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2) 금융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2) 서간도지역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했을 때 한국인의 의식은 사회진화론에 따라 망국불가피설 또는 망국의 현실수용론이 대두했는가 하면, 그에 반대하여 식민지 거부론 또는 식민지 무효론의 주장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망국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매국에 참가하거나 친일행각의 길을 걸었고, 식민지 수용론자는 식민지 현실 속에서 독립을 준비하는 실력양성론을 구상하고 주장했다. 문화운동이나 사회경제운동 가운데 그러한 실력양성론을 추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대한제국의 멸망을 수용하지 않거나 현실로 인정하더라도 그를 거부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거나 해외로 망명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부인한 경우는 자결 순국자가 그에 해당하나 大韓光復會처럼 적극적으로 항쟁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국내에서의 항전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망국과 식민통치 속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망명한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에서 자손이 태어나는 것조차 거부하면서 서둘러 망명한 白下 金大洛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망명하자마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결실이 국내외에서 전개된 3·1운동이었지만, 3·1운동 후에는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여기에서는 3·1운동 후 주로 1920년대의 해외 독립군 또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하여 서술 내용을 보면 해외문제에 앞서 1920년대 식민통치의 특성을 구명하고,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독립전쟁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추적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을 총람하면서 기본 성격을 구명해 보기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후속조처로 강구된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의 국제질서와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의 진행과 폭발, 그리고 사회주의의 확산 등이 3·1운동 후인 1920년대 세계사가 보여준 새로운 특징이다. 그러한 세계사적 특징은 한국사에도 심각하게 반영되고 있었다. 베르사이유체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보장해 준 국제체제이기도 했다. 일본이 1910년대의 무단통치나 1930년대 이후의 전시체제와 달리, 1920년대에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할 수 있었던 여유도 그러한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안정기조라는 국제환경 때문에 가능했다. 그와 같이 문화정치는 국제정세의 소산이었다. 그에 반해 국제적 안정기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한국독립운동은 안정기조 자체가 타격의 대상이어야 했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은 형극의 도정이 예견되었다. 한국인의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외침은 베르사이유 강화체제를 유지하려는 열강들에게는 도전적인 소리였고 귀찮은 소리였다. 그러므로 열강들에 둘러싸인 약소민족해방운동은 열강들의 압제와 봉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많은 지식인이 지친 나머지 민족운동 대열에서 탈락해 가기도 했다. 그렇게 지친 소리가 개량주의였고, 그것을 대변한 글이 李光洙의<民族的 經綸>과<中庸과 徹底>라는 논설이었다. 3·1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崔麟도 자치운동의 時中會를 만들어 변절 행각을 서슴지 않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친 소리가 있었는가 하면 독립운동을 전개한 역사의 본류도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 조직이 지하에서 활동했는가 하면 노농운동과 학생운동이 발전하고 있었고, 해외에서도 만주의 독립군 조직이 1920년대에 이르러 靑山里戰爭 뒤에 3府(參議府·正義府·新民府)체제를 정비하면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3·1운동과 더불어 너나없이 민족과 독립을 외치던 흥분된 분위기는 해가 가면서 가라앉는 가운데 변절할 사람은 변절하고 떠날 사람은 떠나갔다. 즉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독립운동이 한결 정돈되어 갔다.

 3·1운동 직후에는 민족총력항쟁이라는 양상을 나타냈다. 3·1운동으로도 독립을 쟁취할 수 없었고,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국제적 냉대를 당한 한국인이 새롭게 민족 총력을 경주하여 항쟁을 시도한 시기가 1920년대였다.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항쟁이나 노농운동·학생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 등이 새삼스럽게 발달했던 것이나 학술운동·교육운동·언론운동이 전개된 것이나 物産獎勵運動과 協同組合運動 같은 경제운동에 이르기까지 1920년대를 살던 한국인은 자신의 입지에 따라 재주껏 독립운동에 몸바쳤다. 그래서 민족총력항쟁의 시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다가 지칠 사람은 지치고 변절할 사람은 변절해 갔다.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경우에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지친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1920년대 세계사적 조건 때문이라는 이유가 컸다. 그러나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지치면 새로운 활력소를 찾아 부활했다. 그것이 1920년의 청산리전쟁, 1923년의 의열단활동, 1925년 전후의 3부의 항전, 1932년 李奉昌·尹奉吉 의거를 전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가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을 천명했고 아울러 죽음을 담보하면서 끝까지 싸우면서 한국의 절대 독립의 의지가 한국인의 참뜻이요 참모습이라는 것을 과시하였다.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 성격은 일본 본국 경제와 직결된 식민경제, 민족동화정책의 달성, 그를 위한 직접 식민통치의 강행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식민경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을, 192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을, 1930년대에 군수공업의 상륙과 1940년대에 미곡증산계획을 추진했다. 민족동화정책을 위해서는 식민문화와 식민교육을 강행했고, 그러한 식민정책을 달성하자면 식민통치의 서양 제국주의 방법이었던 간접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를 계획하여 1천 4백만 인구의 조선에 2백만 일본인을 이주시켜 지배할 것을 획책하였다. 그러자니 통치비용이 남달리 많이 지출되었다. 그러한 많은 비용의 투자를 외형상 개발 투자로 착각하여 식민지 개발이라는 억설을 펴기도 했다. 그러한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무단통치를 감행했는데 그것이 조선총독부 조직의 완성, 토지조사사업,<조선교육령>의 실시 등을 무단적 방법으로 강행한 것이다. 교원이 칼을 차고 수업한 사례는 세계에서 1910년대 일제 식민교육 현장에서만 있었던 현상이다.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1910년대 무단통치를 중단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제국주의 학자들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1910년대에는 식민지 수탈의 기반을 확립하자면 무단통치가 필요악으로 불가피했다는 것인데 수탈기반을 확립한 연후인 192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수탈 시기를 맞았기 때문에 통치방법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수탈 방식이 1910년대와 같은 무단적 방법이 아니라 관료 조직을 통한 외형상 평화적으로 진행할 착취 방법이 필요했다. 외형상 폭력적이 아니라는 뜻에서 그것을 문화정치라고 했다. 그것이 수탈의 극대화를 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식민통치자들은 비례세제의 세금 수탈과 평양광업소·전매·철도·영림사업 등의 관영사업을 통하여 수탈을 강화하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여 농산물 수탈의 일원적 통제를 기하였다. 1920년대에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을 식민지 수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러 가지 종류의 농업을 쌀 농사로 일원화하여 수탈의 극대화를 도모한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일본의 쌀 공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와 같이 조선의 식민경제는 간접적으로 부의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일본 본국인의 생활을 위하여 존재하였다. 제국주의적 일반 이윤을 추구한 서구 식민지와 다른 점이다.

 한편 1920년대에 신문 발행을 인가하고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는 이유를 들어 문화정치를 했다고 변론하고 있다.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저항을 막을 방도가 없었겠지만, 실제로 교원이 칼을 차고 수업하거나 헌병경찰제 방식의 무단통치는 철폐하여 1910년대와는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20년대의 문화정치란 종래의 무단적 방법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식민문화를 일으켜 조선의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파괴하고 식민성 문화로 변질시키고 변태적 식민정신을 심어 간다는 방침이었으므로 무단통치 이상으로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동아일보≫를 허가할 때 총독부 고등과장 시라가미(白上祐吉)의 말대로 정간·폐간과 회유 등의 방법으로 식민통치에 유익한 언론으로 조종해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종 학교도 식민교육의 기관으로 육성해 갔다.

 그 위에 식민사학을 개발하여 토착민의 지성과 민족문화를 파괴하였다. 1916년에 일으킨 半島史編纂事業을 1922년에 朝鮮史編纂委員會를 설치하여 조직화하고, 1925년에는 朝鮮史編修會로 확대 개편하여 식민사학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京城帝國大學과 朝鮮史學會를 설치하여 조선사편수회의 좌우익으로 삼았다.

 그 무렵에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사조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한편,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의 좌파 이론도 확산되고 있었으므로 그를 봉쇄하기 위하여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1925년에<治安維持法>을 만들어 탄압하였다. 그 해에 군국주의를 교육에 반영하여 중등학교에 군사교련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 중등학교 동맹파업에 군사교육 반대 구호가 등장했던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식민통치가 어떻게 문화정치가 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한국인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독립운동 가운데는 시종 독립전쟁이 중심 위치에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에서 독립전쟁이 활발했던 시기를 보면, 구한말의 의병전쟁,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독립전쟁, 1930년대 후반 만주에서 조국광복회 등의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독립전쟁, 1940년대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독립전쟁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거기에서 1920년대의 독립전쟁만 한정하여 본다면 1919년 3·1운동 후에 국내외 각처에서 일어난 독립군 단체가 추진한 무장독립운동이 그것이다. 1910년대 무장독립운동은 국내에서는 대한광복회와 조선국민회의 활동이 대표적인데 그것은 군사조직이라기보다는 의열투쟁 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해외에서는 서간도·북간도·연해주·몽골·하와이 등지의 독립군기지개척과 그것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봉쇄당한 후에는 서간도 白西農庄軍營이 독립전쟁의 준비체제로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한 1910년대 독립전쟁의 준비체제가 3·1운동을 계기로 폭발하여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먼저 동포들이 망명 이주하여 살던 서·북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각처에서 독립군 단체의 결성이 추진되었다. 서간도에는 백서농장군영을 확대 개편한 서로군정서와 새로 망명한 의병 출신자와 평안도 일대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 인원으로 결성한 대한광복군총영이 있었고, 북간도에는 국민회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의군부 등의 독립군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이 1920년 10월부터 청산리전쟁을 끝내고 그해 연말에 密山에 집결하여 러시아로 넘어갈 때 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는데 그때 10개 독립군 단체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 독립군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東輝의 종용에 따라 러시아로 들어가 자의타의간에 볼쉐비키 혁명군으로 전환하여 洪範圖·李靑天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군으로, 桂奉瑀·李鏞을 중심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군으로 개편되었는데, 결국은 양군이 대립하여 1921년 6월에 自由市慘變을 맞아야 했다.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대한독립군단 단장인 徐一이 그해 말에 밀산 白泡子로 돌아와 자결로 삶을 마감한 것도 개인의 인생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청산리전쟁을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일제에 의해 庚申慘變이 자행되었고, 러시아에서는 4월참변이 자행되었다. 그에 이어 1921년에는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동포들은 독립전쟁에 몸 바쳐 죽고 망국민의 각종 참변을 맞아 죽어야 했다. 나라가 망하고 동포들은 식민지에서 혹은 해외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해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로 망명한 시인 趙明熙는<짓밟힌 고려>를 읊었고 동포들은 그가 남긴 노래를 외우며 재기의 칼을 갈았다.

 1920년의 경신참변과 4월참변, 이듬해의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에 독립군 단체는 재정비되었다. 재정비하는 가운데 몽골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경신참변으로 얼룩진 만주지방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에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1923년에 남만주에서 參議府가, 1924년에 남부와 중부 만주에서 正義府가, 1925년에 북만주에서 新民府가 결성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 연해주에서 결성된 赤旗團이 신민부 지역인 중동선 일대에 들어와 활동하고, 역시 같은 지역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어 독립군 진영에 좌우익의 세력 분화가 일어났다. 그것을 통일전선 또는 협동전선으로 묶어 보려고 1927년부터 만주에서 민족대당 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대당 결성운동은 임시정부 창조파(金奎植·尹海·金應燮)의 국민위원회가 1924년 2월 19일부터 개최한 해삼위 회의에서 결정·포고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곧 민족대당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1924년 말에 만주 반석에서 金應燮을 중심으로 결성한 한족노동당이나 이듬해에 梁起鐸을 중심으로 결성한 고려혁명당이 국민위원회에서 제기한 ‘대독립당’·‘민족대당’·‘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의 여파로 탄생한 것이라고 보면 국민위원회의 민족대당의 제창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후 민족대당운동은 물밑으로 추진되어 1926년 대독립당 북경촉성회가 결성되면서 표면화하여 1927년에 국내외에 크게 확산되었다. 만주에서도 1927년에 金東三이 선봉에 서서 일어났으나 뜻과 같지 않았고, 참의부·정의부·신민부 3당합당운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3당통합도 1930년을 전후하여 국민부와 한족자치연합회로 개편 양립하게 되었다. 아울러 국민부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한족연합회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한편 남북만주 곳곳에 당세를 확장하고 있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채택한 1국1당의 원칙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후 조선인 당원은 모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각처의 유격대에 편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32년부터 몰아닥친 民生團事件으로 희생이 막심하였다. 민생단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생기는 마멸되고 말았다.

 동포들은 이민 초기부터 어느 한 사람이 중국 국적을 얻어 토지를 구입하여 나머지 동포들이 분할하여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을 최대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1926년부터는 전지제도도 금지당하고 거의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참담한 처지에서 토지개혁의 구호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해도 공산주의 세계혁명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공산당에 가입했더라도 민족을 앞세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이 중국 공산당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다. 결국 민생단이라는 유령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누명을 쓰고 5백여 명의 공산주의 중견 지도자가 희생되고 말았다. 민생단사건이 끝난 것은 1936년 초이므로 4년간의 비극이 만주에서 전개된 한국공산주의 운동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

 무장독립운동에는 군사조직의 투쟁과 義士와 俠士의 투쟁형태가 있었는데 의협사의 투쟁을 의열투쟁이라 한다. 의열투쟁을 총괄하여 서술한 최초의 저서인≪의열투쟁사≫를 보면,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1904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의 길로 기울자 李漢應·趙秉世·閔泳煥 등이 자결로 항쟁한 것을 열사의 효시라 했고, 의사의 투쟁은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오적암살단 문제도 있으나 본격적 단계에 이른 것은 張仁煥과 安重根의 투쟁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리고 1910년대에는 대한광복회와 조선국민회의 활동이 의열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계승한 암살단과 주비단 등이 3·1운동에 이은 의열투쟁 단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열투쟁의 이론은 1923년 의열단 선언인 丹齋 申采浩의<朝鮮革命宣言>이 발표되면서 정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열투쟁도 의열단의 결성과 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 방략으로 확립되었다고 이해된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金元鳳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그후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을 창립하면서 해체될 때까지 16년간을 중국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한때 독립운동의 대명사와도 같이 의열단의 명성을 청사에 남겼다.

 의열단의 16년간 활동은 3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는 1919∼1925년의 대한광복회 방식을 계승한 작탄(테러)활동 기간으로 이때는 의열단이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金益相·吳成崙·金相玉·金祉燮 등의 활동이 의열투쟁을 대표했다. 제2기는 1926∼1931년으로 황포군관학교 입교 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간 시기이다. 졸업 후에는 중국 북벌에 참전하고 국공분열 후에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南昌봉기와 廣州봉기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제3기는 1932∼1935년으로 남경에서 의열단 간부학교를 운영하며 다시 국내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다.

 의열투쟁 단체로 또 하나 손꼽는 것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韓人愛國團이다. 한인애국단은 白凡 金九가 이끌렀던 조직으로 1932년의 작전이 불후의 업적으로 손꼽힌다. 李奉昌의 동경의거, 尹奉吉의 상해의거, 李德柱의 조선총독부 폭파추진, 崔興植의 만주 관동청 공격추진 등이 그것인데,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국제적 파장을 크게 일으켰다.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경종이었을 뿐 아니라 1920년대에 침체일로에 있던 임시정부를 기사회생시켰다. 그래서 나라는 망해도 겨레는 망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의열투쟁은 다물단·공명단·병인의용대·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의 활동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이 전개한 무정부주의자의 자치촌 건설운동과 함께 추진한 의열투쟁은 특별히 주목되어야 한다. 앞에서 단재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을 언급했거니와 그것도 무정부주의를 대변한 글이었다. 단재의 또 다른 글인<龍과 龍의 大激戰>도 무정부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단재는 이념으로는 무정부주의, 방략으로는 의열투쟁을 장식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3·1운동과 더불어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것은 3·1운동과 동시에 독립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의식의 반영이었다. 임시정부란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정부이다. 준비정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무엇을 계산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서울·평안도·연해주·간도·길림·상해 등지에서 독립선언과 더불어 공표되었다. 7개의 임시정부가 공표되었는데 거기에서 정부 수립자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서울의 大朝鮮共和國(세칭 漢城政府), 연해주의 國民議會, 상해의 大韓民國臨時政府였다. 그러니까 3자의 교섭으로 통합이 추진되어 1919년 9월에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통합정부를 수립하였다. 거기에서 놀라운 것은 어느 것이나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부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합정부를 수립할 때 만든 헌법에 당장에 급하지도 않은 삼권분립까지 표방한 민주주의의 이상을 나타낸 것은 정식정부를 예상한 준비정부로서 만전을 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식정부 수립이 요원해지자 임시정부의 헌법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조항만 두게 되었다. 그것이 1925년과 1927년의 헌법이다. 그후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만든 헌법에 이어 1944년의 헌법에서는 광복을 전망하면서 다시 준비정부로서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권력구조를 나타낸 정부형태의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변천에 대하여는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정치사에서는 권력구조를 중시하기 때문에 헌법의 변화, 즉 정부형태의 변화를 기준해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사의 각도에서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1940년 光復軍의 창설을 기준하여 변천시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시기구분은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곳에 따라 상해시기(1919∼1932), 이동시기(1932∼1940), 중경시기(1940∼1945)로 나누는 것과 일치하므로 이해하기가 편리하다. 이 글도 그러한 용례를 따라 상해시기의 임시정부에 한정해서 살피기로 한다.

 임시정부는 1919년 준비정부로 탄생했기 때문에 정식정부의 수립 준비를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에 집중하는 한편, 각종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정부란 주권의지의 조직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수립은 일본에 대한 여하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독립의 의지를 집약한 표상의 실체였다. 그리고 주권은 최고·절대·유일·불가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권의 존재인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탄생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조직을 정비하면서 국내외 동포를 관할하는 聯通府·交通局·居留民團을 설치 운영한 것이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의 외교적 쟁취가 무산되고 1920년 청산리전쟁에 이은 경신참변 등으로 독립전쟁이 크게 타격을 입은 뒤에 준비정부로서의 임시정부 성격은 희석되고 말았다. 1920년 말 대통령 李承晩이 상해에 도임하여 분란만 일으킨 것을 고비로 준비정부의 위치는 상실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1921년 초에 李東輝·金奎植·安昌浩 등 임시정부 초기의 주도자들이 줄줄이 임시정부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주권의지로 수립한 것이므로 발생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독립운동 전체를 재정비하려고 1921년부터 國民代表會 소집이 제기되었다. 朴殷植·元世勳·安昌浩·金東三 등이 국민대표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어떤 정부이건 정부란 국민적 기반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국민적 기반을 만회하자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3년 1월 3일부터 그해 5월 15일까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보존(李承晩·李始榮)과 개조(安昌浩·金東三·呂運亨)와 창조(金奎植·金應燮·尹海)의 주장이 대립하여 회의는 실패하였다.

 실패의 근본 이유는 통일전선에 대한 이해부족이었다. 보존파의 막후 방해도 그것이었지만 창조파가 국민대표회를 깨고 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상해를 떠나 결렬되고 말았다. 연해주에서 국민위원회가 통일전선에 새롭게 눈을 뜨고 1924년에 민족대당을 제창했을 때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통령 이승만의 변태적 운영 때문에 임시정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여 1923년에는 대통령불신임안을 결의하고 그래도 물러나지 않자 1925년에 대통령탄핵안을 통과시켜 이승만을 축출하고 뒤이어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는 임시정부를 준비정부보다는 독립운동 지도체제에 맞게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것이 1925년의 國務領을 중심한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새 헌법에 따라 安昌浩·梁起鐸·李相龍·洪震·金九 등이 차례로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이때는 1924년부터 국민위원회 인사들이 추진하던 민족대당운동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926년부터는 임시정부 안팎에서 민족대당 결성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때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가 민족대당을 임시정부 위의 최고기관으로 한 以黨工作 체제의 헌법을 만드니, 이것이 1927년의 국무위원회 중심의 관리정부 형태의 헌법이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거리는 온통 민족대당 형성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만주와 북경·천진·상해·남경·무한·광주 등의 관내 곳곳에서도 民族大黨結成促成會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중국국민당의 국공분열 영향으로 국내에서 新幹會가 결성된 이외에 어느 곳의 대당운동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의 분단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안타까운 역사라고 하겠다.

 그러나 두 가지 긍정적 유산도 남겼다. 하나는 민족대당운동을 계기로 정당 결성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1924·1925년 만주에서 韓族勞動黨과 高麗革命黨이 탄생한 후, 1930년부터 朝鮮革命黨(만주)·韓國獨立黨(만주)·韓國獨立黨(상해)·新韓革命黨(상해)이 결성됐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정부를 관리정부 형태로 개편함으로써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移動期의 임시정부를 운영하기에 편리했다는 점이다. 이동기의 임시정부가 왜소하게 보였던 것도 관리정부 형태의 정부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활력소를 찾고 임시정부의 생기를 찾았던 것이 韓人愛國團이 주도한 1932년의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상해의거였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의의 경종인 동시에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이 새롭게 활기를 찾는 쾌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한국독립운동은 잊어버린 임시정부를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국민적 기반을 회복했다는 말도 된다. 국제적으로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나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다시 한국독립운동의 중심 위치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3·1운동에 의해 탄생한 그의 발생가치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발생가치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느냐의 역할가치는 사람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 있다. 많은 한계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을 규제하는 표상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가 다른 나라 독립운동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독립군의 독립전쟁과 의열투쟁, 그리고 임시정부의 개요를 살피면서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거기에서 다시 기억할 것은 한국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임시정부는 한국사에서 볼 때 혁명적으로 추구한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치를 표방하여 한국근대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는 식민지 무효론의 역사적 근거이며 절대독립의 민족적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자가 해방 조국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역사의 순리였다. 그것을 미국 주둔군이 방해하였다. 또 독립군이나 임시정부가 식민지 무효론을 주장하고 절대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해방 후 한국이 독립할 엄연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일본에 배상금을 청구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은 그러한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특히 군사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배상금을 포기한 민족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러한 민족적 과제는 앞으로 있을 북일회담을 통하여 극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1920년대의 한국사에는 독립운동이 민족총력항쟁으로 전개되면서 3·1운동에서 부상한 인도주의가 여러 가지 실천 논리를 찾던 가운데 사상과 방략이 만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가 매력을 끌었다. 거기에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가 원칙으로 국제주의 또는 세계주의를 추구하는 이념이지만 그에 앞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하에 있던 약소민족은 해방운동의 논리를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어디에서 찾더라도 그의 전 단계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독립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이념이기 때문에 국수주의와 구별됐다. 그러한 이치를 외면하고 직접 세계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선전·선동한 공산주의 노선이 있었다. 그것이 한때의 독립운동을 혼돈에 빠뜨렸는데 깊이 반성할 문제이다.

 방략은 정치투쟁·무장투쟁·외교론·실력양성론을 비롯하여 자치론·타협론·비타협론 등,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고 논의되고 있었다. 다양하게 추구되었다는 자체가 민족총력항쟁기에 보여준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가 깊어가면서 자치론이나 타협론은 독립운동에서 탈락해 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가 되면 사회운동이나 문화운동도 새롭게 정비되어 갔다. 그러한 경향은 임시정부나 독립군의 행적을 통해 보아도 분명했는데 그것은 다른 기회에 재론키로 한다.

<趙東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