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3권 국권회복운동Ⅳ. 항일의병전쟁4. 의병전쟁의 발전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1) 전시국외중립 외교
            • (2) 전시국외중립 선언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 3) 민간인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대일 보호국화 저지 외교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 2) 고종의 3특사
          •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 4) 특사 파견의 파문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 2. 시민의 투쟁
          • 1) 지방세제의 시행과 시장세 징수
          • 2) 순천·용천 양시의 시장세 반대운동
          •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 3) 한국민의 반대운동
            • (1) 언론·상소 투쟁
            • (2) 농광회사의 설립
            • (3) 보안회의 투쟁
          •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1) 일본의 차관공세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1) 국채보상운동의 확산
            •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 3)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3) 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영향과 의의
          •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 3)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1) 보안회
            • (2) 공진회
            • (3) 국민교육회
            • (4) 헌정연구회
          • 2) 대한자강회
            • (1)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조직
            • (2) 대한자강회의 계몽사상
            • (3) 대한자강회의 자강독립운동
          • 3) 신민회
            • (1) 신민회의 창건과 목적
            • (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
          • 4) 대한협회, 기타 학회들
            • (1) 대한협회
            • (2) 계몽학회들
          •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 2. 애국계몽사상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과 형성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 (2) 애국계몽사상의 형성
          • 2) 국권회복의 논리
            • (1) 자강독립론
            • (2)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
          • 3) 국민국가건설의 논리
            • (1) 국민국가론
            • (2) 입헌군주정체론과 공화정체론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1) 신문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교육구국운동
            • (1) 근대학교 설립운동
            • (2) 교과서 편찬운동
            • (3) 의무교육 실시운동
            •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 3) 경제구국운동
            •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 (2) 국채보상운동
            • (3) 부동산침탈 반대운동
            • (4) 민족경제 건설운동
          • 4) 정치구국운동
            • (1) 을사조약 반대운동
            • (2) 고종양위 반대운동
            • (3) 한일합방 반대운동
          • 5) 민족문화운동
            • (1) 국어국문 진흥운동
            • (2) 국사교육 강화운동
            • (3) 민족적 종교운동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1) 독립전쟁론의 대두
            •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 4. 105인사건
          • 1) 사건조작 배경
          •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 4) 사건 연루자의 수난과 사회경제적 성향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 2) 갑오의병의 전개
          • 3) 을미의병의 전개
            •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 (2) 단발령 공포와 을미의병의 확대
          •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 2. 을사의병
          • 1) 을사의병의 재기
          • 2) 전국 의병의 활동
            • (1) 경기·강원도
            • (2) 영남지방
            • (3) 호서지방
            • (4) 호남지방
            • (5) 양서지방
          • 3) 을사의병의 의의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1) 정미7조약
            •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 (3) 남대문 전투
            • (4) 지방진위대의 항전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 3) 이강년의 의병활동
            • (1) 이강년의 활동
            • (2) 무기와 전술
            • (3) 의병의 조직과 군율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 (2) 유인석의 지구전론과 근거지 문제
            • (3) 근거지 구상에 나타난 유인석 사상
            •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 2)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 3) 이념상의 특징
          • 4) 조직상의 특징
          • 5) 활동상의 특징
          • 6) 의병전쟁의 의의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일본군의 새로운 공세,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시작된다. 그에 앞서 호남지방의 의병전쟁에 대하여 개관하기로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말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지도사상은 衛正斥邪思想이다. 그 사상의 2대 연원이 경기도의 華西 李恒老(1792∼1868)와 전라남도의 蘆沙 奇正鎭(1798∼1876)이다.

1907년 8월에 한국군이 해산되자, 호남지방에서 의병전쟁의 봉화를 올린 것이 1907년 9월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奇三衍이 결성한 ‘湖南倡義會盟所’라 하겠다. 그는 기정진의 從侄이 된다. 따라서 회맹소의 수뇌부 구성은 주로 유생으로 되어 있었다. 수뇌부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1265)

大將 奇三衍 統領 金容球 參謀 金燁中·金樹鳳 從事 金翼中·徐錫球·全垂鏞(全海山)·李錫庸·金致坤·朴永健·鄭元淑·成喆修·朴道京 先鋒 金 準(金泰元) 中軍 李哲衡·金奉奎 後軍 李南奎 軍糧 金泰洙 總督 甘孝仁 監器 李永和 左翼 金昌馥 右翼 許景和 砲隊 金基淳

회맹소란 명칭 그대로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체이다. 이미 호남지방에서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전라북도 순창에서 거의한 최익현의 의병투쟁이 실패한 뒤에 불이 꺼지고 있었으나 회맹소가 깃발을 올린 데 자극을 받아 의병활동이 활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기삼연 자신은 1908년 정월에 체포되어 光州에서 총살되었으나 회맹소의 수뇌부들은 각지에서 의병세력을 온존하면서 그 대열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기삼연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의 수뇌부는 그 중심이 유생들이다. 그러나 기삼연은 김봉규나 박도경과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대담하게 수뇌부에 등용하여 중책을 맡기고 있다. 그는 1896년의 ‘乙未義兵’ 때에도 역시 전라남도 장성에서 거의를 계획하다가 전주진위대에 체포된 바가 있다.

이 무렵 고종의 宣諭에 의하여 유생의병장들이 의병부대를 해산하자 그는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고 한탄하였다 한다.

기삼연이 총살된 후 김용구가 都統領으로서 그 부대를 인솔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도 1908년 4월에 일본군과의 격전중에 총상을 입었다. 그 부대를 인계받아 투쟁을 계속한 것이 박도경이다. 기삼연이 체포된 직후인 1908년 2월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장성 社倉 부근:약 50∼150명의 집단 1개와 40∼50명의 집단 1∼2개, 의병장 김용구와 김준(김태원).

② 태인∼순창 간:약 50∼60명 내지 10∼20명의 집단이 각처에서 출몰, 의병장 이철형(이진사).

③ 영광∼함평 간:약 50∼60명 내지 20∼30명의 집단 1∼2개, 의병장 김율·조성인

④ 무장:약 20∼30명의 집단 1개, 의병장 불명.

 (洪淳權,≪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硏究≫, 서울대 출판부, 1994, 107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삼연이 총살된 후에 그 후계자가 된 것이 김용구이다. 그도 부상을 당하여 장성의 白岩山에 은신하게 되었으나 기삼연-김용구의 인맥에 속하는 의병장들이 다음과 같이 각처에서 분산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삼연 의병부대의 봉기 이후 호남지역에서는 새로운 의병부대들이 여기 저기서 봉기하였다. 이들 새로운 의병부대들이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 가운데 많은 의병부대들은 기삼연의 연합 의진과 직접·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제측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金泰元·金聿 형제를 비롯하여 金容球·이석용·吳聖述 등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기삼연의 참모 내지는 部將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보다 다소 늦게 독립부대를 형성한 朴道京·曺京煥·金公三·全海山 등의 의병장들도 기삼연의 의병봉기에 참가한 인물들이며, 또 1908년 이후 새롭게 출현한 의병부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들의 의병진으로부터 재차 분화된 의병부대들이었다(洪淳權,≪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硏究≫, 102쪽).

전라남도 장성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와는 독자적으로 전라북도에서도 李錫庸 부대가 활약하고 있다.

그는 1907년 8월에 진안에서 거의한 후 임실·남원·장수 등지에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 접어들면서 일본군경의 공세가 강화되자 1908년 3월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休兵待時之計’로 들어갔다. 그러나 1913년 10월에 임실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전주에서의 공판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문:책을 많이 읽었다는데 과연 그런가.

답:4서3경에 諸般百家語(諸子百家)도 또한 섭렵했다.

문:재산은 있는가.

답:寒士에게 어찌 재산이 있겠는가.

문:어떤 목적으로 감히 폭도가 되었는가.

답:너희들 일본인을 배척하기 위해서다.

문:통솔한 부하가 3백 명이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답:그렇다.

문:조선은 일본에 합방된 후 帝恩이 망극하여 일반 臣民 모두 기뻐하는데 당신은 충실한 신민이 될 생각은 없는가.

답:(크게 웃으며) 오히려 대한의 鷄犬이 된다 하더라도 너희 나라의 신민은 되고 싶지 않다.

문:의병이란 명칭을 쓰면서 인명을 살해하고 마을에 방화하고 공금을 강탈한 것은 불법이 아닌가.

답:背韓附日者에 대해서는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방화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금에 대해서는 본래 대한의 국세이다. 군주가 잃은 것을 신하가 취하고, 부친이 잃은 것을 자식이 취하는 것은 이치가 당연한 일인데 어찌 불법이라 하겠는가(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資料篇,<湖南倡義大將李錫庸全州公判記>).

그는 판사가 사형을 선고해서 퇴장한 후에 집안 일에 대하여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여 자식과의 면회를 요구했다. 아들이 앞에 나서자 그는 태연하게 다만 ‘孝’와 ‘友’에 관한 수어를 유촉하였을 뿐이었다.

전라남북도에서도 기삼연이나 이석용 같은 유생 출신 의병장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나 1909년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그 양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앞에서 게재한<표 2>를 살펴보면 우리는 1908년 후반기에 최고조에 달한 의병전쟁이 점차 하향선을 걷게 된 1909년 전반기에 전라남북도가 전국적으로 보아 의병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되는 추세를 쉽게 알 수 있다.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1908년 후반기의 전국적인 전투횟수는 1,976건에 달한다. 이 시기 전라남도에서의 전투횟수는 270건(13.9%)으로 강원도의 272건(13.8%)과 거의 비슷하다. 이 양자가 1, 2위를 차지한다.

전라북도는 219건(11.1%)으로서 황해도의 232건(11.7%), 충청남도의 217건(11.0%)과 거의 비슷하다. 이 시기의 전투횟수는 전라남도, 강원도, 황해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의 순이다.

또한 1908년 후반기에 각 지방에서의 일본군경과의 전투에 참가한 의병수로 본다면 전국적인 참가 의병수 82,767명 중에서 강원도가 압도적으로 18,599명(22.5%)을 차지하여 1위이고, 전라남도의 10,544명(12.7%), 전라북도의 9,960명(12.0%), 황해도의 7,998명(9.7%), 충청남도의 7,666명(9.0%)의 순으로 된다.

즉 전투횟수는 전라남도와 강원도가 거의 비슷한데, 그에 참가한 의병수로 보아 강원도가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병부대의 규모가 전라남도에 비해서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1909년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지방별로 본 의병전쟁의 양상이 일변한다. 이 시기 전국적인 전투횟수가 1,738건인데, 전라남도가 31.5%를 차지하는 547건, 전라북도가 15.8%를 차지하는 273건, 양자를 합치면 47.3%를 차지하는 820건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의병수로 보더라도 전라남도가 45.6%를 차지하는 17,579명, 전라북도가 14.5%를 차지하는 5,576명, 양자를 합치면 전국적인 참가 의병수의 60.1%가 되는 13,155명이 전라남북도에 집중하고 있다.

고쳐 말한다면 전반적인 의병전쟁이 하향선을 걷게 된 1909년 전반기에 전국적인 전투횟수의 47.3%, 참가 의병수의 60.1%가 전라남북도에 집중한 셈이 되겠다.

전라남도를 진원지로 하는 의병활동은 직접 전라북도에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상의병투쟁으로 파급되었고 제주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전라남도 의병이 봉기하여 해상을 왕래하면서 남한의 등대를 습격하고 드디어는 제주에 들어갔는데, 高承天·金光一(金先一의 오자) 등이 또한 이에 합세하였다(黃玹,≪梅泉野錄≫권 6, 융희 3년 기유).

당시 제주도에서는 高承天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李中心·金萬石(별명 金先一)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3월에 거의할 예정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고승천·김만석 등이 사전에 체포되어 3월 4일에 총살을 당하자 실패하고 말았다.1266)

이와 같이 1909년 전반기에 접어 들면서 여타 지방에서는 겨우 산발적이며 소규모적인 저항이 지속되는 속에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역에서는 날이 갈수록 의병의 기세가 왕성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중과 의병이 일체가 되어 상호간에 서로 변신하면서 전지역을 뒤덮게 되었다.

1909년 전반기만 하더라도 전라남도 지역에는 관내의 수비대 외에 타도로부터 병력을 증원하여 토벌작전을 벌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또한 1909년 4∼5월에 이 지역에 헌병임시파견소를 45개소나 증설하고 7월부터 약 1개월에 걸처서 토벌작전을 전개했으나 결국 “마치 지엽만 치고 근간을 베지 못했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일본군 측에서는 종래의 제12여단 대신에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2개 연대를 여기에 투입하여 종래와 다른 새로운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일본군측은 이 지역에 대한 토벌작전이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그러나 폭도의 행동이 매우 교묘해져, 백주에 양민으로 변장하고 공공연하게 郡衙 소재지를 배회하여 官署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기회가 있으면 바로 刺客的인 행동을 감행하여 총기·탄약·財貨를 약탈하고, 혹은 虛를 틈타 저격기습을 시도하는 등 隱現出沒을 파악하기 어려운 자들이다(朝鮮駐箚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35∼136쪽).

즉 의병부대의 행동방식은 백주에 공공연하게 지방의 중심지에 들어가 정찰하고, 적의 허점이 있으면 기습하는 전형적인 게릴라전술이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화승총과 38식 소총과의 싸움’이었다. 화승총과 38식 소총의 성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유효 사정거리 400야드(약 800m)에 매분 8내지 10발을 사격할 수 있는 정예무기 앞에서 의병들은 먼저 화승에 불을 붙여 들고 다른 한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했으니 차마 볼 수 없는 전투광경이었다. 화승총의 유효사정거리는 불과 20보 내외였다니까 이런 고대 무기로 3년 동안 막강의 일본군과 대적한 의병의 감투정신에 우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朴成壽,<1907∼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하여>,≪韓國史硏究≫1, 1968).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종래의 화승총을 개량하여 雷管式 화승총이 보급되어 있는데도 일본군은 큰 관심을 돌리고 있다.

폭도는 2월(1908년) 이후 화승총의 개조에 고심하여 4월 초순까지는 그 대부분을 뇌관식으로 개조했다.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했다 해서 38식 소총에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근대적인 장비로 잘 조직되고 훈련된 일본군경에 대하여 어제까지 농민이거나 산포수들이었던 의병들이 그 나름대로 창출한 전술이 바로 게릴라전술이라 하겠다.

‘남한대토벌작전’이 실시되기 직전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일본군측이 파악하고 있던 실태에 의하면 대원 200명 이상의 유력한 의병부대만 하더라도 영광과 무안지방에 할거하는 전해산 부대(500명), 능주 부근에 할거하는 沈南一 부대(500명), 보성 부근에 할거하는 安圭洪 부대(450명), 역시 보성 부근에 할거하는 林昌模 부대(300명), 광양 부근에 할거하는 姜武京 부대(300명) 등이다.

100명 이상의 의병부대도 黃俊性(150명), 金京久(130명) 등 6개 부대가 활동중에 있었다. 전라북도의 의병부대는 100명 이하의 소부대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군이 주목하고 있던 부대는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의 폭도 가운데 거괴인 심남일·강무경·安桂洪(安圭洪)·임창모 등의 일당은 약간 그 취향이 달라서 부하의 비행을 엄하게 戒飭해서 약탈을 금하고, 오로지 한국인을 선동하여 폭동의 영속과 도당의 강대에 힘쓰는 자들 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은 이 폭동의 영속적이고 항구적인 지속에 의하여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정책의 실패를 가져오게 하고, 통감정치의 부당함을 명시케 하여, 마침내는 열국으로 하여금 이에 간섭케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安固하게 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고 있는 자들이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2쪽).

이 시기 전라남도의 의병부대들은 종래 기삼연이 조직한 유생 중심의 ‘호남창의회맹소’와는 그 규모에 있어서나 성격에 있어서 확연히 구별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의병장들의 전략사상은 이미 유교적인 위정척사사상을 뛰어 넘고 있다. 군중과 일체가 된 의병부대에 대한 토벌작전은 스스로 군중을 휩쓸게 하는 무차별적 학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정부는 1909년 7월 4일에 한국합방에 관한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호남지방의 의병부대들을 소탕하는 것이 초미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1265)金義煥,<奇三衍>(≪抗日義兵將列傳≫, 正音社).
1266)高昌錫,<1909년 濟州의 義兵運動>(濟州道 編,≪濟州抗日獨立運動史≫, 제2장, 1996).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