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조선 시대의 생활

3. 민족 문화의 발달

한글의 창제

오랜 역사와 높은 문화를 지녀 온 우리 민족이었지만, 불행히도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이 없어서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써 왔다. 세종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즉위하자 곧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강희안, 최항 등과 같이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고 1446년에 이를 반포하였다. 배우기 쉽고 어떤 발음이라도 적을 수 있는 이 훈민정음의 발명이야말로 세계 문화 사상 빛나는 업적의 하나였다.

훈민정음 원본   

국문학의 발달

한글의 반포는 국문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시조는 고려의 그것보다 더 개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길재, 원천석, 정도전, 맹사성, 김종서, 성삼문이나 주세붕, 이황, 이이 등의 작품이 우수하였다.

국민 생활이 자리잡힘에 따라 자연미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가사 문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가사는 정극인에서 시작되어 정철에 이르러 대성되었으며,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사미인곡 등이 가장 이름난 작품들이다.

활발한 편찬 사업

역대 국왕이 학문에 힘썼으며, 또 도서 편찬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많은 고전을 남겼으며, 특히 세종 때의 집현전, 성종 때의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도서가 간행되었다.

고래의 전통에 따라 역대 국왕의 왕조 실록이 편찬되어 사고에 보장되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절요나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또, 정치적 필요에 의한 지지의 편찬을 보아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이 엮어졌다.

한글의 반포에 따라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이나 동국정운의 간행이 있었고, 각종의 언경이 반포되었다. 유교 도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삼강행실도, 국조오례의 등이 편찬, 반포되었다.

한편, 기술 방면에는 농사직설, 악학궤범,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도서가 편찬되어, 기술 문화 발달에 큰 구실을 하였다.

기술 문화의 발달

편찬 사업의 성황은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태종 때에 주자소를 두고 창의적인 구리 활자인 계미자를 주자하였으며, 그 후 거듭 활자의 개량을 보았다. 농업 국가이니만큼 천문, 역법, 기상에 관한 노력은 대단하였다. 천문은 서운관(후에 관상감으로 개칭)이 관장하였다.

세종은 정초, 장영실 들로 하여금 간의, 혼의, 자격루, 일귀 등 각종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들게 하고, 우리 나라를 기준한 역법으로 칠정산내외편을 만들었다.

일귀   

또, 세종 24년(1442)에는 측우기를 이용하여 우량을 측정하게 하는 등의 큰 업적을 세웠다. 한편, 세조 때에도 규형, 인지의 등의 기기가 만들어졌다. 태종 때에는 군기시, 화약감을 설치하여 군기를 제조하였고, 일본에서 황을 들여와 각종 화포를 시험하였다.

측우대   

의술은 삼의사가 담당하였으며, 중인 계급이 세습적으로 의료업에 종사하였으나, 의녀의 제도도 있었다. 의술의 발달에 따라 의학에 대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특히 허준이 엮은 동의보감은 멀리 중국,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건축과 조각

불교가 억압됨에 따라 과거의 불교 예술은 쇠퇴 일로에 있었다. 조선 시대 예술은 유교가 예술을 천시한 까닭에 고려 시대의 일품에는 따르지 못하였으나, 소박 건실하고 은은한 맛이 있어 또한 그 나름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 주고 있다.

국초에 경복궁 등 많은 궁궐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다 타 버리고 지금은 숭례문(남대문) 등이 겨우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으며, 예안 도산 서원, 월성 옥산 서원, 영주 소수 서원에서도 당시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다.

숭례문   

조각의 걸작품으로는 원각사지(파고다 공원 소재) 10층 석탑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낙산사 7층탑, 신륵사 7층 전탑이 유명하다.

미술 활동

그림은 국초부터 도화서를 두어 임금과 고관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또, 학자들 사이에는 사군자의 묵화가 성행하였다.

화가로는 안견, 최경, 강희안, 이상화 등이 유명한데, 특히 안견은 몽유도원도와 같은 걸작품을 남겨 놓았다. 글씨에는 안평 대군, 김구, 양사언, 한호 등이 유명하며, 이들을 초기 4대 서가라 일컫는다.

몽유도원도   
안견의 그림
안평 대군의 글씨   

공예 중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자기이다. 고려자기가 섬세하고 귀족적인 멋을 풍겨 주는 데 대하여, 조선의 백자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친근감을 주는 것이 특색이다. 처음, 자기는 고려자기의 계통을 이은 회황색의 분청이란 것이 많았으나, 뒤에 차차 백자가 성하였다. 특히, 광주 분원의 자기가 뛰어났다.

음악과 연회

국초부터 전악서, 아악서를 두어 예악에 힘써 왔다. 세종은 관습도감을 두고 구악의 혁신과 신악 수립에 노력하였다.

즉,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대성하게 하였고, 맹사성에게 향악을 정리시켰다. 한편, 아악보 12권을 완성하고 그 소리음을 한글로 표시함으로써 음악의 자주화를 꾀하였다. 세조 때에 궁상하보라는 독특한 악보 표기법을 실시하였으며, 그리고 동양 음악 연구의 가장 귀중한 자료라는 악학궤범을 간행하였다.

궁중 예악의 필요에서 궁중 무용이 발달하였으며,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무, 승무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한편, 서민층의 오락으로 산대도감놀이라는 가면극과 꼭둑각시놀음이라는 인형극이 있었다.

산대도감놀이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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