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고대 사회의 발전2. 삼국의 성립과 발전

(2) 삼국의 대외 관계와 민족 통일

삼국 간의 항쟁

북중국의 전진은 전연을 멸하고 나서, 남쪽의 동진과 대항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전진, 남쪽으로는 신라와 연맹하여 백제에 압력을 가하였다. 한편, 백제는 남중국의 동진이나 그 뒤에 일어난 송, 제, 그리고 신라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던 바다 건너 왜와 연결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은 이와 같은 국제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를 대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북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은 고구려가 소수림왕 때 국력을 정비하여 광개토 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때까지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시기이고, 제2기는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가 법흥왕, 진흥왕대를 거치면서 국토를 확장하고 한강 유역에 진출하는 약 100년간의 시기이며, 제3기는 신라가 수와 당과 연결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고구려의 전성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도 반포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광개토 대왕 때에 이르러서는 밖으로 국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먼저,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신라와 가야에 침입한 왜구를 몰아냈고, 서쪽에서는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다.1)

다음의 장수왕 때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중국의 남북조와 각기 통교할 뿐만 아니라, 몽고 지역에 있던 여러 민족과도 통교하는 등 외교 관계를 크게 넓혔다. 또, 서울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백제의 서울인 한성을 공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서울을 남쪽 웅진성(공주)으로 옮기게 되었다.

고구려는 남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며, 중원 고구려비는 당시 고구려의 판도를 짐작하게 해 준다.

고구려 전성 당시의 국제 관계   

백제의 중흥

웅진성으로 서울을 옮긴 후,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하여 위협을 느끼는 신라와 연맹 관계를 맺고, 왕족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백제는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성왕 때에 다시 서울을 사비성(부여)으로 옮겼다. 그리고, 국가 체제를 새로이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중국의 남조와 문화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또, 이 때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었다.

백제는 크게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하였다.

신라의 발전

고구려, 백제보다 뒤늦게 발전하기 시작한 신라는 지증왕 때에 우산국을 복속하고, 법흥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해 나갔다. 뒤이어 금관 가야를 아우르고, 진흥왕 때에는 백제와 연맹하여 소백 산맥을 넘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적성을 점령하고,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단양 적성비는 이 때에 세워진 것이다. 얼마 후에는 백제가 점령했던 하류 지역까지 빼앗아,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단양 적성비   
6세기 중엽, 신라군이 고구려의 적성을 점령하고 세운 비이다. 충북 단양 소재.

이로 말미암아 나⋅제 동맹은 깨어지고, 백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백제는 이와 같이 고구려와 신라의 협공을 받게 되자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중국과의 무역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신라는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멸하고, 북동쪽으로도 크게 뻗쳐 한때는 그 영토가 함경도 일대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고구려의 대 한족 투쟁

6세기 말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이 수에 의해서 통일되자, 그 세력이 우리 나라에 압력을 가해 오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는 항상 북방 민족들을 자극하여 중국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또, 수의 세력이 커지자, 이에 대항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먼저 북방의 돌궐족을 위압하여 복속시킨 다음, 11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강력히 항전하여 곳곳에서 수의 군대를 막아 냈다. 이에 초조해진 수는 약 30만의 별동대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왔으나, 을지문덕은 유도 작전을 써서 살수에서 이를 전멸시켰다. 이 대첩을 살수 대첩이라 한다(612). 수의 대규모 침입은 이와 같이 비참한 패전으로 끝나고, 이로 말미암아 수는 내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천리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장성은 북의 부여성과 남의 비사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이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다음부터는 고구려의 당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해졌고, 당과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은 수가 망한 뒤에 다시 일어났던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을 평정하는 한편,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준비를 갖춘 다음, 당 태종은 스스로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당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점령하고, 이 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의 군⋅민은 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를 60여 일이나 계속하여 당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 동안에 고구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적군을 포위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면적으로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거기에다가 추위까지 닥쳐 오자, 당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당 전쟁   

백제와 고구려의 붕괴

한강 유역을 확보한 신라는 이 지역을 되찾으려는 여⋅제 양국의 공격을 받았다. 신라는 김유신 등이 이를 막아 내는 한편,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당군과 힘을 합쳐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를 먼저 정벌한 다음, 고구려를 남북 양면에서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

이리하여,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당의 소정방이 거느린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당군은 백강에 상륙하였다. 백제에서는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싸웠으나 전멸당하고, 서울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지고 말았다(660).

한편, 당 태종이 자주 고구려를 침범하자, 고구려 지배하의 거란족과 말갈족 부락들이 당에 복속하게 되어 요동 방위선이 점차 약화되었다. 고구려가 이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연개소문이 죽자 지도층 사이에서 내분이 크게 일어났다. 이를 틈타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고구려는 무너지고 말았다(668).

나⋅당 전쟁과 삼국 통일

백제가 망한 뒤, 당은 의자왕의 아들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백제를 계속 지배하려는 정책을 펴는 한편, 신라의 장군들을 회유하여 신라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을 펴 나갔다. 이에 나⋅당 간에는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에 정면으로 대결하고,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하여 임천 지방과 웅진 도독부를 공격하였다. 이에 당은, 여⋅제 양 지역에 남은 주둔군으로 하여금 대항하게 하는 한편, 거란병과 말갈병을 동원하여 북방으로부터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는, 마전, 적성 등지에서 당⋅말갈⋅거란의 군대를 대파하고, 매초성 일대에서 당⋅말갈의 20만 병력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노획한 말만도 3만 필이 넘었다. 그뿐 아니라, 백제 지역에 침입하려는 당의 해군을 금강 하구에서 여러 차례 섬멸하였다. 이에 당도 할 수 없이 물러가고, 신라는 자주적인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676).

1) 통구에 남아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는 장수왕 때(414) 건립된 것으로, 그의 영토 확장 과정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영락 5년(395)의 비려 정복, 396년의 왜와 연결된 백제 정벌, 398년의 숙신 정복, 400년의 신라⋅가야의 정벌, 407년의 북방 정복, 410년의 동부여 정복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19세기 말에 일본군이 이 비석의 중요한 비문 일부를 위작하여 일본의 이른바 임나 경영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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