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건국강령의 제정 반포
임시정부는 중경에 정착한 이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세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하면서, 독립운동 최고기구로서의 위상을 되찾아 갔다. 이러한 체제정비와 더불어 임시정부는 광복 후 민족국가건설에 대한 총체적 계획으로<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반포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의 모습을 제시한 것은 1919년 수립 당시의 헌법인<大韓民國臨時憲章>을 통해서였다.<임시헌장>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것이 그것이었다. 이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대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이념이자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원칙만 천명하였을 뿐,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보다 구체적인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밝힌 것은 1931년 4월<大韓民國臨時政府宣言>을 통해서였다. 이는 그해 5월 南京에서 개최된 중국 國民會議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여기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상해)이 추구하는 建國原則의 大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民族均等主義란 것은 사람과 사람이 利權을 고루히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으로 고루히 할 것인가. 普選制로써 政權을 고루히 하며, 國有로써 利權을 고루히 하고, 公費로써 學權을 고루히 한다. 국외에 대하여는 民族自決의 권리를 보장하여 民族과 민족, 國家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가지런히 한다. 이와같이 하여 국내에 실현하면 特權階級이 곧 消亡하고 소수민족이 그 侵凌을 免하며 정치·경제·교육을 물론하고 그 권리를 고루히 하며 … (국사편찬위원회,≪韓國獨立運動史≫資料 2, 1968, 216∼220쪽;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62∼66쪽).
개략적이긴 하지만, 임시정부가 건설할 민족국가의 대강을 밝힌 것이다. 민족균등주의에 입각하여 특권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고, 그 방안으로 보통선거제·국유제·공비교육제를 통해 政權(정치)·利權(경제)·學權(교육)의 균등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독립당(상해)의 政綱·政策을 구체화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임시정부 인사들은 1930년 1월 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한 기초세력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고,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은 三均主義를 채택하고 있었다.909) 임시정부가 천명한 건국원칙도 삼균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삼균주의는 이후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재건), 그리고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 등 1930년대 정당들에 의해 수용되어 갔다. 삼균주의가 좌우익 진영의 공통된 독립운동 이념으로 정립되고 있었던 것이다.910)
중경에 정착하여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한 임시정부는 이러한 내용을 더욱 체계화시켜 광복 후 민족국가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정립,<大韓民國建國綱領>이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건국강령은 삼균주의의 창안자로 알려진 조소앙이 기초하였고, 1941년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었다.911)
<건국강령>은 總綱·復國·建國의 3장 24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총강은 민족의 과거 내력과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고, 제2장 복국은 독립운동의 단계와 임무를 규정한 것이다.<건국강령>의 핵심은 제3장 건국에 있다. 여기에는 광복 후 건설할 국가의 政體는 민주공화국이고, 균등사회를 실현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안들을 정리하였다. 내용은 크게 정치·경제·교육의 세 분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를 보장하고, 어떤 한 정권이나 특권계급에 의한 독재를 철저히 배격하여 정치적 균등을 실현한다고 하였다. 인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보통선거제를 실시하고 참정권을 부여하되, 다만 적에게 附和한 자나 독립운동 방해자 등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두었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는 원칙하에 중앙정부는 국무회의가 최고 행정기관으로 국무를 집행한다고 하면서, 행정분담을 위해 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교통·실업·교육의 8부로 구성한다고 하였다. 지방에는 각 지방행정단위에 따른 地方政府와 議會를 구성하여 지방자치를 실시한다는 계획이었다.
경제분야는 토지와 대생산기관은 국유화한다는 전제하에, 생산의 국가적 지도 및 계획조정, 그리고 분배의 합리성을 통해 경제균등을 실현한다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 적의 官公私有地는 물론이고, 附敵者의 일체 소유자본 및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지는 自力自耕人에게 분배한다고 하면서, 그 순서는 고용농·자작농·소지주농 등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생산기관 역시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소규모 및 중소기업은 私營으로도 한다고 하였다.
교육분야는 民族正氣를 발양하며 국민도덕·생활기능·자치능력을 배양하여 완전한 국민을 양성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國費義務敎育 실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 방안으로 6세에서 12세까지의 초등교육은 물론이고, 12세 이상의 고등교육에 대한 일체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인구·교통 등의 형편에 따라 교육기관을 시설하되, 최소한 1읍 1면에 5개 소학교와 2개 중학교를, 1군 1도에 2개 전문학교를, 1도에 1개 대학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외에 교과서의 편집·발행 등은 국영으로 하고,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분급할 것이라 하고 있다.
<건국강령>은 한마디로, 임시정부가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상을 제시한 것으로, 개인이나 특정계급에 의한 독재를 철저히 배격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정치·경제·교육적으로 국민전체가 균등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민족국가가 지향할 최고 목적은 민족전체의 발전과 행복을 실현하는데 두었다.
임시정부가<건국강령>을 제정·반포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임시정부로 총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갖추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운동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중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공통적인 독립운동의 목표와 이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1942년<3·1절기념선언>을 발표하면서,<건국강령>을 제정·공포하게 된 이유를 9개항으로 설명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912) 그 핵심은 전민족 최대다수의 공동요구에 부응하는 하나의 독립운동 지도이념을 확립하고, 이 기치하에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여 광복을 실현하고자<건국강령>을 제정·반포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각종 선언문을 통해<건국강령>을 선전하는 한편,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을 촉구하였다.
또 하나는 임시정부의 강력한 지도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이나 임시의정원 의원들에게<건국강령>의 준수를 서약하도록 하였다. 한국광복군<公約>과<誓約文>에 “한국광복군의 군인 될 자는 건국강령과 광복군 지도정신에 위배되는 主義를 軍내외에 선전하고 조직하지 못함”(공약 제2조)이라 한 것이나, 광복군들에게 “건국강령을 절실히 취행하겠음”을 서약토록 한 것 등이 그것이다.913) 의정원 의원들에게도<건국강령>의 준수를 요구하였다. 제34차 의정원회의 때 李光濟의원이 “선거시 登記證上에 건국강령 준수여부를 강박적으로 요구한 것은 정부의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914)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건국강령>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임시정부가<건국강령>을 제정·공포한 것은 민족 최대 다수의 공동요구에 부응하는 독립운동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 기치하에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총결집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韓詩俊>
909) | 韓詩俊,<上海韓國獨立黨 硏究>(≪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 신서원, 1989), 617∼61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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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 姜萬吉,<民族運動·三均主義·趙素昻>(≪趙素昻≫, 한길사, 1982), 317∼321쪽. |
911) | 韓詩俊,<大韓民國臨時政府의 光復후 民族國家建設論>(≪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527쪽. |
912) | 臨時政府宣傳委員會,≪韓國獨立運動文類≫(1942), 52∼54쪽. |
913) |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제72호, 1941년 12월 8일,<韓國光復軍公約>·<韓國光復軍誓約文>. |
914) | 국회도서관,≪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1974), 29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