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족말살책동과 민족체육의 수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본격적인 전시체제를 발동하는 동시에 이른바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신사참배에 이은 황국신민서사와 창씨개명, 그리고 조선어 사용금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조선 민족성의 말살을 획책하였다. 또한 전쟁인력의 확보를 위해<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청년 수만 명을 지원병 형태로 전쟁에 끌어들이는가 하면, 1943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약 20만 명이 징집되었고, ‘학도지원병’제도가 강행되어 약 4,500명의 전문학교학생과 대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이와 함께 일제는 모집·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 등을 통한 조선인의 희생을 대량으로 강요한 노동력의 강제수탈을 시행하였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곧이어 1939년에<국민징용령>을 실시하여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하였다.581)
이러한 민족말살정책을 조선의 체육계에도 적용하기 위해 일제는 우선 학교체육정책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그 내용은 학교체조 교수요목을 통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1927년에 개정한 학교체조 교수요목은 유희와 경기 중심이었으나, 1937년에는 군사능력을 강화시키는 내용으로 개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1938년 3월에는 새로이 개정된<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식민지교육에서 민족말살정책을 본격화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 학교체조 교수요목이 다시 개정되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國體明徵’·‘內鮮一體’·‘忍苦鍛鍊’으로서, 특히 인고단련은 체육교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학교체육에 ‘황국신민체조’를 도입하였다.582) 이는 종래의 학교체조에다 劒의 요소를 넣어 심신을 단련하는 형식으로 만든 체조로서, 일본의 武道精神을 함양함으로써 황국신민의 기백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띤 것이었다.583) 그 결과 이후 학교체조는 유희중심의 서구 체조가 사라지고 순 일본식의 체조가 행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학교체육은 자연히 중일전쟁 수행을 위한 국방능력의 제고를 위한 군사훈련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국가총동원법>을 실시하면서 ‘국민정신총력연맹조선지부’를 설치하기에 앞서 조선인 민간단체의 일본화정책에 의거하여 조선체육회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전시체제의 순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조선 체육단체의 통제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러한 조치는 1938년 5월 12일 당시 ‘체육단체도 전면적 통제’라는≪조선일보≫의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즉 총독부 학무국에서 조선의 체육운동을 철저히 강화하기 위해 체육기관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기로 하고 7월 초순경에 통제안을 발표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또한 일제는 당시 조선내에 90여 개의 체육단체를 통합한다는 방침과 함께 전국의 도·군·읍의 체육협회를 통일적으로 통제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584)
결국 1938년 7월 4일 ‘체육기관의 일원화’라는 미명하에 조선체육회가 당시 경성의 또 다른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통합되었다.585) 이로써 1920년 이후 조선체육계의 사령탑이라 할 수 있었던 조선체육회는 일제의 강제에 의해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정치·사회·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민간단체로 구성된 체육기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탄압이 가해졌던 것이다.
조선체육회가 강제 통합된 이후 일제는 조선내의 무도계 통합을 착수해 나갔다. 당시 황국신민체조가 일본의 고유한 검도를 변용한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무도는 군국주의 체육을 실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 그러자 일제는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일본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도조직을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586) 이에 따라 1938년 7월 1일부터 조선인 유도단체인 조선무도관·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유도부·조선강무관·조선연무관을 동경 講道館의 조선지부로 통합하였다.
또한 1938년 9월 3일에는 전조선 사회체육 운동단체를 통제하기로 하고 그 지도기준과 통제계통을 발표하였다.587) 이때 발표된 지도기준에 따르면 체육운동단체는 대소공사의 구별없이 국민체력향상기관으로서 긴요하기 때문에 그 조직을 강화하여 내선일체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실행방법으로서 합동체조·체조대회·단체행진·무도경기의 실행 그리고 체육운동 경기회나 체육대회시에 궁성요배·일본기 게양 등을 하며 일본군가를 부르고 경기용어를 일어로 사용토록 하였다.
1941년 8월 1일 조선체육협회는 조선학생체육총연맹를 흡수하였다.588) 이 단체는 1937년 조선내의 전문학교·대학의 스포츠단체를 통제하고자 결성된 단체였는데, 이 시기에 와서 국민총력학교연맹의 발족으로 조선체육협회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체제강화에 따른 체육통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종래 일본인이 중심이 된 민간단체로서, 조선체육계를 통제해 왔던 조선체육협회가 1942년 2월 18일 조선체육진흥회로 통합된 것에서 확인된다. 조선체육진흥회의 발족은 당시 관서체육회를 비롯한 전국의 조선인 체육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일원적으로 통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589) 결국 조선체육진흥회는 일제 말기 조선내 체육분야에서의 황국신민화를 주도하고 전시체제하의 국방체육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유일한 통제기관이었다.
이후 조선의 체육은 정상적인 체육발달은 기대할 수 없었고, 오로지 전쟁준비를 위한 체력증강·전투훈련만이 체육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졌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4월<朝鮮學徒體育大會實施要綱>과<學校體育刷新指導方針>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격은 승패를 배척하고 황국신민의 자질향상과 전력증강에 맞는 경기만을 시행하도록 규정하였다.590) 이 조치로 모든 체육대회의 개최나 참가는 조선총독부의 승인이나 허가없이는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 이전에 각 지방체육단체에 의해 개최되었던 전조선 체육대회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학교단위의 해외원정경기도 원칙적으로 봉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울러 1942년에는 만 18세와 19세의 조선청년 남녀에게 체력검사를 실시하여 전시인력확보를 도모하였다.591)
1943년 5월 15일에는<決戰下 一般國民體育實施要綱>을 다시 제정하여 일반인들에까지 체육 통제를 단행하였다.592) 이 요강은 1944년부터 시행된 징병제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증강에 목표를 두고 반포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1943년부터 전시체력의 증대를 위해 중학생 이상의 학생들에게 남녀 체력장 검정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남자는 체력장 검정종목(단거리·장거리·도약·투척·운반·매달리기)과 체조·행군·육상·수영·씨름·총검술·사격·해양훈련·항공훈련·기갑훈련·기마·雪上운동·빙상운동이 채택되었으며, 여자는 체력장 검정종목(경보·도약·투척·운반·도수체조)과 체조·행군·육상·수영·구기·설상운동·빙상운동이 채택되었다.593) 이러한 조치는 전조선의 전시동원체제를 갖추고 대비하기 위한 기도로서, 민족체육의 존립을 위협하는 민족말살책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조선 체육은 정상적인 발전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일제에 의해 민족체육의 존립 기반조차 말살됨으로써 일대 암흑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각종 경기대회에서 조선인들이 보여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작지만 조선인이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1940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의 부정에 대항하여 조선인 중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594)
결국 일제하 민족체육은 암울했던 민족수난 시기에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지성과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귀중한 버팀목이 되었다. 동시에 국가를 잃은 조선인들에게는 경기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희망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체육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일투쟁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일제하 독립운동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81) |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10만 명에서 146만 명에 이른다(강만길,≪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34∼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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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 나현성, 앞의 책, 220쪽. |
583) | 朝鮮總督府 學務局,≪朝鮮における敎育革新の全貌≫(1938), 149∼150쪽. |
584) | ≪조선일보≫, 1938년 5월 12일. |
585) | 조선체육회, 앞의 책, 88쪽. |
586) | ≪조선일보≫, 1938년 5월 12일. |
587) | ≪동아일보≫, 1938년 9월 3일. |
588) | ≪경성일보≫, 1941년 8월 1일. |
589) | ≪경성일보≫, 1942년 2월 15일. |
590) |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 편,≪현행조선교육법규≫(조선행정학회, 1942), 206쪽. |
591) | ≪매일신보≫, 1942년 3월 1일. |
592) | 경성일보사,≪朝鮮年鑑≫(1943), 539∼540쪽. |
593) | 경성일보사, 위의 책, 539∼540쪽. |
594) | 이학래, 앞의 책, 213∼2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