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고려의 성립과 발전2. 무신 정권의 성립[3] 무신 정권기에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농민과 천민의 봉기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농민, 천민 등 하층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서북 지방 일대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 농민의 저항 운동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진압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켜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주와 강릉 지역 또한 연합하여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의 부흥을 내세운 이후 서경, 담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을 외치면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부곡, 등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과 노비의 봉기가 활발하게 일어난 점도 하층민 봉기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특히, 신분 해방을 꿈꾸며 개인이나 관청에 예속되어 각종 잡역에 시달리던 노비들의 저항 운동이 유례 없이 치열하게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의 저항 운동이 신분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주에서는 지방관의 가혹한 사역에 반발하여 관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30여 년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 해방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읽기자료

⋅ 봉기의 여러 모습 ⋅

망이⋅망소이의 난
망이 등이 흥경원을 불태우고 그 곳에 있던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을 승격하여 현으로 만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시키더니,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치고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른 연후에 그만둘 것이다.” ‘고려사’
만적의 난
만적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를 불러모아 모의하기를 “국가에서 경계년(무신정변) 이래로 천한 무리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니,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는 고달프게 일하면서 채찍 아래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하니 모든 노비가 그렇게 여겼다. …… 약속한 날이 되어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명령하기를 “일을 비밀히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여 누설치 말라.” 하였다. 율학 박사 한충유의 집안 노비인 순정이 이를 주인에게 밀고하니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하였고, 최충헌만적 등 100여 명을 잡아 강에 던졌다.
‘고려사’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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