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조선사회의 변동1. 붕당 정치와 탕평책[3] 실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추구하였는가?

실학의 대두

성리학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정치와 생활의 보편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학자는 물론이고 정치가들까지도 성리학에 몰두하여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경시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성리학 중심의 학문 활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는 데에는 성리학이 제 구실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붕당 정치가 파탄에 직면하고 노론의 장기 집권이 행해지면서 노론의 몇몇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많은 양반들이 몰락하였다.

농촌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부농이 생기는가 하면,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도 없는 지경이 되어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편, 도시에서는 대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지배하고 부를 축적한 반면, 영세 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개혁하고자 실학이 대두하였다.

실학은 정치⋅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담고 있었다. 일부 집권 세력도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대체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쪽에서 그러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밀려났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왔다.

실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그들의 연구 대상은 그 밖에도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

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 김육 등이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화 전통을 폭넓게 정리하였다. 김육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동전을 널리 사용하게 하는 데 힘썼다.

고증학실학

청에서 실증적인 학풍을 중시하였던 고증학이 전해지면서 실학의 연구는 그 깊이가 더해졌다.

대동법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민호에 부과하던 토산물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12말씩 대동미를 부담하도록 세제를 개혁한 것이다.
벼타작 |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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