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자라나는 민주 대한

(3) 민족의 해방과 민주 대한

끝없는 일본의 야망

이와 같이 갖은 수단을 다하여 한국을 제 손아귀에 넣은 일제는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국(滿州國)이란 괴뢰 정권을 세워서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만주 침략에 성공한 일본은 동양 전체를 자기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힘을 다하여 대륙 진출에 노력하였다. 이 때 일본은 새로 개척하여야 할 황무지에다 우리 겨레를 강제로 이주케 하였으며, 침략을 위한 일 터에 강제로 한국 청년들을 뽑아 갔다.

이 때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수 많은 우리의 무장 독립 단체가 동북 만주와 간도 지방에서 궐기하여 활발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일본군과 거듭 심한 싸움을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한 편 상해 지방에서 광복 운동을 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식장에 폭탄을 던져, 대륙 침략의 선두에 섰던 일본인의 중요 간부를 살해하여, 4억의 중국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적의 수도 토요쿄오(東京)에서는 이봉창(李奉昌)이 천황을 권총으로 저격하는 의거를 일으킨 바 있었다. 악착스러운 일본은 한국 청년들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국내의 언론과 행동을 크게 탄압하고, 교육에 있어서는 일본에 충성을 다하도록 가르치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민족 사상을 빼앗고자 이름을 왜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며,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들을 전쟁 마당에 끌어 내었다.

일본은 만주를 뺏은 후, 다시 중국에까지 그의 마수를 뻗쳐,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유럽에는 도이치, 이탈리아의 침략국과 미, 영, 불, 소의 연합국이 싸우고 있었는데, 일본은 독, 이의 침략자와 손을 잡고 세계를 휘두르고자, 이들과 동맹을 맺어 태평양을 지배하고, 대륙을 어우르고자 꿈꾸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해방

일본은 1941년 미국, 영국에까지 덤벼들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한 때는 태평양의 여러 섬과 멀레이 반도, 동남 아시아까지도 점령하였으나, 자유 세계를 보호하려는 연합군은 발달된 과학과 풍부한 물자를 이용하여, 일본 세력을 여지없이 몰아내었다. 중국 대륙에서의 중국군의 반격도 강하였으며, 대륙에 망명하였던 우리 동포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맹렬한 대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연합군의 날카로운 반격과 본토 공습이 매우 심해져, 일본은 싸우고자 하는 의기가 날로 꺾이더니, 1945년 8월초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이 떨어지자 악착스럽던 일본도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총독의 항복   

1943년에 미, 영, 중 세 나라는 카이로에서 회담하여 일본이 항복하면 아시아의 모든 상태는 8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굳은 선언을 한바 있었고, 1945년 7월에는 포츠담에서 이것을 거듭 확인하여, 일본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해방을 더욱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우리 겨레는 해방의 기쁨을 받게 되었다.

The afor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카이로 선언문(한국 독립을 결정한 조항)

대한민국의 수립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으로선 잊을 수 없는 날이다.

36년 동안 일제의 혹독한 손아귀에서 시달리던 한민족이 자주 독립의 깃발을 드높이 날리며 감격에 잠겼던 날이기 때문이다.

해방된 서울 거리   

그러나 독립은 곧 찾아오지 않았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할 목적으로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은, 한국의 독립보다도 자기의 세력 밑에 넣을 수 있는 공산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책으로, 한국 독립을 일부러 늦추고 있었다. 38도선 이남에 들어온 미국은 우리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소련과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가졌으나, 딴 생각을 품은 소련은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독립을 갈망하던 한민족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국민의 여론을 유엔 총회에 반영시키니, 유엔은 1948년 한국 독립을 결의하고, 유엔위원단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10일 남한 전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우리의 손으로 국민의 대표인 국회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에 곧 국회가 헌법을 마련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李承晩)박사를 선출 추대하니, 대통령은 국민의 환호 가운데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포하여, 이에 우리 손으로 씩씩한 민주 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 대통령의 취임식   
5⋅10 선거   
대한민국 독립 선포식   

대한민국의 자라남

우리 정부는 유엔 총회에서 독립 국가임을 승인받고, 이어 세계의 중요한 나라들의 승인을 얻어 외교 사절을 교환하니, 당당한 독립 국가로서 국제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신생한 우리 나라는 일제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 정치의 해독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한 편, 유엔 여러 나라의 원조로 큰 공장이 만들어지고, 산업이 부흥되어 민생은 유복하게 되어갔다.

또한 선진 국가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 수준이 높아졌으며,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어 국민은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민주적 발전은 착착 그 열매를 맺고 있음에 반하여, 불행히도 소련군에게 점령당한 38도선 이북의 땅은 그들의 지배하에 움직이는 공산 괴뢰들의 심한 압제 밑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받은 것 이상으로 노예 생활을 강요 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산 압정을 벗어나 38도 선을 죽음을 무릅쓰며 넘어서, 따뜻한 민주 대한의 품을 찾아 남쪽 땅을 향해 내려오는 피난민은 줄을 지었으니, 이는 소련의 침략적 행동과 공산 압제를 세계에 사실로써 폭로하는 것이라 하겠다.

북쪽의 겨레는 소련과 그 앞잡이들에 의하여 행동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겼으며, 소련은 북한 땅을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심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산군의 남침

대한민국은 산업과 문화 방면에 힘을 기울여,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한 편, 밖으로는 평화적으로 남북 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반면에 소련의 앞잡이인 공산군은 무도하게도 무력으로써 남한을 병탄하고자 비밀리에 막대한 무기를 소련에서 얻어 들이더니, 비겁하게도 1950년 6월 25일을 기하여 평화스러운 우리 땅에 침략을 개시하여 국토를 전쟁터로 만들어, 가는 곳마다 살인, 방화를 일삼아 수라장을 이루었었다. 뜻하지 않았던 기습을 받은 우리 대한민국은 하는 수 없이 전략적인 후퇴를 하면서 전선을 정비하여 그들에 대항했다. 국제 평화를 위한 세계의 기구인 유엔에서는 집단 안전 보장(集團安全保障)의 견지에서, 침략자 공산군을 격멸하고자 출병을 결의하니, 미국을 위시하여 영국, 프랑스 등의 큰 나라는 물론, 이디오피아, 컬럼비아 같은 작은 나라에 이르기까지 유엔군으로서 참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힘을 합하여 대구(大邱) 근처까지 내려왔던 공산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단행하고, 인천(仁川)에 대규모의 상륙 작전을 일으켜, 9월 28일 서울을 다시 찾고, 나아가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여 평양, 함흥은 물론 압록강에까지 진격하였다. 이리하여 국토 통일이 바야흐로 완수되려는 때에, 무법하게도 돌연 중공군이 개입하여 인해전술로써 대어들게 되매, 국군과 유엔군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한 후, 다시 반격전을 시작하여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북진하는 유엔군   

1952년 여름부터 판문점(板門店)에서 시작된 유엔군과 공산군과의 휴전 교섭은 국토의 완전 통일을 주장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민족의 소리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되어 마침내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휴전 조인 때의 휴전선   

〈알아두기〉

만주 사변. 윤봉길. 이봉창. 창씨개명. 지원병 제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포츠담 선언. 카이로 선언. 민족의 해방. 북위 38도 선. 유엔. 5⋅10 선거. 대한민국 수립. 헌법제정. 6⋅25 사변. 국군의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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