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임시교통국의 설치와 운영
임시정부는 연통제의 시행과 더불어 국내외 동포를 대상으로 정부수립과 독립사업을 선전하고 여러 독립운동 단체나 개인들과의 연락·접촉을 위해 특별기구로 교통부 산하에 임시교통국의 설치를 계획했다. 이와 관련하여 1919년 5월 12일 제4회 의정원회의에서 내무차관 조완구가 “교통부에 안전한 기관 4개”를 둘 것이라는 시정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이 4개의 기관이 임시교통국으로 판단된다.262)
임시정부는 1919년 5월 교통부 안동지부를 안동현 舊市街 興隆街의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쇼우(George L.Show)가 경영하는 怡隆洋行 2층에 설치하고 책임자로 교통차장에 임명되었던 평북 정주 출신 孔南海를 파견했다. 임시정부는 8월 20일 국무원령 제2호<임시지방교통사무장정>을 공포함으로써 임시교통국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局의 위치를 교통총장이 此를 定”하고 임시교통사무국은 교통부의 郵傳사무와 내왕인원의 接際 사무를 겸장하고(제1조), 직원은 국장 1인, 참사 2인, 서기와 통신원 약간명을 두도록 했다(제2조).263)
임시교통국의 설치 목적은 국내와의 통신연락 및 상해와 국내를 내왕하는 인사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데 있었다. 또한 관할구역을 연통제에 준하게 함으로써 임시교통국 지부들은 분리된 중앙정부와 지방행정기구를 연결하는 기능도 함께 갖도록 했다. 이 외에도 임시교통국은 독립자금 모집에도 관여했다.264)
안동현 교통지부는 국내 거점으로 의주군의 舊 의주 성내에 北區 교통국을, 古館面에 남구 교통국을 확보하고 그 밑에 11개의 교통소를 두어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 일부까지도 관할했다.265) 그러나 임시정부는 1919년 10월 17일 안동 교통지부의 명칭을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바꾸고 관할구역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원으로 국한시켰다.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13일<임시지방 교통사무국 장정>을 개정했다. 달라진 점은 “교통총장이 임명하던 국장·지국장·참사를 교통총장의 保薦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한 것인데,266) 이는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으로 국무총리제가 대통령제로 바뀌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조직도 사무국에 국장 1인, 참사·서기·통신원 약간 명을 두고, 지국에는 지국장 1인 및 참사·서기·통신원을 두도록 함으로써 체계를 한층 정비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는 사무국과 지국의 확대에 노력한 결과 1922년 4월까지 임시안동교통사무국을 비롯하여 강변8군 임시교통사무국, 임시함남교통사무국, 평양·황해도·경성교통사무국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국내는 서울을 제외한 한강 이남지역에는 교통국이 설치되지 못했다.
각지에 설치된 교통국은 교통원을 통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선언문이나 지령,≪독립≫등을 국내에 배포하는 한편, 국내의 사정을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각지에서 모은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江南公司’로 위장한 임정이 중국 우편을 이용하여 선전물을 이륭양행으로 보내면 안동교통사무국에서 이것을 마대에 넣어 중국인을 이용하여 압록강 상류를 통해 은밀하게 의주지국으로 보내 국내에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임시안동교통사무국은 1920년 1월 23일과 1922년 8월 8일 등 두 차례에 걸친 일제의 침탈로 와해되고 말았다.267)
국내지역은 평양지국의 활동이 활발했다. 1919년 7월 목사 鄭晉鉉에 의해 설치된 임시교통국 평양지국은 대한국민회 및 대한독립청년단 등과 결합하여 “假政府(임시정부)의 명령 및 제 정보를 鮮內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의 비밀결사 및 기타 동지들에게 전달하고 상해에 통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임시교통국 평양지국과 평양의 청년단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268)
한강 남쪽을 관할하는 경성교통국은 1919년 11월 이래 황해도 사리원지국과 연락하며 상해에서 오는 문서 및≪독립신문≫등을 각지에 배포하고 독립공채를 발매하다가 1920년 8월에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임시함남교통사무국도 1921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경계가 심하여 지국의 사무소가 빈번하게 이동하고 북청·단천의 지국장들이 사살, 체포되면서 침체되었다.269)
안동과 국내에 설치된 임시교통국은 상해의 중앙정부와 국내외 각지와의 통신연락 및 문서·지령의 전달, 군자금 모금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일제에 침탈되면서 1921년 이후에는 각지에 겨우 통신원 수명을 배치할 정도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는 임시정부와 국내와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1922년 말 이후 임시정부가 침체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262) | 尹大遠,≪大韓民國臨時政府의 組織·運營과 獨立方略의 분화(1919∼1930)≫(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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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 ≪독립≫, 1919년 8월 21일,<國務院布告令>. |
264) | 윤대원, 앞의 책, 76쪽. |
265) | ≪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 7월 30일. |
266) | ≪독립≫, 1920년 2월 3일. |
267) | 李延馥,≪大韓民國臨時政府 30年史≫(국학자료원, 1999), 123∼126쪽. |
268) | ≪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 11월 4일. |
269) | 蔡永國,<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의 설치와 활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1999), 37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