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초기의 국제 관계
고려와 송, 거란과의 관계
거란은 5대 중엽에 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는데,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이 땅을 회복하려 하였으므로, 거란족은 송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란족은 북진 정책을 표방하며 송과 친교를 맺은 고려를 항상 경계하였고, 송은 고려를 끌어넣어 거란족과 충돌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발해가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은 일찌기 고구려가 일어났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을 세우고, 동진하는 거란족과 북진하는 고려 사이에서 자체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송과 자주 왕래하니, 거란족은 한층 더 자극을 받았다.
거란족의 침입
거란은 국호를 요라 고치고, 먼저 정안국을 토벌한 다음,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다. 제1차 침입 때(993)에는,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안융진(안주)에서 담판하여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압록강 선에서 요와 접경하여 정식 외교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한 요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여 왔다. 이 제2차 침입(1010)에서는 방어하던 강조가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귀주(구성)에서 이를 대파하였다.
그 뒤, 소배압을 장수로 한 10만 거란군의 제3차 침입(1018)도 개경 근방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협공을 받아 후퇴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섬멸당하여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거란은 그 뒤에도 자주 침입을 시도하여 국경 방면에서 충돌이 계속되었으나, 그 때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거란은 고려에 다시 침입할 수도 없었고, 또 고려가 배후에 있는 한, 송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전란의 영향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삼국 간에 평화가 유지된 것은, 고려의 힘으로 인하여 동 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는 수도만 함락시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기동력이 강한 기병으로 고려에 깊숙이 쳐들어왔으나, 각처에서 성곽을 근거로 한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이득은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는 국방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기 시작하여 현종 때에 완성하였고, 다음 덕종 때에는 북방에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12년 뒤에 완성하였다(1044).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으로서, 중국의 만리 장성과 같이 북방의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