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황해도 북률 동척농장 소작쟁의
北栗 東拓農場 소작쟁의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농민들이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전개한 농민항쟁이다.379) 북률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의 토지는 조선시대에는 궁장토로서 수진궁·육상궁·명례궁 등의 궁방전이었다. 따라서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의 농민들은 각 궁방에 보통 3분의 1정도의 賭租를 바치고 조상 대대로 궁장토를 경작해 왔다. 그런데 한말 일제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궁장토는 이른바<帝室及國有財産整理>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토지 소유권 분리 조사사업에 의하여 국유 역둔토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 권력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 일제는 1908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한국정부 출자분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의 농지 1,235정보를 점탈하여 북률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을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일제는 종래 3할 수준의 소작료를 5할로 인상하는 한편, 종래 세습되어 오던 소작권을 5년으로 제한하며 소작인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북률농장의 토지를 계속 확대하여 1924년 소작쟁의 당시에는 2,300정보의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같은 북률농장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북률면에 주재소를 설치하여 3인의 일본인 주재원과 15인의 御用 소작인조합장을 두고 소작농민들을 통제하였고, 정조법과 집조법으로 소작료를 거두면서 수확의 반 이상을 징수함은 물론 소작기간도 3년으로 단축하여 농장을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작료의 경우 5할이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7할 내지 8할의 가혹한 소작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소작기간 3년은 궁장토 시절에 세습적으로 경작할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역둔토 시절의 5년에 비해서도 소작권 상실의 위협이 한층 높아진 것이었다.
나아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24년 봄부터 일본인 농업이민들을 위한 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소작농민의 경작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주민에게 주었고, 이른바 모범농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어용단체인 척식청년단이나 소작인향상회의 회원에게만 소작지를 주는 등 소작농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2년 이래 흉작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4년 추수기에는 평년과 같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였다. 이에 소작농민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동양척식주식회사 북률주재소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는데, 이 때 주재소측은 일본인 농업이민을 앞세워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강탈하거나 혹은 소작인들을 구타하면서 강제로 소작료를 거두는 횡포를 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400∼500여 명의 소작농민들은 1924년 11월 2일부터 5일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사리원지점에 집결하여 연일 연좌시위와 농성을 하면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리원지점에서는 소작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소작료 징수를 강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소작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맺고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서울지사와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쟁의를 확대하여 갔다. 소작농민들의 요구는 ① 소작료 감액, ② 소작권 보장, ③ 부정사원과 조합장 철폐, ④ 이상촌이나 척식청년단 설치 연기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자주적인 권익단체로서 북률소작조합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소작쟁의를 전개하여 갔던 것이다. 그 결과 1925년 1월 북률소작조합 대표 李蒙瑞와 동양척식주식회사측은 일단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사리원지점에서는 그러한 합의를 무시한 채, 그해 2월 5일 미납 소작료를 다시 강제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소작인들은 실력으로 맞서 이들을 쫓아버렸는데, 다음날에는 엽총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일본인과 몽둥이를 휴대한 15명의 향상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소작료 징수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반발하는 400여 명의 소작농민들에게 총을 쏘면서 위협을 가하였다. 2월 13일에는 3명의 집달리와 재령경찰서의 일본인 경찰 6명을 앞세워 소작료 차압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3월부터 시작된 소작계약 때에는 북률소작조합에 가담한 소작농민들에 대해서는 소작계약 체결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소작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모두 소작계약을 거부하기로 동맹하고, 재차 서울에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처사를 규탄하면서 소작권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북률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의 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었고, 그로 인해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북률주재소에 300여 명의 소작인들을 모아놓고 재령경찰서장 입회 아래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① 미납 소작료는 年賦로 함, ② 수해로 인하여 상환하지 못한 사채도 연부로 함, ③ 비료·식량은 소작인이 필요한 한도까지 대부함(3,000석 내외), ④ 일본인 이민 경작지 폐지는 불가하나 그 토지를 한국인 소작인에게 소작하게 함, ⑤ 척식청년단 폐지를 운운하나 최초의 작정 인원인 32인을 반으로 줄여 16인으로 함. 그리고 그들에게 넘긴 소작지는 각 里의 무용한 농지로 대신 충당함, ⑥ 부정사원의 인사조치를 요구하나 회사의 필요에 의하여 전근하게 함, ⑦ 각 里에서 선동자라고 인정되는 소작인 18인의 소작지를 회사에서 인수함, ⑧ 소작인들이 말하는 각 里의 조합장 폐지는 당장에 실시하기 곤란한 즉, 일부 3개소에만 우선 실시한 뒤 차후로 실시할 예정임.
이밖에 추가 補正 조건으로 ① 선동자 18인 중에도 직접 관계자 외에 충분한 悔悟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찰당국과 상의하여 3월 말일 내로 다시 소작하게 함, ② 소작인으로부터 차압한 물품을 전부 해제해줄 터이니 곡물만은 회사에 납부할 것, ③ 척식청년단은 당국이 이미 허가한 바이므로 연기는 절대 불가한 즉, 대신 조합장을 4개월 내에 폐지함. 이같은 3개항을 발표함으로써 쟁의는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379) | 金容燮,<韓末 日帝下의 地主制-事例2, 載寧東拓農場에서의 地主經營의 變動->(≪韓國史硏究≫8,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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