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권통문>에 나타난 여성 사회진출관
규문밖의 세상일과 담을 쌓고 생활했던 한국여성들에게 처음으로 사회진출 의지를 조성할 수 있게 한 직접적 배경으로는 개신교 여자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여성들의 한국내 활동과, 개화선각자들에 의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운동이라 하겠다.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독립신문≫은 창간 논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의 평등한 인간권리론을 주장하였다.750)
≪독립신문≫은 민력과 국력 양성 차원에서 여성교육과 여성사회참여를 주장하였다.≪독립신문≫이 제시하는 남녀동권 성립시의 국가적 유익론은, 첫째 지혜있는 부인들도 국사를 의논하는 데 참여할 수 있어 정치를 진보케 할 수 있고, 둘째 부부간에 가사를 서로 의논하여 가도를 흥왕하게 할 수 있고, 셋째 열살 이하의 자녀교육은 어머니의 담당이므로 학문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자녀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751) 이와 같이 국익과 직결된 평등적 여성교육론은 사회적 호응이 높았고, 특히 지도층 여성계를 크게 각성시켰다. 그 결과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 양반부인 300∼400명이 뜻을 일으켜 우리 나라 최초의 여권선언문인<여권통문>752)을 발표하였다.
<여권통문>의 내용은, 첫째 여성은 병신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어야 함에 대한 주장이다. 온전한 인간이란 곧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갖는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문명 개화정치를 지향하는 새 시대를 당하여 온갖 구법과 구습이 개혁되고 있는데, 오직 여성들만은 옛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과 같다고 표현했다. 여성은 먼저 의식의 병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둘째는 남자와 똑같은 온전한 신체를 가진 평등한 인간인 여성이 어째서 평생동안 깊은 규중에 갇혀 남자의 절제를 받아야만 했는가 라고 강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것의 역사적 해답을<여권통문>에서는 사나이가 벌어다 주는 것에만 의지하여 사는 경제 무능력적인 병신이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여성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능력을 가져야만 평등한 인간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며, 동시에 여성의 사회진출의 절대적 필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셋째는 여성의식을 깨우치고 사회진출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居內而不言外하며 惟酒食是議”라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관으로부터 당당하게 벗어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여학교 설립을 스스로 해내겠다고 선언하였다.753)
여성의 직업을 가질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를 양반사회 여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처럼 당당하게 선언하자, 당시 온 사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제국신문≫은 “우리 나라 부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며 이런 사업을 창설할 생각이 날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진실로 희한한 바로다”754)라고 찬탄을 머금은 평을 하였다.≪황성신문≫도 “하도 놀랍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을 제각하고 이를 기재한다”755)라고 하고<여권통문> 전문을 게재하였으며,≪독립신문≫은 “여성교육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 정부 기구에 불필요하게 쓰이는 20여만 원과 급하지 않은 군사 증액비 100여만 원을 모두 여성교육비에 쓰라”756)고 주장하였다.
한국 초기여성운동에서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의 획득은 여성운동의 중심 과제이며 기반이었다. 여성교육의 기본 도구는 여학교이다. 이에<여권통문>공표에 참여하였던 부인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贊襄會를 조직하고 회원으로부터 수합한 회비를 가지고 우리 나라 최초의 민립여학교인 順成女學校를 설립하였다. 순성여학교는 관립여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존속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여학교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찬양회는 순성여학교 후원단체이면서 동시에 여학교에 다닐 수 없는 대다수 부인에 대한 교육사업을 담당하였다.
그러면 우리 나라 초유의 여권운동을 발의하고 준비한 주동 인물은 누구인가. 찬양회의 임원진이 회장(李養成堂), 부회장(金養賢堂), 총무원(李昌吉堂·太養眞堂), 사무원(高貞吉堂)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여권통문>준비 핵심인물들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중 김양현당이 순성여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고정길당과 몇 명의 외국부인들이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김양현당은 우리 나라 여성교육을 위하여 스스로 자각하고 사회진출을 한 선각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된 여학교보다 10여 년 뒤늦게 출발하였으나, 사회적 반영의 면에서 볼 때 자못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김양현당은 북촌 부인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西京(평양) 태생으로 자녀없이 과부가 된 후 서울로 와서 북촌 양반부인들과 교유하였고 자신의 자산도 꽤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촌부인이 아닌 그가 찬양회의 부회장과 여학교 교장직을 맡은 것으로 볼 때 그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개화의식이 높은 여성이었음이 틀림없다. 순성여학교가 개교한 1899년은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세력이 보수적 정치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던 때였으므로 찬양회 활동도 위축되어 학교운영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또한 고종황제가 약속하였던 관립여학교 설립도 의정부 회의에서 기각되어 설립 가망이 무산되었다. 이처럼 이중삼중의 어려움 가운데에서 김양현당은 사재를 털어 학교운영자 겸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03년 3월 자신이 죽은 후 “저 어린 여학생의 교육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선각적 교육자로서의 유언을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다.757) 김양현당은 우리 나라 여성교육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재산을 올곧게 바친 한국 초기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다.
찬양회의 서기이자 순성여학교의 교원인 고정길당도 북촌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함경도인으로 1860년대에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하여 귀화한 한국계 귀화러시아인이다. 그가 내한한 것은 친러세력이 컸던 1895년쯤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세계정세와 근대지식에 밝아 그를 가리켜 “無比開化學問한 女中豪傑”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학교가 경영난에 허덕이던 때인 1899년 후반에는 이미 학교를 떠나 서울 무교동에 서양요리점을 차려 돈을 벌고 있었고, 1900년에는 다시 충청도 일대에서 희랍정교회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758)
750) | ≪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 및 9월 5일,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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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 | ≪독립신문≫, 1899년 5월 26일, 논설<여학교론>. |
752) | ≪독립신문≫, 1898년 9월 9일,<녀학교> ≪皇城新聞≫, 1898년 9월 8일, 논설<五百年有>. |
753) | 朴容玉,≪韓國近代女性運動史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57∼64쪽. |
754) | ≪제국신문≫, 1898년 9월 13일, 논설<冀望女校>. |
755) | ≪皇城新聞≫, 1898년 9월 8일, 논설<五百年有>. |
756) | ≪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 논설<여민교육>. |
757)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및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朴容玉, 앞의 책, 57∼73쪽에 의거했음. |
758) | 朴容玉, 위의 책, 7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