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간무용의 계승과 시련
민간무용은 첫째 관기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궁중정재의 계통을 이끌어 온 것, 둘째 순수 민속무용으로 민중 속에서 발생되어 전승한 승무·살풀이 등 고도로 세련된 것, 셋째 토속성을 바탕한 강강술래, 넷째 각처의 가면극 등이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우선, 첫째와 둘째는 주로 민간에서 관기들에 의해 이루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한일합방으로 종래의 악원제도와 여악제도가 폐지되고 왕실에 예속되었던 女伶과 무동들은 모두 해산되었다. 이렇게 해산된 악인과 여령, 그리고 무동들은 직업을 바꾸는 하면, 일부는 민간조직 단체에 흡수되어 후진양성 또는 무대에서 직접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단법인 韓國正樂院이었다. 이 단체는 1910년에 발족한 정악연구단체인 朝陽俱樂部가 1912년에 朝鮮正樂傳習所로 개칭된 것이었다. 그 분원으로 여기에게 가무를 교습시키는 여악분원을 두었는데, 이 분원이 1914년 새로 발족한 조선기생조합의 모체가 되었다. 이곳은 정악전습소장 河圭一이 조합의 통수가 되어 1940년대까지 예능지도의 중심이 되어 왔다.
이때 전수된 춤으로는 춘앵전·舞山香·무고·검무·項莊舞·포구락·가인전목단·남무·獻天花·獅子舞·船遊樂·고구려무·蓮花臺舞·봉래의·수연장·五羊仙 등이 있다. 당시 민간무용의 주역은 정악원에 소속된 기녀들이었다. 이들은 본래 궁중정재를 맞이하여 각처에서 진상되었으나, 어느 곳보다 평양기생이 많이 상경하였다. 진연에 참가하여 정재가 끝나면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기업을 차리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鄕妓가 서울에서 기업을 행하는 자는 대개 포주가 없는 ‘無夫妓’였고, 京妓는 포주가 있는 ‘有夫妓’가 많았다.
이때 정악원의 학감 하규일이 무부기를 모아 무부기조합을 만들어 ‘정악전습소 분교실’이라 하여 다동에 설치하였다. 이에 경기들이 유부기조합을 만들어 광교에 설치하였다. 무부기조합은 친일파였던 宋秉畯이 지원한 데에 비해, 광교조합은 약방기생의 후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대항하였다. 이러한 기생조합은 점차 7∼8개로 늘어났고, 조합 명칭도 일본 교방의 이름을 모방하여 1914년부터는 券番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는 기생조합의 이름이 일본식으로 고쳐져 茶洞組合이 조선권번, 광교조합이 한성권번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때 기생들의 예능활동도 점점 위축되어 요릿집의 작은 무대에서 공연되었고, 승무·검무·춘앵전·사고무·장생보연지무·무고 등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이들 권번은 각기 동기를 교육하는 기생학교를 부설하여 운영하였다.60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왕실과 양반층에서만 볼 수 있었던 궁중무용이 민간무용과 함께 접촉하는 과정에서 점차 민간무용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당시 시간의 제한을 받아 원형 그대로 공연하지 못함에 따라 축소·변질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서구식 무대로 만들어진 원각사에서 행해진 관기들의 궁중무용은 하나의 독립된 춤이 아니라, 노래와 춤의 혼합된 예술성보다는 의식미, 세련된 기교보다는 고운 때깔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한편 기녀들의 민속무로는 승무·立舞·농악무·살풀이 등 전형적인 민속무였고, 종전까지 야외무대에서 상연되던 탈춤·가면무극 등이었다.603) 당시 기생들의 이러한 무용은 단성사·조선극장·우미관 등이 건립됨에 따라 온습회란 명목으로 발표회를 열어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뒤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요릿집 등이 폐쇄되고 권번이 해산됨에 따라 그 무용활동은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08년(순종 2)에는 최초로 국립극장 圓覺寺가 개장되었다. 이 곳을 통해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 한 자리에서 함께 공연되어 한국 무용사상 한 시기를 굳히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원각사는 그 후 신무용을 배태한 온상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604)
또한 1912년에 朴承弼이 光武臺를 건축하여 유일한 구극을 위한 극장을 세웠는데, 주로 고전음악과 광대 줄타기, 기생의 가무·재담·검무 등과 춘향전·심청전·흥부가·백상화가 등 구극이 상연되었다. 광무대는 구극공연을 위주로 했으나, 공연종목 중에는 기생의 가무와 검무가 들어 있긴 해도 춤의 종류는 분명치 않았다.605) 그 후 1930년까지 화재로 소진될 때까지 구극을 계속하였다. 광무대의 소실로 궁중정재는 민간으로 파급되었다.
1902년 協律社가 원각사 무대에서 공연할 때 민속무용의 일부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민속무용이 무대에서 공연된 효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민속무용으로는 승무·농악·살풀이 등과 가면무극이 상연되었는데, 공연보다도 명창대회격인 판소리 연주회에 곁들여진 형태였다. 그 뒤 광무대·단성사와 1922년에 개관된 조선극장 등에서 경기도 명창들에 의해 가야금 병창·재담·병신타령·줄타기 등이 공연되었으며, 무용으로는 승무·검무·한량무 등이 공연되었다.
당시 민속무용의 주역은 韓成俊이었다. 그는 1930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 춤을 지도하게 됨에 따라 본격적인 무용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이듬해 부민관에서 한성준 무용발표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때 공연된 작품으로는 승무·신선무·검무·한량무·살풀이춤·농악무 등이었으며, 새로 등장된 춤으로는 婆囉舞·사공무·鶴舞 등이었다. 당시 한성준 밑에서 배출된 무용가로는 이강선·장홍심·韓英淑·강선영 등으로 이들은 1940년경 동경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한국무용을 일찍이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전라도를 비롯한 남해안 지방에서는 민간 부녀자들에 의해 토속성을 바탕한 강강술래가 시행되었고, 해서지역의 탈춤, 북청의 獅子놀이, 강릉의 官奴놀이, 경기의 山臺놀이, 경상좌도의 야유, 경상우도의 五廣大 등의 가면극이 세시풍속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