 그들의 복장·양총·비단·문서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어버리기도 하였다. 16일에는 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11월 14일 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矢洞, 3월 14일 馬根峴, 3월 17일 殊流山, 3월 27일 館村驛, 4월 30일 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하며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석용은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을 때, 재판장에게 거의의 목적을 “日人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으며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되지 않겠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대하여 “차라리 대한의 鷄犬이 될지언정 너의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답변을 하여 불굴의 애국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과 을사오적을 죽이지 못한 것과 동경과 大板을 불사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이석용은 재판정에서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으므로 기립할 수 없다고 끝까지 꿋꿋한 기개를 굽히지 않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 전해산
전라북도 임실 출신인 全海山(全垂鏞 또는 金基泓, 1897∼1910)의 가계는 사족이었지만 농민과 별로 차이가 없었던 전형적인 잔반유생이었다.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학문 연마에 힘써 李鎭龍 문하에 수학하면서 인근에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송병선·최익현 등의 문하에서 호남의 젊은 재사들과 교류하면서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그리하여 사장류에 박식하고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실천유학자로 성장해 갔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전해산은 이석용이 창의하자 그의 倡義同盟團에 참모로 참여하여 투쟁하였다. 그는 1907년 8월부터 1908년 3월 남원 少川戰鬪에서 일본군에 패해 이석용이 의진을 일시 해산할 때까지 7개월간 이 의진에서 투쟁하였다. 창의동맹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大 將 李錫庸 先 鋒 朴萬華 崔德逸 宋判九 中 軍 呂雲瑞 金雲瑞 金成學 金士範 尹明春 金成鶴 參 謀 全海山 韓士國 李光三 總 指 揮 朴甲川 郭子儀 林宗文 補 給 韓圭井 朴金東 朴文局 連 絡 洪允武 朴成武 尹秉俊 道路副長 金士元 金公實 金成慄 軍 糧 吳琪熱 趙榮國 金學文
창의동맹단의 활동에 대해서는≪海山倡義錄≫이나≪湖南倡義錄≫에 자세히 전하는 바가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 후 金泰元의 패잔병들이 군사를 다시 모으고 장차 대장을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서 대장으로 추대되어 1908년 8월부터 1909년 4월까지 독자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때 결성된 의진이 大同倡義團이다. 그 구성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大同義兵大將 全海山 先鋒將 鄭元執 中軍將 金元範 後軍將 尹東授 護軍將 朴永根 都統將 李凡振 斥倭將 林長澤 參謀將 李鳳來 參 謀 金永俊 金 燉 金公三 李聖化
이 의진의 지도부는 寒士, 농민, 해산군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의병들은 인근에서 모집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의진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산포수들을 합세시키는 경우가 많았으며 하급 간부를 임명할 때 총쏘는 능력이 뛰어난 자를 우선으로 꼽았다. 대동창의단의 편제는 의병 열명마다 什長을 두었고 십장 위에는 都什長, 도십장 위에는 都砲를 두었으며, 도포 위에는 선봉을 두었다. 선봉 위에는 대장을 두고 있다. 일본측 기록인 전해산의 심문조서≪全南警秘 第49號≫에는 1908년 8∼9월 경 최전성기에는 일시 부하가 300명을 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해산이 거느린 대동창의단이 항상 대규모의 부대를 유지하면서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도부를 從事라 불렀고 종사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반독립적 투쟁을 하고 있었다. 항상 주변 가까운 곳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동하면서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의 토벌에 대처하였다.≪全海山陣中日記≫는 전해산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던 의진의 규모를 전하고 있다. 그는 대동창의단의 여느 종사들처럼 20∼1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밤을 이용하여 이동하면서 게릴라식 전법으로 투쟁하였다.
이 의진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를 보면, 화승총, 개량화승총인 천보총, 개량탄환, 화약 외에도 신식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수효는 극히 적었다. 신식총은 일본군과 접전한 후 노획한 것이거나 선교사의 호신용 소총을 구득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 헌병대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한인을 통해서 일본군 군수품을 구득하는 경우가 있었고, 해안 도서가 많은 호남에서는 청국의 상인들이 밀무역하는 신식총을 은밀히 구득하기도 하였다. 신식총의 탄환 또한 청나라 상인들이 공급했지만 그 값이 너무 비싸고 구하기조차 어려워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산은 훈련되지 않은 군사, 전술에 밝지 못한 지도부,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장성·영광·나주·무안·함평 등 당시 호남 24개 군 가운데 중서부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기도 하였다. 또 이에 그치지 않고 임병찬과 같은 명사들이 걱정했던대로 일본의 미곡 수탈이 무역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영광 서해를 거쳐 부안에 들어가 이 지역을 공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해산 의진은 1908년의 佛甲山에서 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9월 27일에 나주 石門洞에서 적을 대파하여 위명을 크게 떨쳤다. 이어서 10월 16일의 大明洞, 10월 24일 大峙, 11월의 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같이 전해산이 활약했던 지역을 개관해 볼 때, 일본군이 소위 ‘남한대토벌’을 위한 방편으로 천안과 영산포에 헌병분견대를 배치하고 이 지역을 축으로 군사행동을 전개한 것도 전해산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전해산은 호남 특히 전라남도 중서부 지방에 걸쳐 해안과 내륙에서 두루 활약했다.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외에도 土倭, 즉 부일분자를 상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즉 헌병보조원·순경·일진회원·세금징수원·친일부호·가짜 의병의 무리였다. 그는 격문을 지어 부일분자들을 경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인륜의 회복을 통해서 천도를 실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 인륜이 상실되어 분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현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전해산 의진이 세력을 유지했던 장성·영광·나주·함평·부안 등지에서는 일본군, 경찰 수비대들이 활동하기가 어려웠고 사왜의 무리들인 부일부호·일진회원·세금영수원·해산군인을 빙자한 부랑자 및 가짜 의병들은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점령하고자 획책하던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고향 일대에<본고을 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火山을 거쳐 宮冠山으로 행군하여 3월 27일 영광 梧桐峙에 이르러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曺斗煥·李景五의 밀고와 金顯奎의 인솔로 일병에게 붙잡혀 영산포 일본 헌병대로 압송됨으로써 2년간에 걸친 전해산의 의병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 문태서
文泰瑞(1889∼1913)는 경남 안의군 서상면에서 태어나 17세 이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7살이 되던 해인 1897년 전라북도 장수군에 정착하였다. 그는 한학에도 열심이었지만 이미 구국의 의지를 갖춘 열혈청년으로 자랐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모든 집안일을 부인에게 맡긴 뒤 금강산에 입산하였다. 금강산에는 당시 용병술과 총포기술이 국내에서 으뜸으로 알려진 박처사라는 사람이 있어서 문태서는 그에게 무예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문태서는 보호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박처사에게 하산을 고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최익현을 찾아가 일본의 보호정치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호서 등지를 거쳐 다음 해 5월 경 덕유산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동지를 규합하여 최익현과 연합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최익현의 순창패전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여러 지사들을 찾아가 의병항쟁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문태서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1908년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모아 거의하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덕유산을 중심으로 수렵을 일삼던 포수 10여 명의 호응을 얻어 덕유산 통도사에 주둔하고 있던 중 일본 헌병 5명이 진안·용담으로부터 무주·안성을 거쳐 무주읍내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추격하여 육박전 끝에 체포 사살하였다. 그 뒤 장수 방면으로 행군하던 중 장수군 계내면 양악에서 朴春實 부대를 만나 그 부대를 흡수하여 합군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상당수의 의병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곧 인근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모집의 대의을 밝혀 사람들에게 협력을 호소하였다. 어느 정도의 의병이 모여들자 구체적인 의진을 조직하였다. 그는 자신의 의병진을 호남의병이라 칭하고 스스로 호남의병장이 되었다. 그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大 將 文泰瑞 秘 書 朴守文 先鋒將 朴春實 中軍將 金誠輔 後軍將 申託光
이렇게 하여 의병의 세가 점차 확대되자 무주·장수 등지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문태서 의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일본 병영에서는 그 의진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 병영의 책략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문태서는 의병진을 장수의 계북 방면으로 이동 행군하면서 적을 유도하였다. 그는 의병들이 적과 싸우기에 편리한 계북면 농소·어전·문성 등지에 이르자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15명을 사살하였고 20명을 사상하였으나 의병 7명이 죽고 2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25자루의 총기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장수 계북 방면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문태서는 의병진을 덕유산 구천동으로 이동하였다. 1908년 12월 하순 그는 무주군 부남면 방면으로 출동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부남면 고창곡으로 미리 출병하였다. 일본군이 고창곡으로 출병하자 미리 양쪽 언덕에 잠복시켜 놓은 부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지리적으로 불리한 일본군은 앞 뒤 좌우에서 한꺼번에 급습해오는 의병을 당해내지 못해 전군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적군은 43명이 사살당하고 총기 50자루를 빼앗기는 참패를 맛보았다. 일본군은 고창곡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참패를 복수하고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을 섬멸하고자 거창·합전 등 7개 읍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200여 명으로 하여 연합토벌대를 편성하여 덕유산 일대를 완전 포위하고 전투태세를 취하여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문태서는 지리에 밝아 험준한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완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날이 갈수록 그를 찾아오는 의병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700여 명이 넘는 대부대가 되자, 박문영·전성보·신택광·박춘실을 의병장으로 임명하여 장수군 계북면 土沃洞·구천동, 무주군 안성면 칠연계곡, 덕유산 남쪽 경남 거창지역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부대로의 재편성 이후 문태서가 직접 지휘하는 의진은 봉곡에서의 잠복을 통하여 일본군 9명 사살, 무주군 안성면 장항리에서 일본군 3명 사살, 거창읍에서 일본헌병대 대장 1명과 헌병 2명 사살, 덕유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 끝에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렸다.
문태서는 덕유산에 의병을 집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7읍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진격해 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일본군을 깊은 골짜기로 유인하고 매복의병들에게 일본군이 골짜기 깊숙히 들어왔을 때 사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싸움은 하루종일 계속되었고 의병이나 일본군 다 함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싸움으로 일본의 7읍 연합부대장 및 장교 3명과 군졸 32명이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참패를 당하였지만 문태서의 의병진 또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덕유산 전투에서 승리한 문태서 의진의 사기는 그 어느때 보다 더 고양되었다. 문태서는 서울에 있던 일본 통감부를 직접 습격하여 통감 이토를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문태서는 우선 1대에 30명 씩 3대로 편성하고 1대를 선발대, 3대는 군량 및 기타 물자의 수송을 맡게 하였다. 먼저 1대를 출발시키고 그 다음 2대, 3대의 순으로 출발시켰다. 제1대가 북진하던 중 충북 옥천군 이원역을 지나려 할 때, 일본 사람들이 경부철도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생산된 중요한 물자들을 수송하려고 차에 싣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것을 본 의병들은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이원역을 습격하여 일본의 경비병과 일본 사람들을 사살하고 역사와 화물차에 방화 소각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伊院驛燒却戰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감부에서는 옥천 이원역을 습격한 문태서의 호남의병을 철저히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문태서의 호남의병대가 계획하였던 경성 통감부 습격과 이토의 살해계획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었다.
이원역소각전 이후 일본군의 신무기와 맞서 정면공격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문태서는 모든 의병을 덕유산으로 일단 회군하게 하였다. 그는 회군한 뒤, 무주·장수·거창·함양·안의 등 각 지역으로 분산시켜 유격전을 감행할 수 있도록 모든 대원을 재편성하였다. 이렇게 의병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일합병의 비보가 들려왔다. 이로써 문태서의 호남의병도 일본관헌이나 그에 따른 시설물을 습격하는 등 항일지하운동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태서는 합방후에도 덕유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12년 경남 안의현 서상면 생가에 잠시 은신 중 적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2월 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라) 양윤숙
梁允淑은 본명이 寅泳으로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국화리에서 태어났다. 양윤숙은 1906년 4월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최익현 의진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이 아군 진위대에 체포되어 의병이 해산되자 귀가하여 은신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그는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回文山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그 의진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都總督 梁允淑 左先鋒 崔 華 右先鋒 任恂鎬 中 軍 崔山興 後 軍 李國贊 餉 官 徐基俠 敎鍊官 韓自善
총인원 1천 2백여 명에 화승총 270정과 칼 30자루로 무장하였으며, 기병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하였다.
義 檄 文
난신들의 발호로 오백년 사직이 무너지고 삼천리 강토가 금수의 나라로 변했다. 開化章程은 선왕의 법도가 아니니 斥和의 大義와 열사의 節義로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가 왔다. 비록 무기는 날카롭지 않으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일본의 충신이 된 대한의 난적들을 처단하고 말 것이다.
義所大將 梁寅泳
中 軍 崔山興
이리하여 그는 1909년 말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적에게 체포되기까지 1년간 호남 일대에서 용명을 널리 떨쳤다.
1908년 8월 향관 서기협이 부하 22명을 인솔하여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1908년 9월에는 중군 최산흥이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 수비대를 기습하기도 하였다.
1909년 정월에 이국찬이 12명의 병력으로 서면 죽전리의 순창 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으며, 11월 22일에는 최산흥이 60명의 병력으로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의 왜군 기병대가 사용하고 있는 민가를 습격하여 소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향리인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09년 가을 일군의 대토벌로 거점을 잃고 은신하였다가 그 해 12월 3일 경에 마침내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김제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의 경찰조서에 따르면, 부하 의병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였다고 하며 국가를 위해 죽을 따름이라고 소신을 밝혔으나, 일제는 이를 왜곡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죄목이 이른바 내란죄였으며 이에 방화죄를 추가하여 교수형을 내렸기 때문이다.
마) 양진여
전라남도 光山 출신인 梁振汝(1862∼1910)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가족을 처가가 있는 전남 장성군 甲鄕面 杏亭里로 옮긴 후, 가산을 정리하여 10여 곳에 주막을 차려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담양 三人山에서 인재를 길렀다.
1907년 6월 드디어 양진여는 아우 東骨과 함께 그동안 규합한 동지 30여 명을 거느리고 거의했다. 격문을 각처에 보내어 의병을 모으니 순식간에 3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의진을 조직하였으니 그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倡義大將 梁振汝 都 統 將 安判九 中 軍 將 朴聖日 左 翼 將 金處中 右 翼 將 金翼之 砲 隊 將 尹平元
진용이 갖추어지자 엄격한 군령을 내려 토왜 투쟁을 하되 절대 양민을 해처서는 않된다고 명령하였다.
그 해 9월 초순 이후 양진여가 이끄는 의진은 정읍·순창·고창·담양 등지의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고, 이듬해 1월 하순에는 전남 장성군 非峙에서 일본군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吉田)소좌가 이끄는 대부대의 포위 공격을 받아 격전을 벌였다.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의진의 피해가 컸다.
양진여는 또다시 증모하여 의진을 가다듬고 일본군을 쳐부술 기회를 엿보던 중, 그 해 2월 김태원 의병장이 援兵 요청을 해 오자 우익장 김처중 외 50여 명의 의병을 파견하여 無等村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게 하였다.
양진여는 의병항쟁을 하는 동안 의병 모집을 위해 분주하게 다녀야 했는데, 모병에 필요한 군자금은 가산을 정리한 돈과 주민들로부터 거둔 돈 이외에도 부인 朴順德이 담양 인근 고을 10여 곳에서 주막업으로 번 돈이 들어 있었다. 부인 박씨는 주막에서 얻은 정보를 남편 양진여에게 알려 주어 일본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가 이끄는 의진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 규모였는데, 전술방식도 유격전·합동전 등 갖가지 형태로 적을 현혹하였다.
한편 일제는 신출귀몰한 양진여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그들은 헌병 보조원, 일진회원 등 부일배를 동원하여 의병 증모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위해 광주 지방을 나갔던 양진여를 기습 공격하는 등 온갖 수작을 다 기울였다.
10월 26일 수괴 양진여가 이끄는 폭도 수색을 위해 나까고지(中小路) 군조 이하 7명, 순사 4명이 광주군 新村에 출장 중 이 마을 동쪽 산 위에서 약 20여 명의 적을 공격하여 이를 격퇴했는데, 5명을 죽이고 화승총 4정을 노획했다.
11월 5일 趙·馬 두 警視가 이끄는 제2특설 순사대로 하여금 전북 경계에 도량하는 수괴 양진여 일당의 수색을 위해 1주일간 광주·장성·영광·나주 지구를 수색하게 했다(≪全南暴徒史≫, 1908년 11월 5일).
그 해 11월 중순에 양진여는 의진 본부를 담양에서 장성군 北下面 藥水里로 옮겼다. 이미 부일배들의 밀고로 인해 의진의 본부가 일제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전남 지역의 의병들은 속속 담양군 대전면 한재〔大峙〕부근으로 몰려들었다. 각 지역의 의병장들이 회동하거나 통문을 보내 광주 수비대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의진으로는 ‘대동창의단’을 이끌었던 전해산을 비롯한 제장들이 참여했는데, 일제의 기록(≪전남폭도사≫)에는 전해산 의진이 300여 명, 심남일 의진이 150여 명, 양진여 의진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한재를 중심으로 연합작전에 참여한 의진은 양진여 의진, 영광에서 온 전해산 의진 300여 명, 화순과 동복에서 온 양상기 의진 200여 명, 영산포에서 왔던 姜士文 의진 및 조경환 의진 각 100여 명 등 연합의진의 규모는 900여 명이 넘었다.
이 연합의진에 대해 주목할 만한 것은 군대 해산 후 양진여의 뜻에 따라 일본 경찰 노릇을 하면서 기밀을 탐지해 오다가 탈출한 양진여의 아들 양상기가 독립부대를 이끌고 참여했던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연합의진은 12일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11월 25일 의병 토벌로 악명이 높았던 야마다(山田)소위가 이끄는 토벌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양진여 의진은 많은 적을 베었지만 의진의 피해도 막심했으며, 양진여마저 총상을 입었는데, 일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1월 25일 야마다(山田)소위 이하 20명의 토벌대가 우다(宇田)특무조장이 이끈 토벌대와 大峙에서 교전한 적을 추적하여 藥水亭에서 적정을 파악한 뒤, 다시 진군하여 무명 고지에서 적장 양진여가 이끄는 1백여 명의 적을 발견하고 우회하여 적이 秋月山 꼭대기에 둔전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불의에 기습, 15명을 죽이고 1명을 포로하고 砲 1문, 화승총 7정을 노획하였다(≪全南暴徒史≫, 1908년 11월 25일).
호남의병과 일제와의 치열한 전투는 1909년 봄까지 계속되었지만 증파된 일본 정규군·헌병대·변장대 등을 비롯하여 헌병보조원이나 일진회원 등으로 구성된 부왜 밀정들로 인해 의병들은 점차 산 속으로 몰리게 되었고, 양진여가 이끄는 의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8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까지 의병항쟁을 위해 연합의진에 참가했던 양진여는 추월산 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돌볼 겨를도 없이 의진을 이끌었지만 의병들의 사기는 떨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에 양진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 의진의 규모를 축소한 후 신춘 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양진여가 군자금 조달과 새로운 의진 편성을 위해 전남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고 있을 때, 부일배들의 밀고로 인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용케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듬해 봄부터는 소규모 의진을 편성, 본격적인 유격전을 벌여 광주·나주·영광·장성 등지의 일본 헌병 분견소를 공격했는데, 양진여는 이 유격전에서 또다시 크고 작은 총상을 입게 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순종의 이름으로 ‘의병해산’ 조칙을 내렸는데, 양진여는 눈물을 머금고 이 조칙에 따랐으니, 이 때가 1909년 6월 하순이었다. 양진여는 총상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눌 길 없어 부하의 등에 업힌 채 담양 갑향골로 향했고 그 곳에서 상처 치료에 전념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된 양진여는 광주 감옥을 거쳐 대구 감옥으로 옮겨져 이듬해 3월 5일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전남폭도사≫에 양진여와 양상기 부자 의병장에 관한 내용은 16번(양진여 9번) 등장하지만 실제 소규모의 유격전을 벌였던 것과 부일배를 처단했던 사건들을 기록한다면 그 횟수는 수십 차례가 넘으리라고 짐작된다.
바) 박도경
밀양의 한미한 가정에서 태어난 朴道京(1874∼1910)은 어려서부터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앞에서 기술한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들을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牟陽(지금의 고창)의 무기고에는 좋은 砲가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기삼연에게 알리자, 기삼연이 당시 文殊寺에 주둔하고 있던 의진을 이끌고 모양현을 공격하였다. 이 때 박도경은 현내의 동지들과 내응하여 창고의 무기를 모두 꺼냈다. 적과의 접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하였으나 의진의 희생도 34명이나 되었다. 훈련되지 않은 기삼연 의진은 무기를 버리고 철수하였으나 박도경은 무기를 거두어 감추었다가 군사가 모이는 날에 비밀리에 기별하여 운반해 가게 하였다.
당시 박도경은 기삼연 의진에서 金翼中·徐錫球·全垂庸·金致坤·朴永建·鄭元淑·成喆修 등과 더불어 從事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統領에 金容球, 참모에 金燁中과 金鳳樹가 임명되었다. 박도경은 아들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때 기삼연 의진은 무장·법성포·고창·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1907년 9월 영광에서는 砲隊(砲射隊長)로서 활약하였다. 그 후 몸소 千字砲를 둘러메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담양·순창 등지에서 활동하여 별명을 박포대라 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金公三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本陣을 세우고 스스로는 砲士將이 되고, 김공삼은 선봉, 金一文을 砲將으로 임명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기삼연 의진은 주요 의장들에 의하여 나뉘어 지휘되었기 때문에 의진의 의기가 다소 떨어지는 듯하였다. 이에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 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김영엽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합진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뜻은 광주를 습격하여 기삼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엽이 유종여 등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박도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하수인 2인을 잡아 처형하였으나 유종여는 놓쳐 버렸다. 의진을 이끌고 다시 장성으로 옮겨 군사를 교련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동안 기삼연 의진에서 함께 활약하던 金準 등이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하여 점차 형세가 어려워져 갔다.
1909년 2월에 체포된 부하 朴爾日이 일제의 심문에,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李道云·중군장 孫道演·都十將 具連繹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 라고 供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1909년에 들어서면서 박도경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된 듯하다. 무기는 총 139정, 칼 24자루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였다.
1909년에는 상당수의 호남의진이 해체되어 형세가 외로워졌기 때문에 전해산 의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른바 ‘大同昌義團’의 제2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이끈 의진은 대체로 藍浦·扶安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 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上西面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그 후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항쟁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의진을 해산하고 加峽 산중으로 은신하였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고 하면서 스스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옥중에서는 수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게 자세를 흐트려 뜨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사) 이규홍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李奎洪(1881∼1928)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 재질에다 학문에도 착실하여 17, 8세에 문장과 명망이 알려지게 되어 나이 20의 약관에 중추원 의관직에 올랐다. 1905년 乙巳에 왜적의 늑약을 당하자 이에 격분한 이규홍은 “의사는 자신이 국가 존망지추를 당하여 신민으로서 망국의 참상을 안연히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떠한 구국운동에도 참여하여 신명을 바쳐 싸워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규홍의 이러한 애국심의 격동은 전통적인 가훈에 의한 부친의 애국심은 물론 부친과 교류가 많았던 李始榮 선생에게 감화된 탓으로 추측된다.
때마침 완산·홍주·전의 등지에서 의병의 움직임이 있었고 최익현이 태인 종성리 임병찬 집에 머물면서 거의를 도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규홍은 그의 나이 26살 되던 1906년 4월 하순경에 박이환·문형모와 더불어 종성리에서 약 4㎞ 떨어진 종석산의 여막에 찾아가 임병찬에게 예를 올려 제자가 됨과 동시에 다시 최익현을 찾아가 거의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규홍이 최익현을 찾아간 것이 윤 4월 8일이었는데, 동월 13일 태인 武城書院에서 열리는 강회를 계기로 거의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규홍은 高山과 益山의 포수를 초모하여 이에 합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규홍은 부친의 도움을 얻어 군기의 조달과 병정의 모집을 서둘렀으나 워낙 시일이 촉박하여 무성서원 의거일에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12일에 임병찬에게 글을 올려 익산지방의 의병을 출동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하여 무성서원 발군에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의병의 모집과 군자가 갖추어지는대로 며칠 뒤 뒤쫓아 종군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이후 박이환과 문형도, 그 밖에 몇 사람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산포수를 불러 모으고 뜻을 같이 하는 지사들을 규합하였으나 11월 21일에야 겨우 발정하였다. 군병의 숫자는 밝힌 바 없으나≪梧下日記≫에는 약간의 군기와 동지 수십 인이 발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는 최익현 휘하의 의병이 무성서원을 출발하여 정읍을 거쳐 순창에 주둔하였을 때였다. 이규홍의 의병진은 순창으로 직행하기 위하여 전주를 거쳐 22일에 임실 길담에 도착하였다. 이 때 순창에 주둔한 최익현 의병진은 왜병의 지휘를 받은 전주·남원·광주의 관병에 포위되어 거의 무너져 흩어지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튿날인 23일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최익현·임병찬 외 11명마저 관병의 손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형세 속에서 이규홍은 감히 진군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인솔했던 의병들에게 다음 기회를 얻어 재기할 것을 약속하면서 해산을 명하고 27일에 귀가하였다.
이듬해 1907년 2월 임병찬이 대마도에서 귀국하자 이규홍은 곧 동월 10일 박이환·문명모를 대동하고 임병찬을 찾아가서 최익현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재거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고, 그 해 5월에는 의병봉기를 막기 위한 兵站이 각 처에 설치되더니 8월에는 마침내 한국군이 해산되어 국권이 완전히 일제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때 서울에서는 시위병들의 항전이 벌어지고 해산당한 군인들이 전국에 흩어져 의병전쟁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세에서 이규홍은 그 해 9월 동지 박이환·문형모와 상의하여 재거의 뜻을 모으고, 먼저 동지 몇 사람을 각처에 파견하여 모름지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규홍은 박이환·문형모와 더불어 밤을 새워가면서 거의에 대한 구체적인 방략을 세워 나갔다. 10월 16일 이규홍은 임병찬에게 서한을 띄워 “나라가 망하여 가는 때를 당하여 비록 우매하지만 장차 거의를 단행코자 한다”는 의도를 밝히고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임병찬은 “신중을 기하여 거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부터 가재를 정리하여 얻은 수만원의 자금으로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준비하자, 이 소문을 들은 각 처의 동지들이 모여들었다.≪오하일기≫에는 이 때 초모에 응한 의병들의 수가 257명, 구입한 양총이 100여 자루, 화승총이 200여 자루, 탄환이 20여 두, 화약이 10여 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동생 李奎連이 쓴 가장에 보면, 11월 초 관동에서 출병할 때, 출진 이후 고산·진안·장수·용담 등 8군의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천여 명이라고 하였다.
출병 당시 의병진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義兵將 李奎洪 副 將 박이환 參謀長 문형모 參 謀 宋致玉 金鳳佑 安宗文 崔寬鎬 金好 金漢靖 李相根 第一支隊長 趙在榮 第二支隊長 柳池明 第三支隊長 韓性信 第四支隊長 李原伯 第五支隊長 任成白 第六支隊長 崔周敬 第七支隊長 金文玉
1907년 11월 6일은 출진하기로 계획된 날이었다. 이 날 오후 관동을 떠난 의군은 익산·여산·고산을 거쳐 9일에 용담 대불리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규홍은 거의한 뜻을 하늘에 고하면서 결사보국할 것을 맹세하고 군기를 엄수하여 승전을 기약하는 고천제를 올렸다. 이규홍의 의진은 11월 15일 고산군 가금리에서 처음으로 왜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29명을 사살하였으나 아군도 21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가금리는 제2지대장 유지명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 때 이 지역에서 의진에 합류한 의병이 백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또 고선·여산·익산 삼군의 접경지역으로서 평야지에 근접하여 있으면서도 심산유곡과 구비구비 연결된 산령으로 요새지가 많다는 조건 때문에 의진과 왜군은 여산과 익산 땅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0여 일이나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규홍 의진은 12월 5일부터 둔지를 진안·장수·용담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가면서 왜병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 때의 전과는 왜병 44명이 죽고 아군은 7명이 전사하였다.
의진은 용담 주차천에서 1908년 새해를 맞았다. 의진은 새해의 명절에도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초사흘에 이르기까지 진산·금산 등지를 계속 행군하면서 왜군과 접전하였고 그 결과 왜병을 56명 죽이고 아군 57명이 전사하였다. 출진한 후 왜군 129명을 사살한 것은 대단한 전공이었지만 85명이란 아군의 살상은 치명적인 손상이 아닐 수 없었다.≪오하일기≫에는 당시 전투현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산간지대를 누벼야만 하는 의병들의 어려운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난관을 헤치면서 고투한 의병들의 노고를 낱낱히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의병들의 애국심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일제는 이른바 토벌대를 동원하여 의병들을 공격하였는데 무기의 강약이나 군사의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왜군을 당할 수 없어 의병들은 장기항쟁에 들어가야만 했다. 1908년 2월 초순 일병과 합세한 관군토벌대는 의병의 가족들을 붙잡아 가거나 포살하는 한편 자수한 의병들에 대해서는 죄를 사면한다는 방을 전국에 유포함으로써 의병들의 사기를 꺾으려 하고 있었다. 이규홍은 이 때 남은 잔병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4월 15일 공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수하에 남은 의병들의 수가 10여 인에 불과하였고 참모진도 박이환과 문형모 뿐이었으므로 결국 의진을 해산하여야만 했다.
의진을 해산한 후, 이규홍은 부장 박이환, 참모장 문형모와 더불어 익산·고산·여산·태인·옥구·임피·용안·함열·정읍 등지를 숨어 다니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3년 임병찬이 장차 호남 각지의 의사를 규합하여 재기하였는데, 이 때 이규홍은 문형모를 내세워 이에 동참하였다. 그 결과 1914년 3월에는 대한독립의군부가 창립되고 문형모·박이환과 함께 익산·임피 등지의 대표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거의 계획마저 일제에 발각되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규홍은 1917년 10월 일본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五道山城에서 일본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였으며, 만주로 옮긴 뒤에는 김좌진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아) 김동신
金東臣(1871∼1933)은 충남 회덕군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 홍주에서 기병한 閔宗植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그는 민종식에게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 紫原庵으로 들어가 유진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 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한국군 해산 후, 의병전쟁이 크게 확대되어 가자 그는 전북 정읍군 내장산 白羊寺에서 奇宇萬·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기를 모았다.
1906년 9월 10일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의 우편 취급소와 警務顧問 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다. 그의 순창 거의는 이 해 9월 15일 고광순의 同福 순사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 해산 후 전라남북도에 있어서의 의병 봉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듬해 8월 4일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 沙場에서 일군과 격전하여 적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동년 8월 11일 고광순 의진과 함께 鷹嶺에서 적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행군하여 구례 蓮谷寺에 당도하니 그 지역은 천혜의 험지로서 의병근거지로 적합하였다. 그가 세운 單旗에는 ‘머지 않아 국가를 회복한다’라는 뜻으로 ‘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썼다. 그리고 6시 경에는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군경을 격퇴시킨 후 군기를 노획하였다.
그 해 8월 17일 오전에 약 8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함양군 左田에서 일군경 20여 명과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9월 4일에는 의병 600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月城에서 일병 40명을 공격하였고, 9월 15일 의병 100명을 거느리고 이석용 의진과 합진하여 전북 용담군 深原寺에서 일병 47명과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1908년 2월 약 1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군 九郞 일대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일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북 무주군 篁川面 三谷里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三南義兵大將’이라 칭하고 8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梅學 일대에서 일병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호남·경남 일대에서 종횡무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중 뜻하지 않게 신병이 생겨 남몰래 고향인 충남 회덕군 炭洞面 德津洞에서 치료하다가 대전경찰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辭令書 2매, 일기장과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주민에게 낸 명령서 7통, 잡서 1봉 등 그간의 그의 활약상을 담은 일체의 기록문서가 있었는데 모두 일경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