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1920년대는 일제의 식민통치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시기였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이후 10여 년 동안 헌병경찰제도, 토지조사사업, 회사령 등의 시행을 통해 식민지 지배기반을 구축하였고 한국민족은 이에 맞서 거족적인 3·1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은 당장에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민족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아 分流시키는 호수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정책을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한때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일본의 압도적 힘에 밀려 3·1운동이 민족해방을 이룩하지 못한데다가 기대를 모았던 미국 등 열강의 지원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항일투쟁의 전도는 어둡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민족운동 세력은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활로를 찾아 분화와 통합을 거듭하였다.
그들은 3·1운동 이후, 어떤 세계관에 입각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독립 후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하였다. 異民族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1920년대처럼 다양한 사상·정치·경제운동이 전개된 적도 드물 것이다. 이 가운데 부르주아민족주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독립 이후에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국내의 부르주아민족운동은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근대화의 주체 및 노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로 분화하였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는 주로≪동아일보≫계열, 천도교 신파, 수양동우회 등으로서, 민족의 역량을 양성하려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실력양성론의 처지에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좀더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조선일보≫계열, 천도교 구파 등으로서, 반일투쟁을 적극적으로 계속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들은 비타협적 정치투쟁론에 입각하여 타협적 자치운동에 반대하면서 대중을 계몽하고 신간회운동에 참여하였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서는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교육의 보급,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 한국사와 한국어 연구를 바탕으로 한 민족 고유문화의 수호, 민족기업의 육성 등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의 민중봉기론이 좌절된 이후, 한국민족의 즉시 독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길러 기회가 왔을 때 독립을 도모하자는 주의였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은 1923년 초에 시작되어 불과 1년여 만인 1924년 초에 이르러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운동들은 일제 당국의 탄압과 방해,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적 공세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운동 주체세력의 약체성과 열성 부족 등도 실패의 주요 이유였다. 물산장려운동의 경우 당시 조선인 산업자본은 기술과 자본에서 일본자본에 대항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 운동을 추진한 사람들조차 일본상품 배척운동은 전개하지 않고 오직 조선인이 만든 물건을 사용해 달라는 것만 호소하는 데 급급했다.
민립대학기성운동은 지도부가 적극적인 활동이나 열성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부호들과 민중들의 신임을 잃게 되어 모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운동의 지도부 가운데는 이미 관료로 등용된 사람들, 일제에 타협적 자세로 기울어가던 사람 등이 많았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민중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안이하게 생각하고 이를 회피함으로써 지도력의 한계를 초래하였다. 이들은 점진적으로 실력을 양성하는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사상의 모호성 내지 소극성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자본가 상층을 중심으로 한 자본가계급 육성운동과 민족자본 하층 혹은 소상품생산자를 중심으로 한 토산장려운동이 혼재되어 있었다. 1924년 이후에는 후자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이 좌절되자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는 일제당국에 대해 좀더 타협적인 자세로 기울어 1920년대 후반에는 자치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자치운동의 움직임은 1923∼1924년, 1925∼1927년, 1929∼1932년의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으며, 그 중심은≪동아일보≫계열과 천도교 신파의 崔麟 등이었다. 이 가운데 1926년의 자치운동은 일제 총독부 당국과 연결되면서 그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를 자극하여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신간회를 조속히 결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1930년경에는 신간회 내부와 조선청년총동맹 내부에서도 합법운동, 당면이익 획득운동 등을 내세우며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자치운동은 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계적 운동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단계적 운동론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앞세우며 예속자본으로 전락하고 있던 민족자본 최상층과 정치적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던 일부 타협주의자들이 일제 지배자들과 야합하려 했던 ‘정치적 거래’를 합리화하려는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는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고 그들과 타협하면서 점진적인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들의 타협적·개량주의적 경향은 독립운동으로부터 일보 후퇴한 자치운동론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 지배 아래서 종속적 근대화의 길을 선택하여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실력양성론은 국제사회에서 양육강식을 인정하는 식민주의적 사회진화론이 신흥 조선인 자본가계급의 자본축적 요구와 결합되어 내재화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1920년대의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 운동은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물산장려운동 내부에서 토산장려론을 주장하고 있던 이들은 1924년 이후 우파의 자치운동론에 반대하여 본격적으로 하나의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7년 신간회 결성의 한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신간회 결성 이후에도 ‘신간그룹’을 만들어 자치운동파의 신간회 주도권 탈취 움직임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견해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일정 시점까지 공동전선을 펴야 하며, 신간회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전위분자’를 결집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을 조직하고 그들을 대중적 정치투쟁에 동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이 연장선상에서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1931년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었을 때 소부르주아층을 배제하는 노동·농민 계급만의 진영 편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소 노선을 비판하였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의 대표적 이론가는 安在鴻이었다. 일제시기 그의 정치사상은 ‘자강론적 민족주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한국민족이 부르주아적 근대민족으로의 성장하는 것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부르주아적 발전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소부르주아지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 아래 소부르주아지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민족 소부르주아지층과 노동자·농민 계급의 결합,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민족주의좌익전선이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고 자치운동도 좌절된 이후 국내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은 다시 1920년대 전반기와 같은 문화운동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는 서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호 접근하게 된 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민족주의 좌파의 자립적 근대화 전략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일본의 경제구조 재편정책에 호응하여 기업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우파가 주장한 종속적 근대화의 길 혹은 친일파가 주장한 황국신민화의 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Ⅱ
사회주의사상이 언제부터 한국에 유입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운동의 내부에 수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담당자로 등장했다. 사회주의운동은 당연히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독립 후에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체제의 근대국가를 수립할 것을 지향하였다.
일제시기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한국 사회주의의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의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풍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독자적인 사상체계나 이론을 수립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코민테른과 러시아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명기의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해외에 있거나 극소수의 지식인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중적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 내부에도 사회주의를 수용할 만한 여건은 성숙되어 있었다. 3·1운동 이후 외교독립운동의 좌절에 따른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실망,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개량화, 노동자·농민운동의 발전 등의 요인이 사회주의 운동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여건을 마련했던 것이다. 또 한국 민족운동의 내면적 흐름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은 대한제국 말기에 해외로 망명한 신민회원으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1917년 블라디보스톡에서≪한인신보≫발간에 관여했다. 신민회 이외에 광복회, 대한광복군정부, 철혈광복단 등의 단체들이 한인사회당 주도층의 형성 과정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3·1운동의 폭발을 계기로 한인사회당에 뒤이어 국내외 도처에서 여러 공산주의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연해주에 성립된 일세당, 한족공산당 연해주 연합총회, 아무르주 한인공산당, 치타 한족공산당, 모스크바 한인공산당 등과 국내에서의 서울공산주의단체, 사회혁명당 등이 그것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복잡한 정치정세는 한국의 사회주의운동 세력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이 일어난 후 재노령 한인 정치세력은 이주민 사회의 자치와 안정을 우선시하는 세력과 항일독립을 우선시하는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그리고 이 분화는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회의 간의 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 나아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립으로 연장되었다. 1922년 10월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결렬되자, 사회주의 대열의 통일운동은 와해되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공산당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하였다. 반면에 서울파·화요파·북성회파·조선노동당 그룹·만주공청파 등의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그룹은 각각 국내외에 걸쳐 자신의 세포조직을 경쟁적으로 결성해 나갔다. 특히 국내에서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무산자동맹회·신사상연구회·화요회·서울청년회·북성회·조선노동당 등과 같은 사상단체를 매개로 하여 활동했다. 이면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단체는 표면의 사상단체와는 별도의 정강, 조직체계, 집행부 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그룹은 문화정치 시행 후 공개적으로 결성된 각종 청년단체·노동단체·농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 때문에 대중단체들, 즉 조선청년회연합회·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연맹회 등은 사회주의적 노선의 지도를 받았다.
사상단체는 여러 가지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통일된 공산당이 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종 사회주의 그룹들은 당 창립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1924년에 단일 공산당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결과 화요파·북풍회파·상해파 공산주의 그룹은 공산당 결성에 합의하여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제1차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렇지만 모든 공산주의자 그룹이 여기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은 당 밖에 머물렀다.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대체로 4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창당하여 그 해 11월 신의주사건으로 궤멸되었다. 그리고 姜達永 등이 제2차 공산당을, 金錣洙 등이 제3차 공산당을 재건하였으나 1928년 2월 궤멸되었다. 그 후 車今奉 등이 다시 제4차 공산당을 재건하였지만 1928년 8월 다시 와해되었다. 이것은 물론 탄압하는 쪽인 일제 경찰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1925년은 조선 사회주의운동 선상에서 각 그룹 사이의 분쟁이 격화된 시기였다. 조선공산당과 당외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고려공산동맹) 사이의 분쟁, 조선공산당 내에서의 북성회파와 화요파 사이의 분쟁, 당외 연합반대파(서울파·조선노동당파·북성회파)와 조선공산당 사이의 분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26년 3월 코민테른 제6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이 승인을 받게 되자 조선 사회주의운동은 다시 통일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통합 공산청년회가 성립되었고, 11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되어 그 성원들이 대거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12월에 개최된 제2차 조선공산당 대회를 계기로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인 ML파가 형성되고, 이에 맞서 서울상해파 공산주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1927년 11월과 1928년 2월에 각각 독자적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여 분립했다. 공산주의 세력의 분파투쟁은 당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종파행위임에 틀림없지만, 운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좌우의 편향성을 극복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1928년 말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이 분파투쟁의 폐단에 빠져 있고 당원들이 소부르주아지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유로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을 취소하고 새로운 공산당을 결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12월테제>를 발표했다. 1929년에 개시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해방에 이르기까지 17년 간 지속되었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세계대공황을 맞아 한국에서도 혁명적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30년 북간도 5·30폭동, 5월 신흥탄광폭동, 7월 단천농민폭동 등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선내의 정세를 혁명적인 것으로 과대평가한 끝에 모험주의적 행동을 보였다. 민족주의 좌파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구사하여 1931년 5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해소시킨 것이다.
Ⅲ
일제시기 조선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해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계급·계층을 조직하고 단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1910년대 말부터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부르주아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분립하였다. 양 진영내에서도 여러 정파가 분립되어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을 벌였다. 이러한 현상은 민족의 힘을 결집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장애 요소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임시정부는 출발부터 좌우연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1921년 한인사회당은 임시정부를 탈퇴하여 국내외 민족운동 단체와 또 다른 제휴를 모색하였다.
1924년경부터 국내 공산주의 세력은 혁명적 민족운동과 연대를 모색했다. 여기에는 일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의 개량화,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의 성립, 코민테른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즈음 민족부르주아지 좌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입장 차이를 인정한 위에서 공동전선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결성된 조선사정조사연구회는 기독교계·학계·언론계 인사와 일부 공산주의자를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에 국민당 혹은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기 위해 천도교 구파 등 민족부르주아지 좌파와 접촉했다.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던 서울파 콩그룹은 사상단체 전진회를 내세워 민흥회를 발기했다. 민흥회는 서울파 공산주의자와 물산장려회계 민족주의자와 제휴한 통일전선 그룹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전반기부터 꾸준히 진척되어온 통일전선운동의 바탕 위에서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가 참여한 형태로 결성된 신간회는 전국적 규모로 결성된 통일전선 단체로서 민족운동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신간회운동을 촉발시킨 계기로는 민족주의 우파가 벌인 자치운동에의 견제, 일본 국내 사회운동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1927년 5월부터 지방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에 대거 참여함에 따라 신간회 지회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후 4년 동안에 약 150개의 지회가 설립되어 4만여 명의 회원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은 민족통일전선 단체에 합당할 만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본부의 민중대회 기획, 일부 지회에서 수행한 일제의 말단 지배기구에 대한 투쟁 등을 제외한다면, 신간회가 각 부문 운동을 지도하여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수행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신간회가 이처럼 활동상에 한계를 드러낸 이유로는 비타협적 정치투쟁과 합법적 투쟁 노선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점, 구체적 활동방침을 결여한 점, 개인 가맹제를 채택함으로써 조직 형태상 약점을 노출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신간회의 창립을 전후하여 중국의 민족운동에서도 민족유일당 결성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말까지는 북벌이 단행되면서 중국국민혁명의 열기가 고조된 시기였다. 이러한 정세 아래 1927년부터는 만주에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본격화했다.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민족주의 세력의 분립을 통합하려는 3부통합운동이 그것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 개량주의로 나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민족주의 고립화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상층 연합에 의한 통일전선 방침을 폐기하고 대중투쟁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모색하였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의<12월테제>가 큰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세력의 전술이 이렇게 달라지면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민족유일당은 해체되거나 민족주의자만의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신간회에서는 1929년 6월의 복대표대회에서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주의 세력 고립화 전술은 신간회 내부에서도 구사되었다. 그들은 신간회를 대중조직과 분리시키려고 획책하였다. 1929년 말 민중대회 사건으로 신간회의 중앙 지도부가 다수 검거되자, 1930년 중반 이래 신간회의 지도노선은 합법화·온건화로 기울었다. 합법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신간회 지도부의 움직임은 자치운동과 연결된 것으로 보였다. 합법운동 세력은 신간회를 통해 민족주의 우파까지도 포함하는 폭넓은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신간회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고립시키려고 시도하였던 공산주의 세력은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론적 배경은<12월테제>에서 제시한 방향, 즉 민족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에 대한 평가, 노동자·농민·소부르주아지의 3계급 동맹론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혁명적 정세가 도래한 것으로 판단하고,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를 고립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간회 해소 정책은 신간회를 혁명적 노동조합 쪽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였다. 그렇지만 신간회 해소는 반일적 민족주의 단체는 물론 개인과의 제휴까지도 전면 거부함으로써 민족운동의 기반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간회 해소 문제가 제기되자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대체로 해소를 반대하며 신간회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끝내 해소되자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는 정치운동의 장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동아일보≫·≪조선일보≫가 주도한 민족적 중심단체 재조직운동, 그리고 민족적 표현단체 재건설운동이나 민족단체통제협의회 등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신간회 해소를 전후하여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통일전선을 반제동맹 형태로 구현하려고 애썼다. 반제동맹은 모든 반제국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통일전선의 형태로 제기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로 학생운동 부문에서만 실현되었다.
Ⅳ
일제시기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일제와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과 수탈의 역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맞서 싸운 민중운동의 역사이기도 했다. 민중운동은 농민·노동자·여성·백정·청년·학생 등의 부문운동으로 전개되고 때로는 이것이 전체 민족운동을 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중운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전개되었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전위조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농민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1910년대의 농민운동은 생활상의 요구에 의거한 자연발생적 투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농민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한 것을 전후하여 농민들은 각지에서 소작단체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이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농민운동이 전개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농민운동은 이 때까지만 해도 농촌내 노동운동으로서의 소작운동론이나 노농제휴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조선공산당이 이에 관여한 1926년 무렵부터 소작인조합 등은 중농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된 이후 농민조합은 소작쟁의, 수리조합 반대 투쟁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공산당이 관여한 농민운동은 농민의 일상의 이익을 요구하면서도 일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 안에서 농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천도교계의 조선농민사 운동, 기독교청년회의 농촌개조·정신생활 향상 운동도 일어났다.≪조선일보≫·≪동아일보≫의 한글보급 운동과 브나로드운동과 같은 농민계몽운동도 벌어졌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실질적 주도권은 전자의 농민운동이 쥐고 있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가 되면 조선농민사 등의 개량주의적 농민운동이 활성화된 반면에 조선농민총동맹 계열의 합법적인 농민운동은 위축되었다. 그렇지만 세계대공황의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되어 대중투쟁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조선공산당은 국제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아 빈농 위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를 내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토지혁명을 주장하면서 개량주의적 농민단체의 박멸, 신간회 등의 해소를 요구하였다. 혁명적 농민조합이 활발해진 지역에서는 한때 반해방구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은 지역적 분산성과 고립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운동은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자연발생적인 파업투쟁에 머물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20년대 이후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의 결성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조직된 노동단체를 매개로 하여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의 노동단체는 상이한 직업의 노동자를 망라한 합동노동조합과 직업이나 직능에 따른 직업별 노동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이것이 1927년 다시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 결과 지역이나 직종·산업에 따라 노동단체를 결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1925년을 전후하여 시·군 단위의 지역연맹체가 출현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도연맹체가 결성되었다. 아울러 신문배달·철공·인쇄·양화·양말·양복·목공 등의 같은 직종에서 전국적 연맹체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동단체를 통해 노동자의 조직화가 진전됨에 따라 파업투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1920년대 초반의 파업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등의 생존권 요구를 내건 자연발생적인 투쟁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지역별·직업별 파업투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조직력, 투쟁성, 계급적 연대 등에서 이전에 비해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 말에 일어난 영흥총파업과 원산총파업 등은 노동대중의 의식을 한껏 고양시켰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은 경제적 요구에 기초한 비폭력적 합법투쟁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결합한 폭력적 비합법 투쟁으로 이행하였다.
1928년 서울의 인쇄출판업에서 구체화된 산업별 노조방침은 1930년대 초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등의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노동운동은 생산현장 중심의 운동으로 이행했다. 이와 함께 혁명적 노조운동이 전개되었다. 흥남·서울·원산 등지의 노동조합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혁명적 노동운동은 대중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합법적 노조를 개량주의라고 몰아부침으로써 노동운동을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킨 측면도 있었다.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경제투쟁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라는 특수 상황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 부르주아지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성격이 앞선 측면도 있었다.
일제시기의 여성운동은 소수의 신여성, 지식여성이 중심이 되어 여권운동을 벌이는 데서 출발했다. 3·1운동 직후 대한애국부인회를 비롯한 여자교육회·부인회·여자청년회 등의 여성단체가 만들어져 여성의 인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을 주도한 계층은 부르주아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신여성이었다.
그런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농민 등 기층 여성운동이 등장했다. 1927년에는 부르주아민족주의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협동체로서 전국적인 여성 대중조직인 근우회가 결성되었다. 근우회는 선전과 계몽 활동, 노동과 농민 여성의 조직화, 여학생 운동을 활발히 지원했다. 그러나 1931년 사회주의 활동가의 해소론에 따라 근우회는 사실상 해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여성조직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의 여성부로 전환되어 대중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가정부인·지식여성·소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침체되어 1930년대 말에는 친일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갑오개혁에서 신분제도는 일단 법제적으로 사라졌지만, 일제 아래에서도 백정을 천시하는 풍조는 존재하고 있었다. 1923년 4월의 衡平社 창립은 이런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형평사는 남부지역의 부유한 백정 출신의 지도자와 비백정 출신의 지식인이 백정의 인권과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으로서 출발했다. 즉 자유주의적인 신분해방, 인권옹호 운동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 사회주의와 연계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1920년대 중반에는 형평청년회 등을 통해 개혁적 지도층이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형평운동은 계급운동의 성격이 더욱 짙게 되었다. 그러나 형평사는 1936년 친일적인 大同社로 바뀜으로써 형평운동은 막을 내렸다.
3·1운동 이후 본격화된 청년운동은 1920년대 초반 조선청년연합회와 지방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부르주아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을 아울러 띠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과 학생 사이에 사회주의사상이 도입되면서 사회주의 계열이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고,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되면서 청년운동은 부문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정착되었다. 6·10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은 겉으로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사회주의운동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1920년대 말 조선청년총동맹과 지방청년동맹이 해소되자 노동운동계와 농민운동계의 청년운동은 혁명적 농민운동이나 혁명적 노동운동으로 흡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는 데는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국제혁명운동의 고양, 대중투쟁의 고조 등과 같은 정세 변화가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운동은 약화되었다.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이해 관계만이 강조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鄭在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