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태평양전쟁하의 학생운동
(1) 비밀결사 흑백당의 활동
1940년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동맹휴학이나 집단시위운동의 방법보다는 비밀결사를 통하여 실력행사를 도모코자 한데 그 특징이 있다. 또한 193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민족주의 색채가 농후한 학생항일운동이 발전되었다.442) 그 대표적인 항일학생운동을 들어본다면, ①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연구회·茶革黨의 항일운동443), ② 함흥중학·영생중학·영생여고·함흥농업·함흥사범학생들의 함흥학생결사의 항일운동444), ③ 광주서중학생의 무등회를 통한 항일운동445), ④ 경복중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黑白黨의 항일운동446), ⑤ 동래중 학생의 조선독립당의 항일운동447), ⑥ 경기중학 학생의 高麗會·槐會의 항일운동448) 등이다.
이처럼 비밀결사들은 민족의 독립, 황민화교육반대, 친일파처단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한 민족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단체였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비밀결사는 흑백당이라 할 수 있다. 흑백당은 1942년 4월 5일 경성광산전문학교생 朱樂元(경복중학 17회 졸업생)의 집인 봉래동에서 경복중학교 17회 졸업생인 李賢相을 비롯한 7명과 중앙학교 졸업생 南相甲 등 8명이 비밀리에 창당한 항일결사였다.449)
이 당이 조직되기까지는 1939년 경복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이현상·張宜燦·洪建杓·成益煥·崔高·明義宅·주낙원 등이 항일민족운동에 일신을 바치겠다는 뜻이 모아지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시간만 나면 학교 뒷동산 숲 속에 모여 좁게는 일본인교사들의 민족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에 울혈을 터뜨리기도 하고, 넓게는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비판하고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현상으로부터 중국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움직임과 광복군의 활약, 미국을 비롯한 해외민족운동가들의 동태를 들으면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운동을 통하여 일제군부파쇼를 무너뜨리겠다는 학생으로서의 정의감과 애국심을 갖게 되었다. 이현상이 해외소식에 밝았던 것은 그의 부친 李承浩 때문이었다. 이승호는 독립운동가로 재동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민족운동가들과 교제를 맺고 있었다.
한편 이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불러 넣어준 것은 이 학교에 있었던 한국인교사 金鍾武였다. 김교사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경복중학교에 부임하여 동양사와 한문을 담당하였다. 그는 수업시간 중 교실 밖을 살피면서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의 역사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곤 하였다.450)
이들 경복중학생들은 다른 학교인 경성사범학교의 金盛槿·李慶春, 중앙학교의 남상갑, 경기중학교의 金昌欽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독서회를 통하여 동지로서의 신의를 다졌다. 1941년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진학한 이들은 1942년 4월 5일 10시 주낙원의 사랑방에 모여 우선 모임의 명칭 결정에 들어가 노예상태인 암흑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을 때까지 투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흑백당을 당명으로 결정하고, 이어서 선언문과 강령, 부서를 결정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451)
<선언문(요지)>
삼천리 금수강산에 단군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조국이 악독한 일제의 잔인 무도한 질곡 속에서 瀕死之境에 이른 현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여기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흑백당을 조직한다. 우리는 조국이 광복을 되찾는 그 날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바쳐 모든 방법을 다하여 일제와 투쟁할 것을 삼천만 동포 앞에 엄숙히 선언한다.
강 령
一. 본 당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身命을 바칠 것을 맹서한다.
一. 본 당원은 본당의 조직·이념·행동에 관한 사항을 절대 비밀로 한다.
一. 본 당원은 자기의 맡은바 책임을 전력을 다해 완수한다.
부 서
고문:한용운·안재홍·김성수
당수:이현상, 부당수:장의찬, 섭외조직책:주낙원·성익환, 행동책:명의택·홍건표, 자금책:최고·남상갑, 중앙집행위원:창당 참석자 전원(8명)
이처럼 조직된 흑백당은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당원모집에 나서는 한편 실천계획과 행동목표를 첫째 일본인 주택가 방화와 일본인 살해, 둘째 친일파 처단으로 결정하였다. 첫번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하여, 연합국이 반드시 서울을 폭격할 것이고 폭격이 시작되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이 밀집해 있는 旭町(중구 남산동 일대)에 방화하여 일본인들을 살해하려 하였다. 두번째 계획은 민족반역자인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친일파 중 우선 처단하려고 한 인물을 이광수(香山光郞)·하산무(夏山茂)·이승우(梧村昇雨)·최린(佳山麟) 등으로 정하고 이들의 주거지와 동태를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452)
흑백당 중앙집행위원 8명은 조직확대를 위하여 당원 포섭에 나서서 7명의 당원을 확보, 전체 인원이 15명으로 증가되었다. 조직확대에 힘쓰면서 전기한 실천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일본인 집단거류지에 방화를 하려면 휘발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행동책인 명의택이 필요한 만큼의 휘발유를 마련하여 자기 집에 은닉하였다. 다음으로 친일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무기구입에 나서 모교인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이현상·홍건표가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을 훔쳐 삼청동 숲에 감추어 두었다.453)
그러나 흑백당의 실천계획에 따른 행동이 옮겨지기도 전에 일부 당원이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42년 10월 경 보성전문생 김창흠이 충북 괴산경찰서에 체포당하면서 흑백당의 전모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454) 김창흠에 이어 홍건표가 체포당하고 전당원이 수사선상에 오르게 됨에 따라 나머지 당원들은 국내활동이 어려운 것을 인식하고 국외로 탈출, 중경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에 입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455) 이들은 한만국경을 넘어 만주의 新民에 도착한 인원이 10명이었다. 여기서 임정이 있는 중경을 목표로 북경을 거쳐 가려고 하였으나 이들을 추격한 일경에 의하여 모두 체포당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에서 체포된 김창흠·홍건표·남상갑과 함께 종로경찰서에서 신문을 받고, 1944년 4월 대전검사국으로 송치되고 대전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았으니 그 형량은 징역 8년 이현상·장의찬, 징역 7년 홍건표·명의택,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 주낙원·성익환, 징역 5년 최고·남상갑·전희숙, 징역 3년 김성근·이경춘·이병림으로, 1945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456)
442) | 趙東杰,<총론>(≪獨立有功者功勳錄≫6 學生運動·文化運動, 국가보훈처, 1988), 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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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Ⅴ, 資料編(1969), 339∼365쪽. |
444) | 鄭世鉉, 앞의 책, 519∼525쪽. |
445) |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光州學生獨立運動史≫(國際文化社, 1974), 705∼706쪽. |
446) | 金鎬逸,<1940년대 항일학생운동연구>(≪中央史論≫7, 1991). |
447) | 釜山市,≪釜山略史≫(1968), 302∼303쪽. |
448) | 京畿高等學校,≪京畿70年史≫(1970), 163∼168쪽. |
449) | 朱樂元,<日帝末 黑白黨 事件의 顚末>(≪新東亞≫, 1978년 2월호). |
450) | 洪建杓,<흑백당사건>(사본, 1964). |
451) | 朱樂元, 앞의 글. |
452) | 洪建杓,<흑백당사건>(사본, 1964). |
453) | 金球鉉,<犯罪鑑識>20(黑白黨事件), (≪중앙일보≫,<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120, 1974년 8월 23일). |
454) | 金球鉉, 위의 글. |
455) | 朱樂元, 앞의 글. |
456) | 國家報勳處,<學生運動·文化運動>(≪獨立有功者功勳錄≫6, 1988), 411∼412쪽, 이현상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