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2. 중세의 경제[2] 경제 활동

상업 활동과 화폐 주조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등 대도시에는 관청의 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판매하는 서적점, 약점과 술, 차 등을 파는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두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비정기적인 시장이 있어 도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매매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농민, 수공업자, 관리 등이 관아 근처에 모여들어 쌀, 베 등 일용품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을 열었다. 행상들은 이런 지방 시장에서 물품을 팔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베나 곡식을 받고 소금, 일용품 등을 판매하였다. 또, 사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과 승려나 사원 노비가 만든 수공업품을 민간에 팔았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도시와 지방의 상업 활동이 전기보다 활발해져 시전 규모도 확대되고 업종별 전문화가 나타났다. 개경의 상업 활동은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들이 교통로와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지방 상업에서는 행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운로를 따라 미곡, 생선, 소금, 도자기 등이 교역되었으며, 새로운 육상로가 개척되면서 여관인 원이 발달하여 이 곳이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또, 관청, 관리, 사원 등은 강제로 농민에게 물건을 판매하거나 구입하도록 하고 조세를 대납하는 등 농민을 강제적으로 유통 경제에 참여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업 발달에 힘입어 부를 축적하여 관리가 되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생겨났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를 만들었으며, 숙종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통상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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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상업

신우(우왕) 7년(1381) 8월에 서울(개성)의 물가가 뛰어올랐는데, 장사하는 자들이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최영이 이를 미워하여 무릇 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모두 경시서로 하여금 물가를 평정(評定)하고 세인(稅印 : 세금을 바쳤다는 도장)을 찍게 하고 난 뒤에 비로소 매매하게 하였고, 도장을 찍지 않은 물건을 매매하는 자는 ……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경시서에 큰 갈고리를 걸어 두고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장사하는 자들이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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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화폐 정책

내(목종) 선대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법도와 양식을 따라 조서를 반포하고 화폐를 주조하니, 수년 만에 돈꿰미가 창고에 가득 차서 화폐를 통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에 선대의 조정을 이어서 전폐(錢幣:돈)는 사용하고 추포(麤布:발이 굵고 바탕이 거친 베)를 쓰는 것을 금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은, 국가에 이익되는 것이 아니라 한갓 백성들의 원성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다. …… 문득 근본을 힘쓰는 마음을 지니고서 돈을 사용하는 길을 다시 정하니, 차와 술과 음식 등을 파는 점포들에서는 교역에 전과 같이 전폐를 사용하도록 하고, 그 밖에 백성이 사사로이 서로 교역하는 데에는 임의로 토산물을 쓰도록 하라. 〈고려사〉

활구(은병)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떠서 은 1근으로 만든 고가의 화폐로, 은병 하나의 값은 포 100여 필이나 되었다.
고려의 교통로와 산업 중심지
삼한통보
해동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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