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Ⅱ. 근대 사회의 전개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1) 근대화의 추진

개화 정책의 추진

일찍이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표면화된 통상 개화론은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론, 곧 개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개화 사상은 안으로는 실학, 특히 북학파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밖으로는 청에서 진행되고 있던 양무 운동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던 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었다.

개항 후, 조선 정부는 제1차 수신사 김기수와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변화를 알고,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대외 관계와 근대 문물의 수입 등 여러 가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화파 인물들을 정계에 기용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정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 군사, 산업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군사 제도면에서는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 장어영의 2영으로 통합, 개편하였으며, 신식 군대의 양성을 위하여 별도로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적 군사 훈련을 시키고, 사관 생도를 양성하였다.

신식 군대의 훈련 광경   

한편, 정부는 근대 문물을 살펴보기 위하여 일본에는 신사 유람단을, 청국에는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신사 유람단은 일본에 건너가서 약 3개월 동안 일본의 정부 기관은 물론, 각종 산업 시설을 시찰하였다.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돌아온 신사 유람단 일행은, 각기 담당 분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을 뒷받침하였다.

영선사 일행은 청국의 톈진에서 무기 제조법과 근대적 군사 훈련법을 배웠다.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 만에 돌아왔으나, 이를 계기로 서울에 기기창(機器廠)이 설치되었다.

위정 척사 운동의 전개

개화 정책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은, 먼저 유생층에 의하여 위정 척사(衛正斥邪)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위정 척사는, 정학(正學)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성리학을 정통 사상으로 신봉하였던 조선 사회에서, 위정이란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는 것이고, 척사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전래되자, 이질적인 서구 종교, 서양 문화가 배격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초기의 위정 척사 운동은 이항로, 기정진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최익현   

척사 운동은, 1860년대에는 서양의 통상 요구에 대응하여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어서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 주전론(斥和主戰論)으로 나타나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를 강력히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유생들은 1870년대의 문호 개방을 전후해서, 왜양 일체론(倭洋一體論),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조선 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 등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척사 운동은 1890년대 이후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위정 척사론자들이 외국과의 교역 및 개화 정책에 반대한 주요 이유는, 서양의 공업 생산품과 우리의 농업 생산물을 교역하면 경제적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과, 일단 문호를 개방하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강력한 반침략, 반외세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반외세적 자주 운동으로만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선 왕조의 전제주의적 정치 체제, 지주 중심의 봉건적 경제 체제, 양반 중심의 차별적 사회 체제, 그리고 성리학적 유일 사상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정 척사 운동은 당시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장애물이 되었고, 그만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의 발발

개화 정책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은 유생층에서뿐만 아니라 구식 군인들에 의해서도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 데 대한 불만에서 폭발하였다(1882).

구식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고, 정부 고관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한편,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합세한 가운데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하였다. 임오군란은 대원군의 재집권으로 진정되는 듯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 간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즉, 일본은 조선 내의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군대 파견의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청은 신속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청에 압송해 감으로써 일본의 무력 개입 구실을 없애려 하였다. 이 때,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을 물고,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인정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군인과 주민들   

청은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였다. 곧, 위안 스카이(袁世凱) 등이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젠창(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 문제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로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허용하게 되고,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되었다. 한편, 다시 집권하게 된 민씨 일파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개화당의 형성과 활동

개화 사상의 선각자인 박규수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이 개항을 전후해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개화파를 이루었다. 개화파는 1880년대에 들어, 정계에 진출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개화파에는 개화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방법론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정치가들이라고 할 만한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민씨 정권과 결탁하여 청의 양무 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이들을 온건 개화파 또는 사대당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소장파 관료들은 청의 내정 간섭과 청에 의존하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더욱이 청의 간섭으로 정부의 개화 정책이 원만하게 추진되지 못하는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급진 개화파 또는 개화당이라고 하는 이들은, 청의 간섭을 물리쳐 자주 독립을 이룩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김옥균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 요인들은, 박규수가 죽은 뒤에 중인 출신으로 개화 사상의 선각자였던 유홍기의 지도를 받았다. 또, 자신들이 직접 일본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고 근대적 국정 개혁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개화당의 활동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임오군란 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 김옥균, 서광범 등도 그와 동행하였다. 이들 개화당 요인들은 해박한 개화 지식과 넓은 해외 견문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가지의 개화 시책을 실천해 갔다. 예컨대,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 순보를 간행하였고, 군사와 학술 등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근대적인 우편 사업을 위하여 우정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은 일본의 태도가 냉담하여 개화 운동을 위한 차관 도입에 실패함으로써 정치 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졌고,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친청 세력의 견제가 날로 심해져서 개화 운동을 뜻대로 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갑신정변과 그 의의

임오군란 이후 민씨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친청 세력은, 그들에 반대하는 개화당을 탄압하였다. 친청 세력의 압박으로 개화 정책의 추진은 물론 자신들의 신변마저 위험을 느끼게 된 개화당 요인들은,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철저한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비상 수단을 도모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일부를 철수시켰다. 개화당 요인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정변을 계획하였다. 개화당은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을 받고 정변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김옥균 등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사대당 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뒤, 14개조의 정강을 마련하였다(1884). 그 내용은, 청에 대한 사대 관계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지조법(地租法)의 개혁,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내각 중심 정치의 실시 등이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강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정변 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이 철수할 것, 그리고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과 동등하게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었다.

갑신정변은, 개화당의 세력 기반이 약하였고, 청이 무력으로 간섭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청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고,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개화 세력이 도태되어 상당 기간 동안 개화 운동의 흐름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갑신정변은 조선의 자주와 개화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정치면에서는,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정치 개혁을 최초로 시도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여 봉건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곧,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고, 역사 발전에 합치되는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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