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조선의 근대화

7. 국권의 박탈과 민족의 수난

격화되는 일제의 한국 침투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이미 계획한 설계에 따라 우리 나라 침투를 더욱 강화하였다. 러⋅일 전쟁에서의 국외 중립을 선언한 우리 나라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이용익 등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의정서를 성립시켰다. 이에 의하여 내정 개혁의 충고권, 비상 사태하에서의 독자적 행동권을 쥐게 된 일본은, 이어 전쟁 수행상의 필요를 빙자하여 광대한 토지와 통신망을 접수하였다.

유리한 전세에 힘입은 일본은 내정 개선의 길이라 하여 외국인 고문을 초빙하는 내용의 한⋅일 협정서(제1차 한⋅일 협약)를 성립시켰고, 마침내 외교, 재정 고문은 물론 조약에도 없는 군부, 경무, 궁내부 고문과 학정 참여관까지 우리 정부에 들이밀어 고문 정치를 폈다. 일본은 1904년 10월, 비밀리에 대한 시설 강령이라는 조선 병탄 계획을 꾸며, 일본인 재정 고문으로 하여금 재정 정리라는 명목으로 조선 재정을 수중에 넣어, 실질상의 한국 병탄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국의 국제적 고립

일본의 한국 침략은 먼저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제1단계 목표를 두었다. 한국 침략의 경쟁자 청국을 청⋅일 전쟁으로, 또 러시아를 러⋅일 전쟁으로 탈락시킨 후, 교묘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러⋅일 전쟁 종결 직전의 영⋅일 동맹 개정 교섭 때 영국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권을 인정받았고, 미국과는 태프트⋅가쯔라 협약에 의하여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댓가로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한국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열강도, 한⋅일 협정서로써 한국의 외교 활동을 일본이 감독할 수 있게 되자, 한국 주재의 외교 사신을 차차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을사 5조약과 통감 정치

국제적으로 고립된 한국에 대하여 일본은 노골적으로 그 악랄한 수단을 드러내게 되었다. 1905년 군대를 대동하고 내한한 이토오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참정 대신 한규설 등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매국 정객들의 호응에 의하여 을사 5조약(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에 따라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외교, 내정 감독권을 행사하니, 독립이란 유명무실한 보호국이 되었다. 통감 정치하에서 일제는 한국의 완전 병탄을 위한 사전 공작으로 경제 지배권의 확립과 군사력에 의한 치안권 장악을 서둘렀다.

통감 정치에 대한 민족의 항거

비밀리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황성 신문이 재빨리 그 내막을 보도하였고, 그 신문에 실린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은 국민의 의분을 크게 자극하였다. 상가는 철시하였고, 군중은 시내로 몰려들어 조약 무효를 주창하고, 을사 5적을 규탄하는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상설, 민영환, 조병세, 최익현, 안병찬 등은 조약 취소를 강력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민영환, 조병세, 안병찬, 홍만식, 이상철 등은 순국으로써 충성을 다하였다.

황성 신문   
하단이 시일야 방성대곡의 사설이다.

지방 유생들의 항거는 보다 적극적이어서, 13도 유림을 대표하여 상소 투쟁하던 이건창은 옥중에서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구국의 의병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며, 최익현은 임병찬과 더불어 순창을 중심으로 한 전북에서, 신돌석은 경북 평해에서, 유인석은 강원도에서 봉기하여 항일 의병 운동을 폈다.

헤이그 밀사와 고종 퇴위

을사조약이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고종도 조약 무효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한 매일 신보를 통하여 미, 영, 독, 러 4개국의 공동 보호를 호소하였으며, 또한 미국인 헐버어트(Hulbert)를 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때마침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종은 이상설, 이준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이위종과 더불어 헤이그에 나타났으나, 일제와 영국의 방해, 본국 친일 정부의 불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이 회의와 동시에 열렸던 만국 기자 협회에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을 뿐이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이준은 통분한 나머지 헤이그에서 분사 순국하였다.

헤이그 밀사에게 준 황제의 신임장   

헤이그 밀사 사건에 놀란 일제는 이 기회에 항일적인 고종을 몰아 내고자 매국노를 앞세워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고종은 다만 황태자 대리 섭정만을 수락하였던 것인데, 일제는 황제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이리하여, 순종이 즉위하고 연호는 융희로 바뀌었다. 고종 퇴위의 진상을 알게 된 국민의 분격은 컸다. 대한 자강회, 대한 구락부, 국민 교육회, 동우회 등 애국 단체의 영도하에 항일 운동과 매국노 소탕 운동은 한층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제 침략의 강화

고종 퇴위 후의 어수선한 틈을 타 일본의 침략은 더욱 강화되었다. 국왕 폐립의 여세를 빌어 행정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이 차관 정치를 골자로 하는 정미 7조약을 성립시켰으며, 신문지법, 보안법 등으로 우리 국민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또, 한국의 완전한 병탄을 위한 최후의 준비로서, 우리 국민의 손에서 총칼을 거두기 위하여, 속임수로써 군대 해산을 단행하였다. 민족의 무장이 박탈당하는 비극에 대대장 박성환이 순국 항의하게 되자, 사병들은 무기를 들고 일제와 충돌하였으나, 우세한 무장 앞에 꺾이고 말았으며, 그 뒤 지방으로 흩어져 의병 운동에 합류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강화와 원주의 진위대도 무기를 들고 일군과 싸웠다.

의병 운동과 잇단 의거

왕비 시살, 단발 강요를 직접적인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던 의병 운동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층 활발하여졌다. 의병은 신돌석, 허위, 민긍호, 이강년, 이진용, 곽학기 등 지방 명문 유생들을 중심으로 수천, 수백의 인원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이후 5년간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된 수가 17,799라는 일본군 공표를 통하여 보아도 얼마나 치열하였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병 궐기도   

한편,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여러 열사의 개인적인 구국 운동도 일어났다. 1908년, 일제의 앞잡이로 날뛰던 미국인 스티븐스(Stevence)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에게 피살당하였고, 1909년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삔 역두에서 안중근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이 밖에도 허진, 서병의, 김형식 등이 일진회를 성토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척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이것은 대규모의 투쟁이 불가능해진 마당에서 전개된 개인적 구국 운동이었다.

경술 국치와 민족의 수난

우리 겨레의 줄기찬 항쟁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 나라의 숨통을 누를 최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0년 신임 테라우치 통감은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경찰권과 사법권을 탈취하고, 대한 매일 신보, 황성 신보 등 각 신문을 폐간시켜 우리의 이목을 가리고, 한국 병탄의 최종 절차인 합방 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리하여, 경술 국치에 의하여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고난을 맞이하였다.

오랜 쇄국의 어두운 역사에서 개국을 맞이하여 근대화의 길이 트이기는 하였으나, 뿌리깊은 국내의 보수 세력과 제국주의적 열강의 식민 경쟁의 회오리 속에 말려들어 근대 국가로서의 정상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더니, 마침내 일본의 희생물이 되어 민족은 수난의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 연구 과제 ▦

1. 우리 나라와 서양 각국과의 통상 조약의 내용을 비교 연구하여 보자.

2. 우리 나라를 무대로 한 열강 세력의 각축을 연구하여 보자.

3.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성격을 비교하여 보자.

4. 동학 혁명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여 보자.

5. 경술 국치에 이르기까지 한⋅일 정부 간에 맺어진 조약을 도표로 만들어 그 내용을 연구하여 보자.

6. 한⋅일 합방 이전의 우리 민족의 의식적 개화 운동을 정치, 언론, 교육, 종교, 산업, 후생, 과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도표화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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