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국의 사회와 문화
〔학습 개요〕
삼국은 발달된 제도와 높은 문화를 이룩하였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제도 등을 갖추었다. 특히, 신라에는 골품이라고 하는 신분 제도가 있어 사회를 규제하였다.
삼국은 일찍부터 독자적인 사상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4세기 이후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문화의 터전을 넓히고, 각기 역사를 편찬하였다.
한편, 시가, 음악, 그리고 건축, 회화, 조각, 공예 등의 예술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삼국의 학문과 예술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습 문제
1. 삼국의 정치 제도와 사회 제도는 각기 어떠한 특색을 지니고 있을까?
2. 화랑도는 신라 사회의 발전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을까?
3. 삼국의 종교와 학문은 어떠한 특색을 가지고 전개되었을까?
4. 삼국의 문화는 어떻게 일본에 전파되었으며, 그 영향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삼국의 사회
삼국은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삼국은 각각 왕족을 포함한 중앙의 귀족이 정치, 문화의 담당자로서 특권을 행사하였다.
고구려는 계루부의 고씨가 왕족이었고, 전 왕족인 소노부와 왕비족인 절노부가 최고의 귀족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아래에 일반 귀족과 평민, 노예층이 있었다.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와 왕비족인 진씨, 예씨 등을 포함한 8개의 귀족 가문이 있었다.
신라는 초기에 박, 석, 김의 3성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내물왕 이후로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라에는 골품이라 하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었는데, 골품에는 왕족인 성골, 진골과 귀족인 6, 5, 4두품이 있었다. 성골 출신의 왕은 진덕 여왕으로 끝나고, 태종 무열왕 이후로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다.
6두품은 왕족이 아니므로 아찬 이상의 높은 벼슬은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높이 진출하지 못해서 점차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주로 학문과 종교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에서는 왕족이나 왕비족을 중심으로 일부의 중앙 귀족층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 중, 신라에서는 이러한 귀족의 대표가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만장 일치로 처리하였는데, 이것이 화백의 제도이다. 고구려와 백제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한편, 신라에서는 나라에 유능한 청년을 양성하기 위하여,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개편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랑과 낭도로 구성된 화랑도는, 평시에는 명산 대천을 찾아 도의를 닦고 무술을 익혔다가, 전쟁시에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다. 화랑도는 세속 5계 등의 가르침을 따라 심신을 단련하였는데, 훌륭한 재상과 명장이 이 화랑도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치 생활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삼국은 점차 중앙 집권적인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에는 대대로 이하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있어 정사를 맡아 보았다. 행정 구역은 수도와 전국을 각각 5부로 나누었는데, 지방 각 부에는 욕살을 두어 다스렸고, 성을 쌓아 국방에 대비하였다.
백제에는 왕 아래에 16등급의 관리들이 있었고, 중앙에 상좌평 등 6좌평이 있어 나라일을 나누어 맡았는데, 후기에는 중앙에 22부의 실무 관청과 지방에 22개의 담로를 두어 나라를 다스렸다. 행정 구역은 수도를 5부로 나누고 지방은 5방으로 나누었는데, 방에는 방령을 두어 다스렸고, 방 아래에는 군을 두었다.
신라에는 이벌찬 이하 17등급의 관리들이 있었다. 관리의 등급은 골품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신분에 따라 그 진출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신라는 중앙에 병부 이하 여러 관청이 있었고,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이 국사를 총괄하였다. 진덕 여왕 이후에는 집사부 중시의 지위가 높아졌다. 수도는 6부로 나누었으며, 지방은 5주로 나누어 군주를 두었다. 그 아래에 군, 현을 두었는데, 농민은 실제로 촌주가 다스렸다.
경제 생활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고 있던 삼국은 국가적으로 농업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는 수리 시설을 크게 확장시켜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산악 지대의 고구려에서는 조가 주요 작물이었다. 삼국은 농업 외에 어업과 목축업도 발달하였다. 이러한 생산물은 거의 중앙의 귀족이 독점하여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불교와 도교
삼국 시대에는 각국이 부족 시대부터 내려오던 자연신을 받드는 자연신 숭배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조상신과 국가 수호신을 받들어 그에 대한 제사를 국가적으로 지냈다. 민간에서는 무속, 점술 등의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신앙들은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으므로, 각국은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체계적인 종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정신적 바탕으로 삼았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삼국에 전래되었다. 먼저,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때 전진에서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고, 백제에는 침류왕 때 동진에서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의 경우에는 눌지왕 때에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들어와 전도하였으나, 뿌리 깊은 고유 신앙 때문에 오랫동안 국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과 중국의 학문, 미술, 과학 기술 등이 전래되어, 삼국의 사회,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다. 삼국은 모두 불교가 나라를 수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종교라고 생각하여, 불교를 국가적인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삼국에서는 불교 및 서역과 중국에서 전해진 학문의 연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큰 절과 탑파를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등 불교 예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학문이나 예술로 널리 이름을 떨친 승려들이 많이 나왔는데, 고구려의 혜량, 담징, 백제의 관륵, 겸익, 신라의 원광, 자장 등은 모두 이름 높은 승려들이었다.
한편, 고구려에는 영류왕 때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었는데, 도교는 그 후 백제, 신라에도 퍼져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사신도나 백제의 산수문전, 그리고 신라의 화랑도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과 이두
우리 나라에 한자가 전래된 것은 고조선 말기부터의 일이지만,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광개토 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나 진흥왕 순수비, 단양 적성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자의 음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노력도 있었는데, 뒷날 신라의 설총은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이두를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한자의 보급은 학문의 발달을 가져 왔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 서울에 태학을 세웠고, 그 후 지방 여러 곳에 경당을 세워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에서는 유교 경전의 내용을 가르치는 오경 박사가 있었으며, 또 천문, 역법, 의학 등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
학문의 발달과 함께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식이 자라났다. 고구려에는 일찌기 유기 100권이 전해 왔었는데, 영양왕 때 태학 박사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서기라는 국사책을 썼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시가와 풍속
예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우리 겨레는 많은 노래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고구려에서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에게 지어 보낸 5언시가 한자로 기록되어 전해 오고 있다. 신라에서는 향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표기한 것으로, 주로 승려들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에서는 여러 가지의 악기가 만들어졌고, 악곡도 지어 음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왕산악은 중국의 악기를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의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유명하였으며, 가야의 우륵은 가야금 곡조 185곡을 지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일본에 악사, 악공, 악기를 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음악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냥을 좋아하고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을 지니고 있었으며, 매년 3월 3일에는 사냥으로 무술을 겨루었다.
신라에서는 부녀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길쌈 대회를 열어 한가윗날 그 결과를 헤아려, 이 때 진 편에서는 회소곡을 불렀다고 한다.
고분 미술
삼국 시대에는 많은 고분이 만들어졌는데, 이 고분들은 단순한 무덤이라기보다는 고대인들의 정신이 담긴 예술과 지혜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미술 솜씨는, 옛 서울이던 통구와 평양 부근에 있는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장군총의 웅장한 모습과 쌍영총의 아름다운 내부 구조, 그리고 무용총을 비롯한 많은 무덤에서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다. 특히, 고분 내부에 그려진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 사신도와 같은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패기와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백제 역시 무녕왕릉을 비롯하여 공주와 부여에 많은 고분을 남겼는데, 이들을 통해서 백제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신라 역시 고분을 통하여 많은 예술품을 남기고 있다. 신라의 고분은 목곽분 혹은 석실분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서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와 많은 유물들은 신라인의 훌륭한 솜씨를 보여 준다.
석탑과 공예
삼국 시대의 미술은 특히 건축, 조각 등에 뛰어난 솜씨가 나타나 있다. 초기의 미술품에는 소박한 자연미가 깃들여 있으나, 점차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불교 미술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삼국의 지상 건축물로서 대표적인 것은 탑이다. 처음에는 목조탑이 많이 건립되었으나, 후에는 석탑이 주로 건립되었다. 특히, 황룡사의 9층 목탑은 거대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목탑 양식의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의 대표적 석탑이다. 신라는 분황사 석탑, 첨성대 등의 석조 건물을 남겼다.
조각품으로는 불상이 대부분인데, 불상에는 작은 금동불과 커다란 석불이 있다. 고구려의 불상은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이 힘찬 고구려 미술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제 불상으로는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서산 마애 삼존 석불이 유명하다. 신라에도 신라 문화의 특색을 보여 주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는데, 특히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유명하다. 신라의 양지라는 승려는 조각가로서 유명하였다.
공예품은 고분과 절터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공주 무녕왕릉과 경주 금관총, 천마총 등에서 발굴된 금관, 그리고 금은으로 만든 팔찌, 허리띠, 목걸이와 여러 가지 구슬로 만든 장식품들은 무척 아름답고 정교하다. 기와나 벽돌의 무늬도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백제의 산수문전은 유명하다.
문화의 전파
삼국은 서로 대립되어 경쟁하는 중에서도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하였다. 중국과도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미술을 발전시키는 한편, 바다 건너 일본에 문화를 건네 주어 그들 문화의 기틀을 잡아 주기도 하였다.
백제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유학을 가르쳤고, 단양이, 고안무 등도 건너가 학문을 가르쳤고, 성왕 때에는 불교를 전해 주었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승려들은 일본의 불교계를 지도하였다.
유학과 불교 외에, 미술, 음악, 역학, 의학과 농업 등 여러 가지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특히, 담징은 종이, 붓, 먹, 벼루 만드는 법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 주었으며, 호오류우 사의 벽화도 남겼다. 일본이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고 고대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의 문화를 전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카마쓰 고분 벽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 유품에 잘 나타나 있다.
학습 정리
1. 신라에는 골품이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었으며, 무열왕 이후에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다. 6두품은 주로 종교와 학문 부문에 기여하였다.
2. 불교는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는 삼국에 정신적으로 크게 이바지하였고,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3. 삼국 시대의 예술품은 대체로 소박한 자연미가 표현되었거나 불교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4. 삼국 문화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고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고, 아스카 문화 성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