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二. 우리 나라의 내력3. 고려와 근세 조선

○ 고려의 통일

철원에 있던 태봉국의 임금 궁예의 부하 왕건은, 단기 3251년에 교만하고 의심 많은 궁예를 없애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고려를 세우고, 서울을 개경(개성)에 두었다.

이 때, 발해가 망하게 되니, 많은 국민이 고려로 들어왔고, 신라는 이미 정치가 부패하고 어지러워서, 경순왕은 3268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 주니, 왕건은 다음 해에 후백제도 합쳐서,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민족을 통일한 왕건은, 후삼국인이거나, 발해인을 차별 없이 대우하고, 다시 만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글안족도 만주에다 요 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엿보는 판이었다.

드디어 요는, 3326년부터 근 30년이나 고려를 노렸으나, 서희 장군의 담판으로 압록강 이남을 고려 땅으로 인정하고, 강감찬에게 몰려서 갔다. 또, 고려는,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윤관이 쳐부수고, 그 땅을 차지하였으나, 여진이 그 땅을 돌려달라고 애걸하므로, 다시 내주었다.

이 때, 고려에서는 관리를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어서 양반 정치를 하였는데, 서로 정권을 다투어, 문신과 무신의 변란이 그치지 아니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단기 3564년에 몽고족이 세운 원 나라의 침입을 받았다. 고려는, 29년 동안이나 원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힘이 모자라서 원에게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이후 98년간이나, 원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31대 공민왕 때에는, 몽고 배척 운동을 일으켜서, 원에 빼앗겼던 함흥 지방을 도로 찾았다.

이 때, 함흥에 있던 이성계가, 홍두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파하고, 고려의 군사권을 잡았는데, 드디어 3725년에는 이 나라를 없애 버렸다.

고려 시대 지도   

고려는 서울에다 6부의 관청을 두고, 지방에는 5도 양계(兩界)를 두어서 정치를 하며, 불교를 국교로 믿었다.

중을 최고 고문으로 삼고, 거듭 대장경을 박아서, 해인사에 남아 있으나, 말년에 가서는 불교도 미신적으로 되고, 또 지리 풍수설이 성행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는 학교를 두어, 한학문이 발달하고, 과거 제도를 썼으며, 평민도 성을 붙였다. 많은 역사책도 꾸몄고, 세계의 자랑거리인 금속 활자며, 고려자기도 만들었다.

산업이 발달되어서, 멀리 아라비아인과도 무역이 성하였으며, 미술, 음악도 놀랄 만하였다. 궁중 음악 아악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목화, 화약 등도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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