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삼국과 통일 신라 시대의 경제
삼국의 경제
삼국 시대의 주산업은 농업이었다. 토지는 귀족과 관리에게 식읍, 녹읍, 관료전 등의 이름으로 나누어 주었다. 농민은 국가 또는 귀족, 관리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 대신 조세를 바쳤다.
고구려에서는 조세를 인세라 하여 베 5필, 좁쌀 5석을 받고, 또 호세라 하여 1석, 7두, 5두의 3등급을 두어 좁쌀로 받았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조세로 베, 비단, 쌀을 받았는데, 그 해의 풍년, 흉년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이 두 나라는 일찍부터 벼농사가 행하여져, 저수지도 만들어 이용하였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지증왕 때에 소를 부려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수공업도 부족 국가 시대에 비하여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수공업은 대체로 관영 수공업과 농민 수공업의 두 형태가 있었는데, 관영 수공업은 국가에서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였고, 농민 수공업은 농민들이 자급 자족을 목적으로 집에서 부업삼아 행하였다. 그러므로, 농민 수공업은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관영 수공업을 따르지 못하였다.
상업은 나라마다 서울에 시장이 열리어 교역이 행하여졌다. 신라에서는 경주에 동시가 열리어 거래를 행하였는데, 지방에서는 교통이 편리한 곳을 택하여 대체로 물물 교환의 형식으로 거래하였다.
대외 무역은 예물 교환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공무역과, 개인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통일 신라 시대에도 주산업은 농업이었고,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여 귀족과 관리에게 식읍, 녹전, 직전 등의 이름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에게는 정전을 나누어 주고, 그 대신 조, 용, 조를 부담시켰다.
이 때의 경제, 사회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촌락의 장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촌의 홋수, 인구, 우마 수, 토지 면적, 뽕나무와 잣나무 수 등이 기록되어 있어, 그 방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인구의 증가, 개간지의 확대, 저수지의 증설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한편 농가에서는 양잠, 직조, 목축을 부업으로 하였다.
수공업도 관영 수공업과 농민 수공업의 두 형태가 있었으나, 관영 수공업은 삼국 시대에 비하여 상당한 발달을 보였다.
상업은 서울의 시장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는 것과 지방의 교통 요지를 중심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있었으나, 서울에는 삼국 시대 이래의 동시와, 통일 신라 시대에 증설된 남시와 서시가 있었으며, 각 시장에는 감독 기관으로 시전이 있었다.
국내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당과 일본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당과는 조공의 형식을 통하여서 하는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사무역이 있었다. 당에 수출하는 물건은 금, 은, 인삼, 우황, 모시, 해표 가죽 등이었고, 수입하는 물건은 비단, 의복, 서적 등이었다. 흥덕왕 때에는 김 대렴이 차 종자를 수입하여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
통일 신라 시대에는 당과의 접촉이 활발하여, 양국 간의 사신 왕래가 잦았을 뿐 아니라, 신라의 유학생과 유학승들의 왕래도 많았다. 이 때에 당과의 교통로는 전남 영암 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상하이 방면으로 통하는 길과, 남양만에서 산뚱 반도의 떵조우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당과의 교통이 활발히 행하여지면서 신라인들이 당에 많이 진출하였다. 따라서, 당에 신라인의 거류지가 생겨났는데, 이것을 그 곳에서 신라방이라 하였다. 여기에는 신라인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 기관인 신라소가 설치되었다. 또, 신라원이라 하는 신라인의 사원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가장 유명하였다. 신라는 그 말엽에 이르러 외국의 해적들이 해안 지방을 휩쓸었는데, 그 중 당의 해적들은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매매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을 본 장보고는 당으로부터 귀국하여, 흥덕왕 때 완도에 청해진을 베풀고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당과 일본에 무역하면서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시 동 아시아에 있어서의 해상권을 독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