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일 신라와 발해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2]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는 어떠하였나?

활발한 대외 교류

당의 침략을 물리친 후 통일 신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공식 사절을 비롯하여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와 문물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하였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당의 선진 문화와 서역 문화까지 받아들였으며, 당으로부터 ‘군자의 나라’로 칭송을 받았다.

통일 후,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무역량의 비약적인 증가로 신라의 경제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통일 전에는 주된 수출품이 토산 원료품이었으나, 통일 후에는 금⋅은 세공품, 인삼 등으로 바뀌었다. 특히, 신라의 수출품 중에서 ‘신라칼’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신라는 당에서 진귀한 고급 비단과 옷, 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는데 대개가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울산항을 통해 진귀한 보석, 모직물, 향료 등의 남방 물산을 들여와 신라 귀족들의 사치심을 조장하였다. 이리하여 흥덕왕 때에는 ‘진귀한 외래품만을 숭상한다.’고 하여 사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당으로 가는 바닷길로는 통일 전부터 이용하였던 당항성에서 산둥반도로 가는 길과,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산둥 반도나 남중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항은 당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까지도 내왕하였다. 또, 신라인들이 자주 당을 왕래함에 따라 산둥 반도와 화이허강 하류 일대에는 신라인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생겼고, 신라소라는 감독 관청과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있었다.

종교나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당에 파견되었다. 의상은 당에서 화엄종의 교리를 배우고 귀국하여 신라 화엄종을 열었다. 그 밖에 원측은 불교 이론을 한 단계 높여서 당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혜초는 당을 거쳐 인도에 가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유학생들 중에는 당의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운경, 최치원 등이 유명하였다.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으로 당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유학생들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상,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이 저술한 책들이 일본 불교계에 널리 읽혔다. 의상과 그를 도운 선묘 이야기가 일본에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원효는 일본 불교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다.

왕오천축국전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와 부근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이다. 고대 인도의 사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끼게 하는 책으로,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 유학생(숙위 학생)

신라 때 당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을 숙위 학생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외국인에게 응시 기회를 준 빈공과라는 과거에 합격하여 당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신라에 돌아와서는 골품제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여 신라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읽기자료

⋅ 천축국 다섯 나라를 가다 ⋅

“……한 달 뒤에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페하여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스님 한 분이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매년 8월 8일이 되면 스님과 여승, 도인과 속인이 모두 그리로 모여 대대적으로 볼공을 드린다. 그 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보고, 이 날을 기하여 불교를 믿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왕오천축국전
금제 여래 좌상 | 경주 황복사 3층 석탑 출토
통일 신라의 토용 남자상(왼쪽)과 문관상(오른쪽)
통일 신라의 토용 남자상(왼쪽)과 문관상(오른쪽)
신라방과 신라⋅발해의 무역⋅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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